사물의 향한 시인의 시선과 상상력
―이달균의 「장미」와 「복분자」를 논거(論據)로 삼아
장경렬 (서울대 영문과 교수)
1. 무엇을 문제 삼을 것인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이데아(Idea)’라는 개념과 함께 ‘판타지아(phantasia)’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는데, 이때의 판타지아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력’이라고 일컫는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개념과 관련하여 그는 인간의 저급한 영혼과 관련된 것이라는 부정적인 견해와 신비로운 비전을 일깨우는 초월적 이성이라는 긍정적인 견해를 동시에 제시한 바 있다. 플라톤의 부정적인 견해는 판타지아가 제공하는 이미지는 환영(幻影, illusion)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또는 실재, reality)에 대한 그 어떤 지식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 나아가 이는 예술가나 시인과 같은 비합리적인 영혼의 자극에 의해 생성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 등의 논리로 정리될 수 있다. 한편, 그의 긍정적인 견해는 이데아로부터 이미지를 형성하는 일이 신에게는 가능하다는 것, 이성적 영혼의 지배를 받는 이데아는 이미지의 형태로 숙고될 수 있다는 것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요컨대, 신적인 것인가 또는 인간적인 것인가가 판타지아를 긍정적인 개념으로 볼 것인가 또는 부정적인 개념으로 볼 것인가의 기준이 된 셈이다. 그 이후 예술가든 시인이든 인간이 지닌 정신능력으로서의 상상력은 대체로 부정적인 측면에서 논의되어 왔다. 아마도 그런 전통을 일별케 하는 사례 가운데 하나가 광인, 연인, 시인의 공통점을 상상력으로 규정한 셰익스피어의 대사일 것이다.
플라톤이 예술가나 시인의 상상력과 관련하여 내세운 부정적 입장은 물론 그들에 대한 불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에게는 예술가나 시인의 작업은 기껏해야 ‘이데아’의 모방물인 현실을 한 번 더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정신을 혼미케 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했던 것이다. 하지만 만일 이러한 불신감을 떨쳐버리고 예술가나 시인이란 신적인 창조력을 지닌 존재로 보게 되는 경우, 플라톤의 부정적인 견해는 얼마든지 긍정적인 것으로 바뀔 수 있다. 바로 이 같은 변화가 유럽에서는 낭만주의와 함께 시작되었는데, 낭만주의란 예술가나 시인의 능력을 단순히 모방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것으로 보는 문예사조라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인간의 상상력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긍정적인 것으로 논리화하고, 이를 인간이 지닌 소중한 창조 능력으로 재평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새뮤얼 테일러 코울리지(Samuel Taylor Coleridge)다.
코울리지는 자신의 ?문학 전기?(Literaria Biographia)에서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모든 작품 세계를 지배하는 [시적] 탁월성”으로 인해 “공상력(空想力, fancy)과 상상력(想像力, imagination)이 명백히 구분되는 전혀 별개의 두 능력이 아닌가라는 의혹을 처음 품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어지는 온갖 논의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워즈워스가 지닌 창조적 정신능력은 ‘공상력’이 아닌 ‘상상력’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자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공상력이란 ‘기억력’의 한 형태”로서, “이미 결정이 되고 준비된 자료들을 연상의 법칙에 따라 받아들여야만 하는” 정신의 수동적인 측면을 지시한다. 반면에 상상력이란 일상의 언어에 내재되어 있는 인식상의 한계를 초월하는 능동적이고 ‘신적(divine)’인 정신능력을 말한다. 이를 코울리지가 동원한 철학 용어로 다시 정리하자면, “수동적 사물”과 “능동적 사유”가 변증법적인 합일의 과정에 이르게 하는 “중개적 정신능력”이다.
이처럼 고답적이고 난해한 이론화를 벗어나서 상상력을 좀 더 쉽게 설명할 수는 없을까. 쉽게 단순화하자면, 워즈워스는 사물과 마주하여 능동적인 사유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누구도 파악하지 못하는 사물의 잠재적 의미를 감지해 내는 특별한 능력을 두드러지게 펼쳐 보인 시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상력이란 예리하고 적극적인 마음의 눈을 동원하여 누구도 볼 수 없는 그 무언가의 의미를 사물에서 꿰뚫어 보는 정신능력을 말한다. 그렇다면, 공상력이란? 이는 사물과 마주하여 누구에게나 보일 법한 빤한 의미를 기계적으로 연상해 내는 능력을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정리해도 우리의 논의는 여전히 사변적이고 추상적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예술가나 시인의 창조 능력과 관련하여 논의의 핵심부에 놓이는 이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좀 더 쉽게 풀어 설명할 수는 없을까. 이어지는 논의는 ‘좀 더 쉽게 풀어 설명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논의의 편의를 위해 이달균의 최근 시조 시집 ?늙은 사자?에 수록된 「장미」와 「복분자」라는 두 편의 작품을 논의 마당 한가운데로 끌어들이기로 한다.
2. 「장미」와 “능청” 그리고 「복분자」와 “구라”
장미꽃과 복분자 열매는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에 속하는 것으로, 아마도 이를 소재로 창작된 시는 한자리에 모으기 불가능할 정도로 많을 것이다. 이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장미꽃과 복분자 열매와 같은 일상의 사물을 소재로 한 시가 창작되는 것은 시인의 상상력에는 한계가 따로 없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앞서 언급한 두 작품 가운데 우선 「장미」를 함께 읽기로 하자.
꽃이라면 모름지기
시인 하나쯤은 잡아먹고
시침 뚝! 떼고 앉을
화냥기는 있어야지
아무렴
요염에 가리어진
저 능청과 푸른 살의(殺意)
―「장미」 전문
단시조 형식의 이 작품에서는 “장미”라는 꽃이 시적 소재로 등장한다. 이 시는 실재하는 꽃으로서의 장미를 마주하고 이에 대해 시인이 느낀 바를 있는 그대로 담은 것일 수도 있지만, 장미꽃에 비유될 수 있는 어떤 대상―예컨대, 장미꽃처럼 아름다우나 파멸로 이끄는 이른바 ‘팜 파탈’(femme fatale)에 해당하는 여인―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장미꽃을 의인화한 작품일 수도 있고, 수사적 비유를 위해 장미꽃을 동원한 작품일 수도 있다. 시인이 어느 쪽을 의도했든, 이 작품에 관련해서는 비유적 차원의 시 해석을 피할 수는 없으리라. 아무튼, 여기에 덧붙여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면, 장미에서 누군가의 모습을 보거나 누군가의 모습에서 장미를 보는 일이 시인의 상상력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갖느냐다. 따지고 보면, 상상력의 차원에서 볼 때 그런 행위는 특별히 의미 있는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미 상투화된 이해의 시선을 반영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는 코울리지가 말하는 공상의 차원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이와 관련하여, 시인 이달균이 일깨우는 이미지는 단순히 누구나 쉽게 떠올리는 장미꽃의 이미지 또는 장미꽃에 비견되는 누군가의 이미지만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우리는 그 차원을 뛰어넘어 시인 특유의 상상력을 통해 형상화된 사물 또는 대상의 이미지와 의미를 일별할 수 있거니와, 이로 인해 그의 작품을 공상의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즉, 시인 특유의 상상력을 통해 형상화된 시인만의 “장미”라는 점에서 여전히 시인의 상상력이 문제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이에 대한 논의는 잠시 뒤로 미루고, 또 한 편의 단시조 형식의 작품인 「복분자」를 주목하기로 하자. 장미과 관목의 열매인 “복분자”가 소재로 등장하는 「복분자」는 「장미」와 달리 다중적(多重的)의 의미 읽기의 가능성을 애초에 배제하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이는 있는 그대로 “복분자”에 관한 시다. 시를 함께 읽어 보기로 하자.
만리장성과 구만리장천은
과장이 아니다
딸기 먹고 오줌 누니
요강이 뒤엎이다니
장삿속,
그 정도 구라는
되어야지
암만!
―「복분자」 전문
이 시에서는 복분자 열매하면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연상하는 바가 언급되고 있다. 즉, “딸기 먹고 오줌 누니 / 요강이 뒤엎[인]다”는 말에 담긴 연상 작용이 문제되고 있는데, 복분자의 열매를 보고 ‘뒤집어진 요강’―그것도 ‘오줌발이 너무 세서 뒤집어진 요강’―을 최초로 감지하고 이를 언어화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가 누구이든 그에게 우리는 상상력을 통해 사물을 자기 나름의 시선으로 본 ‘시인의 영예’를 부여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이런 이해는 너무도 상투화되고 시인의 말대로 “장삿속”이 따라붙다 보니, 이제는 참신한 상상력의 영역에서 퇴출된 지 오래다. 즉, 그런 이해는 공상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문제는 공상의 차원으로 전락한 사물 또는 대상 이해에 시인이 새로운 해석을 가하고 있다는 데 있다. 시인을 이 같은 새로운 해석으로 유도한 것은 무엇인가. 넓게 보아, 우리는 이 역시 시인 특유의 상상력에 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복분자」가 공상의 차원에 속하는 사물 또는 대상 이해를 시적 소재로 삼고 있지만, 이 시가 공상의 차원을 뛰어넘는 것임은 이 때문이다.
「장미」와 「복분자」가 단순한 연상 작용의 결과물이 아니라, 미묘하고도 예사롭지 않은 상상력의 산물임은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비교 분석할 때 또렷하게 확인된다. 이와 관련하여, 사물에 대한 비유적인 관찰의 결과물이든 또는 직접적인 관찰의 결과물이든, 「장미」와 「복분자」 사이에는 쉽게 감지하기 어려운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즉, 두 시가 모두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또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실제가 다르다는 점을 작품의 주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시인이 이 같은 주제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탐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전자의 시에서 시인은 “장미”가 자신의 실체를 은폐함으로써 겉으로 드러난 “장미”의 이미지가 실제로 그런 것보다 ‘약화(弱化)되어 있음’을 주목하고 있다면, 후자는 시에서 시인은 사람들이 “복분자”가 지니지 않은 속성을 지닌 것처럼 과장하는 가운데 겉으로 드러난 “복분자”의 이미지가 실제와는 달리 ‘강화(强化)되어 있음’을 주목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각각의 작품이 내장하고 있는 핵심어(核心語)를 하나씩 고르자면, “능청”과 “구라”가 될 것이다. 요컨대, 두 시는 모두 겉과 속이 다른 대상을 소재로 동원하고 있지만, “장미”가 “능청”을 떨며 실체를 은폐하고 있다면 “복분자”는 “구라”를 통해 실체 이상의 것으로 과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선명하게 대조되는 이 두 시에서 우리가 읽고 감지할 수 있는 시적 메시지가 있다면, 이는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한 논의를 위해 우리에게는 우선 「장미」에 대해 좀 더 세밀한 독해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우선 이 작품의 “장미”는 있는 그대로 자연의 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꽃이라면 모름지기 / 시인 하나쯤은 잡아먹고 // 시침 뚝! 떼고 앉을 / 화냥기는 있어야지”는 아름다우나 가시가 있는 꽃이 장미라는 객관적 사실을 시인 나름의 감성과 언어를 통해 ‘재(再)서술’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이 보기에, 장미는 “시인 하나쯤은 잡아먹고 // 시침 뚝! 떼고 앉을 / 화냥기는 있어” 보이는 꽃임을 서술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처럼 아름답지만 요사스러워 보이는 꽃인 동시에, 가리어져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능청과 푸른 살의”가 감지될 만큼 “요염”해 보이는 꽃이 장미라는 시인의 감성적 판단을 전하는 작품이 곧 「장미」일 수 있다.
하지만 「장미」가 단순히 시인이 보기에 장미는 아름답지만 요사스럽고 요염한 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시일까. 만일 그러하다면, 비록 표현의 새로움에 대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상상력과 관련하여 이 작품의 존재 이유는 따로 내세울 것이 있어 보인다. 장미는 아름다우나 가시가 있다는 사실이야 이 시가 없어도 우리가 식상할 만큼 되풀이해 언급되어 왔지 않은가. 따라서 우리의 읽기에 전환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는데, 만일 앞서 언급했듯 이때의 장미꽃을 ‘장미꽃처럼 아름다우나 파멸로 이끄는 어떤 여인’을 지시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보는 경우, “시인 하나쯤은 잡아먹고 // 시침 뚝! 떼고 앉을 / 화냥기는 있어야지”는 시인 주변의 누군가를 향한 냉소와 야유와 비난으로 읽힘으로써, 시적 진술에 나름의 현실감과 현장감이 더해진다. 아울러, “아무렴 / 요염에 가리어진 / 저 능청과 푸른 살의”도 냉소와 야유와 비난의 강도를 한층 더 강화하는 시적 진술로서의 역할을 무리 없이 수행한다. 우리가 앞서 시인의 의도가 무엇이든 이 시는 결국 비유적 차원에서 읽어야 할 것임을 지적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이 같은 장미의 의인화 역시 상투적인 이해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시에 대한 작품 읽기를 또 다른 차원에서 시도하지 않을 수 없거니와, 일단 비유적 읽기의 가능성을 수용하는 경우 「장미」의 “장미”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비유적 읽기로 우리를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장미」에 “시인”이 언급되고 있음을 주목하기 바란다. “시인 하나쯤은 잡아먹고”라니? 이 시에서 이처럼 잡아먹히는 대상이 “시인”으로 특정된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많은 인간 가운데 “시인”만을 골라 “하나쯤” 잡아먹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시’가 아닐까. 다시 말해, “장미”는 그 자체로서 ‘시’에 대한 비유일 수 있다. 시인이란 시에 매혹된 상태에서 시를 위해서라면 죽음이라도 불사(不辭)하는 존재가 아닌가. 마치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과도 같은 존재가 아니겠는가. 이처럼 “장미”를 시에 대한 ‘의인화’로 보는 경우, 「장미」는 시란 시인을 유혹하여 그의 현실 감각에 파탄을 일으킬 만큼 매혹적인 대상임을 암시하는 작품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사이렌의 이미지를 끌어들일 수도 있으리라. 정녕코, 시란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들을 홀려 죽음에 이르게 했던 바다의 요정 사이렌을 연상케 하는 마력적인 그 무엇일 수도 있으리라. 어찌 보면, 시에 매혹되어 시인의 길에 들어섰지만, 또한 시의 매혹에 정신이 혼미할 만큼 이끌렸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시를 항해 ‘헛되이’ 저항하는 시인의 자기 되돌아보기가 이 시의 궁극적인 주제는 아닐지? 바로 여기서 우리는 시인 특유의 상상력이 개입되어 있음을 일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이 시의 “장미”는 시인 특유의 상상력을 통해 형상화된 ‘시인만’의 고유한 장미라는 우리의 관점은 이 같은 시 읽기에 근거한 것이다.
이제 「복분자」에 눈길을 주자면, 이 시에 등장하는 “복분자(覆盆子)”는 딸기의 일종으로, 생긴 모양이 접시를 엎어놓은 것 같기에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음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또한 바로 그런 모양 때문에 앞서 이미 언급했듯 ‘복분자 열매를 먹고 오줌을 누면 요강이 뒤집어진다’와 같은 “구라”가 떠돌게 되었음도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아무튼, 비록 복분자 열매가 요강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도, 복분자 열매에 관한 이 같은 속설은 잘못된 유추(類推, analogy)에서 비롯된 것, 말 그대로 “구라”가 아닐 수 없는데, 따지고 보면 동물의 신체 기관 가운데 어떤 것은 이에 상응하는 인체 기관의 기능을 개선한다든가 인체의 특정 기관과 닮은 식물의 잎이 해당 기관의 병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투의 허황한 유추는 이 세상 어디서나 확인된다. 시인은 이처럼 잘못된 유추에서 비롯된 복분자 열매에 관한 “과장”에 비하면 “만리장성과 구만리장천은 / 과장이 아니”라고 선언하기도 하고, 이는 복분자를 팔려는 “장삿속”을 드러내는 것임을 지적하기도 한다. 문제는 복분자에 관한 “과장”에 비하면 “만리장성과 구만리장천은 / 과장이 아니”라는 시인의 시적 진술 자체가 “과장”이라는 점이다. 따지고 보면, “만리장성”이나 “구만리장천” 역시 과장된 표현이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면, 복분자에 대한 과장은 물론이고 시인의 과장된 표현조차 잘못된 것이기에 폐기해야 할 것인가. 과연 그럴까. 그처럼 단순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이 시일 수는 없다. 자신의 시적 진술까지 폐기하라니? 그런 뜻이 아니라면, 시인의 시적 진술이 의도하는 바는 무엇일까. 어찌 보면, 시인은 스스로 과장된 표현을 적극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이른바 과장된 “구라”를 폐기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을 폐기해야 한다고 ‘뒤집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이 같은 읽기를 뒷받침하는 것이 있다면, 이는 바로 이 시를 마감하는 “암만!”이라는 표현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자신의 말에 대한 강한 긍정을 담고 있는 “암만!”이라는 표현은 자신의 “과장”조차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원하는 시인의 마음을 숨길 듯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다.
정녕코 시―나아가 문학―에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이처럼 과장된 표현이 지배하고 있거니와, 시 또는 문학의 본질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구라”에 있는지도 모른다. “구라”임을 알면서도 “구라”라는 깨달음을 잠시 유보하는 것―즉, 앞서 언급한 코울리지가 말한 바 있는 “자발적인 불신감 유보”(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의 상태에 자신의 의식을 맡기는 것―이 바로 시 또는 문학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하는 동시에 갖지 않을 수 없는 자세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시인은 복분자 열매에 대한 “구라”를 비판하거나 거부하기 위해 이 작품을 창작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같은 “구라”가 우리네 각박한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지 않는가. “그 정도 구라는 / 되어야지 / 암만!”에서 익살뿐만 아니라, 거듭 말하지만 “구라”에 대한 강한 긍정까지도 감지된다. 이처럼 복분자 열매와 관련된 “구라”를 문제 삼는 가운데 시 또는 문학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이끈다는 점에서, 나아가 “구라”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해로 우리를 이끈다는 점에서, 우리는 사물을 향한 시인의 눈길이 결코 상투적이고 기계적인 것이 아님을 감지할 수 있다. 사물이 동인(動因)이 되어 일깨워진 마음의 움직임에서 시인 특유의 언어적 활달함과 살아 있는 시적 상상력이 읽히지 않는가.
3. 논의를 마무리하며
「장미」와 「복분자」에 관해 우리가 이제까지 이어 온 논의를 마무리하자면, 전자가 시의 매력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매혹되어 있으면서도 이를 경계하는 시인의 속내를 드러내는 작품이라면, 후자는 시의 시다움 또는 문학의 문학다움에 대해 깊은 생각을 경쾌한 어조로 드러내는 작품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사물이 감추고 있어 누구도 보지 못하는 그 무언가의 이미지나 의미를 보는 이가 시인이라면, 또는 사물이 잠재하고 있는 무언가의 이미지나 의미를 꿰뚫어 보는 이가 시인이라면, 또한 그런 능력을 상상력이라고 한다면, 「장미」와 「복분자」는 상상력이란 무엇인가를 가늠케 하는 수많은 예 가운데 몇몇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으리라.
말할 것도 없이,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물이 존재하고, 그 모든 사물은 시인이든 예술가든 그의 새로운 시선과 이해를 요구한다. 그리고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시선과 이해를 위해 투사하는 시인의 “능동적 사유”뿐만 아니라, “수동적 사물”과 “능동적 사유”가 변증법적인 합일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중개적 정신능력”이다. 문제는 상상력으로 일컬어지는 이 정신능력은 예술가나 시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는 예술 작품이나 시를 감상하고 이해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능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술 작품이나 시 역시 이와 마주한 이에게는 여전히 또 하나의 “수동적 사물”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감상하고 그 작품에서 의미를 찾는 능력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심미안(審美眼)이라고 하거니와, 이런 의미에서 심미안의 필요조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상상력일 수 있다.
하지만 어찌 상상력이 단순히 시나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데만 필요한 정신능력일 수 있겠는가. 이는 우리가 삶을 영위하면서 세계와 만나고 이를 이해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보편적인 정신능력이 아닐 수 없다. 바라건대, 모든 이가 바로 이 보편적인 정신능력―잠재적으로 모든 이의 내면에 존재하는 상상력이라는 이 정신능력―을 자신의 내면에서 일깨울 수 있기를! 그리하여, 얼핏 보기에 너무도 지루하고 상투적이며 피곤한 우리의 현실에서 무언가 새로운 의미를 찾고, 이로써 그들의 삶이 나름의 생명력으로 환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기를! □
<시와 표현> 2017년 5월호
'이달균의 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승봉 시조집 해설 - 이달균 (0) | 2019.05.14 |
---|---|
이정환 세상의 모든 시조- 이달균(다시 가을에, 근조화, 낙타) (0) | 2018.12.26 |
시와 표현(2017. 8) 이송희<경계와 소통하고 경계를 넘는 삶에 대한 통찰-이달균> (0) | 2017.09.05 |
문학사상 (2017. 6) 유성호 <시의 위엄과 아름다움에 대한 노래 -이달균> (0) | 2017.06.27 |
2017 열린시학회 장순하 시인론-치열한 실험과 휘몰이調로 풀어낸 가락의 시인 (0) | 2017.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