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실험과 휘몰이調로 풀어낸 가락의 시인
-제1시조집 『백색부白色賦』와 제2시조집 『묵계黙契』를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사봉 장순하 선생은 이미 한국문학사에 오롯한 한 자리를 차지한 역사 인물인 동시에 시조단의 사표이며 현역시인이다. 시조뿐 아니라 평론, 수필, 한문집(漢文集) 역주(譯註), 편저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는 방대하다.
백수 정완영 선생은 『장순하 문학전집』발간 축하의 글에서 “ 全生을 이 길에 기울여 온 道伴이었고, 어쩌면 문학 이전에 求道者的 몸가짐을 가진 시인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두수의 시조를 지어 시인을 정의하고 있다. 그 첫 수를 옮겨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법도 한 치 흔들림이 없고/시를 하는 법도 여물기가 그 鑛物性/史峯은 단단했었네, 늘 나의 본보기였네.”라고 노래하였고, 같은 책에서 윤금초 시인은 “우리 문학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선생님의 정형시나 시조 관련 논문은 누가 뭐라 해도 후학들의 ‘사표師表’처럼 돌올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몸과 마음의 오감으로 시를 받아낸 선생님의 독특한 필법은 하나의 전범으로 우리 곁에 ’옹근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라고 칭송하고 있다.
이 글들은 한 시인에 대한 의례적 상찬이 아니라 문학과 삶 본연에 대한 것임을 대부분 공감한다. 인용한 각각의 글 중 ‘광물성’과 ‘오감으로 받아낸’ ‘독특한 필법’은 장순하 문학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어로 삼을 만한 것이기에 특히 눈길을 끈다.
한 거장의 문학을 돌아본다는 것은 필연의 것인 삶까지도 되짚어본다는 뜻이기에 통시적 관점이 필요하다. 그러나 필자의 부족한 능력으로는 깊고 그윽한 심연은커녕 편편의 기와로 지은 고택의 거미줄 한 가닥에도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선생은 이미 산처럼 우뚝한 존재이기에 폭포와 여울의 계곡을 헤아리며 바위나 초목의 기괴하고 다양함을 제대로 그려낼 수는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졸고는 장님 코끼리 더듬는 시늉에 불과할 뿐임을 고백하면서 서두를 시작한다.
2. 『백색부白色賦』, 통시적 관점의 활달한 보법
정적이 아람처럼 또오똑 여무는 밤
결코 복수(複數)일수 없는 나의 눈발 한 가닥이
지그시 과녁 안으로 죄어드는 저 초점.
강이며 산맥이며 짚어가던 그 손가락
이건 무어냐고 재쳐 묻다 잠이 들고
호젓이 벽을 바라고 몰아쉬는 숨결이여.
화랑 젊은 손은 세 나라도 모았거니
만(萬)이 3천이면 하늘인들 못 돌리냐
두둥둥 북을 울려라 메아리도 울어라!
이제 벽은 무너지고 하늘 다시 열리는 날
열 두 줄 가야금의 청아한 목청이랑
닐리리 새옷 바람에 덩실덩실 춤추리.
-「관도(觀圖)」전문
이 작품은 1957년 개천절 경축 제1회 전국백일장 장원작으로 원제는 ‘대한 통일’이었는데 나중 시집 백색부에서는「관도(觀圖)」란 제목으로 고쳐 수록한다. 시인이 데뷔작으로 꼽았으니 살펴볼 의미가 있다. 지도를 펴놓고 묻고 또 물으며 강도 짚어보고 산맥도 짚어보던 어린 손가락은 오므린 채 깊은 잠에 든다. 젊은 화랑들의 호연지기는 3국을 통일한 밑거름이 되었으니 3천만이 간절히 바란다면 어찌 하늘인들 감복치 않을 것인가. 벽 무너지고 통일된 그날, 열 두 줄 가야금이여 덩실덩실 춤을 추자.
이렇게 노래한 4수의 연시조는 눈여겨 봐야할 이유가 있다. 50년대 한국문학은 전후의 필연적 산물인 퇴폐와 허무주의를 노래하던 한 부류가 있었고, 다른 한 편에선 모더니즘 운동에 힘입어 보헤미안적인 자유분방함을 노래하는 일군의 시인들이 있었다. 그런 시인들은 대부분 서구적 정서에 의존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는데 반해 이 작품은 철저히 한국적 정서와 건강한 남성성을 드러낸다. 흔히 한국적이라면 애잔함과 여성적 한의 정서를 떠올리기 쉬운데 이 작품은 산맥을 달려온 천년의 역사와 웅혼한 기상을 드러내는데 주목해야 한다. 이런 경향은 장순하 문학의 시발점이면서 지향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영산강 강바닥에
빈 껍질 벗어 놓고
어디로 내달았기에
날은 이리 말짱하냐.
우리야 언제라도
의지 없는 외톨배기
구간(九干)들 구지봉에
무릎 꿇어 감축(感祝)하던
소리여
“게 뉘 있느뇨.”
그 소리여 없는가!
“거북아 거북아 구워서 먹으리라”
“머리를 안 내놓으면 구워서 먹으리라”
무등산(無等山) 지리산(智異山) 마루
무제가 탄다
가슴이 탄다.
-「구지신가龜旨新歌」 전문
1968년에 발행한 첫 시집 『백색부白色賦』의 특징은 제재 면에서는 작가가 직면한 ‘지금 여기’에서 한반도와 누천년 민족의 역사를 노래한 작품이 주를 이루고, 형식면에서는「유방(乳房)의 장」, 「행주치마의 장」, 「비말(飛沫)의 장」「소복(素服)의 장」「사념(思念)의 장」「벼꽃의 장」「첫눈의 장」「자작나무(白樺)의 장」「백송(白松)의 장」「모시의 장」「백설의 장」등 특정 제목을 차용하였지만 소재에 국한되지 않으려는 창작의도의 확장을 꾀하고 있다.
위에 인용한 시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가야설화의 구지가를 빌려와 민족(정신의 자긍심)의 무궁과 번영을 염원하고 있다. 수로왕과 6가야국 탄생 설화를 제재화 했지만 수로왕과 대가야에 국한되는 시조가 아니라 우리 국토 전체를 통괄하는 것으로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영산강, 무등산, 지리산 등을 포함시켰지만 드러내지 않은 행간엔 금강산, 북한산, 백두산 등등도 포함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구지가는 가야에 국한된 지역, 가야탄생의 노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탄생과 무관치 않다는 시원의 확장을 의도하고 있다.
이런 노력은 여러 시편들에서 드러난다. 이를테면 「비말(飛沫)의 장」에선 ‘백두 금강이야/새나 나는 먼 구름 밖//얼음 같은 가야(伽倻) 홍도(紅濤)/수정 같은 북한산수//바다와 겨룬 정방(正房)을/휩싸 흐른 설악 산골.’로 첫 수를 마무리 짓고 있다. 백두금강은 아름다운 ‘북한산수’ 한 폭이 아니라 ‘바다와 겨룬 정방(正房)’, 즉 설악과 태백산맥을 흘러 제주 정방폭포의 물줄기가 되어 한반도를 감싼 바다 3면에 닿아 있다고 말한다. 또한「백송(白松)의 장」에선 ‘서울 통의동 백송’을 말하면서 ‘히말라야 정수리거나 백두산 천지 둘레’로, 상상력의 무한 확장을 꾀한다.
첫 시집인 『백색부白色賦』를 통해 보면 장순하 시인은 하나의 주제어를 통해 미시적 관점으로 천착해 나가는 시법보다는 통시적 관점에서 활달한 보법을 펼치는 시인으로 인식된다.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면 전체 41수 중 단수는「백설의 장」과 ‘시각서정’이라 붙인 「고무신」을 포함하면 2수밖에 없다. 물론「조한釣閑」이 ‘아침’, ‘낮’, ‘저녁’ 소제목 아래 한 수씩, 「동물지動物誌」가 ‘달팽이’, ‘염소’, ‘코끼리’, ‘황새’, ‘소’ 등 각각 한 수씩이니 이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 단수라고 보긴 어렵다. 거의가 3수 이상 4~5수 정도의 연시조들인데 이는 그만큼 할 말이 많았다는 증거이기도 하겠다.
장택고씨부인, 이는 이름 한 자 없는 우리 할머니의 장황한 호칭
호적을 들추면 고씨 가문에가 아니라 흥성장씨의 호구에 자리하여 90춘추. 진 실로 한 생의 수운(數運)이란 것이 제 뜻 아닌 고작 몇 글자의 붓끝으로 까불림을 뼈로 보노니, 개국(開國)에 나서 서력(西曆)으로 가시는 동안 숱하게 굽이친 물결, 도도히 흘러간 핏빛 물결은 흰옷 자락을 점점이 물들이고 덩시렇던 노적 터에 길 길이 억새만 가꾸었다.
목소리 담 넘을세라, 조신한 이 땅의 아낙으로 시원히 한가락 뽑안들 보았으 랴만, 어버이와 지아비와 그 아들의 잎그늘 사이로만 날아 온 잿빛 산비둘기, 이 제 마지막 한 줄 사유를 보태고 더 큰 가가지에 날개를 접도록 한마디 구구 소리 도 없었건만, 탯줄에 주저리 열린 일곱 남매, 그 중 앞서 비인 한 칸에
홍건히 고여 있고녀! 단 하나 당신의 뜻.
-「장택고씨부인전」전문
5부는 사설시조로 구성했는데 이 부분에서 시인의 열정과 탐구심으로 엿볼 수 있다. 이 시집 추천사 격으로 쓴 글에서 노산 이은상은 “현역 시조작가들은 거의 다 이 사설시조나 엇시조에 대해서 등한히 하고 있는 것에 반해서, 사봉은 굳이 이 산문시조(散文時調)라 할 수 있는 긴 형식의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만큼 눈에 띄는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밝히고 있다. 노산의 글이 아니더라도 이즈음의 시조에선 사설시조나 엇시조 창작은 흔한 것이 아니었다.
이 글에서는 작품 내용에 관한 분석은 뒤로 미루고 그 의미를 짚어보기로 한다. 사설시조는 문자로만 이뤄진 시조 이전의 노래시(歌曲)이지만, 시인은 타령조와 빠른 보법을 들고 와 사라져버릴 우려가 있던 사설시조를 훌륭히 복원해 내었다.
시인이 굳이 엇시조와 사설시조를 들고 나온 것은 평시조에선 다 담기 어려운 사연들을 시조 속에서 용해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장택고씨부인전」의 주인공인 장택고씨부인은 시인의 조모님으로 긴 이름을 가졌으나 정작 본 이름은 불리지 않은 채 한 생을 마감했다. 결국 장택고씨부인은 우리들 모두의 할머니들 모두가 그러했듯이 ‘한 마디 구구소리도 없’이 ‘탯줄에 주저리 열린’ 자식들 건사하며 인고의 시대를 감내한 옛 여인네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특히 주목한 부분은 시편들 곳곳에 내재한 우리 가락에 대한 애정과 넌출거리며 이어지는 타령조의 구성진 입말이다. 이 작품은 물론「뇌병원 분원」에선 ‘구성머리 없는 꺾다리로 우주라도 산책하듯 우쭐거리는 꼴이라니, 도깨비춤이라는 게 저런 걸거라 아마.’, 「나비의 장」에선 ‘눈 뜨면 장다리밭에서 너울너울 춤추고, 그리고 무배추의 아들들과 또 그 손주들과 춤추고..../나비야 하얀 나비야, 나도 한잠 잘꺼나.’, 「기원起源의 장」에선 ‘남실대는 혓바닥, 정에 주린 손톱들이 활활 모닥불로 타오르는 둘레를/비잉빙 너울거리는 선무당의 쾌자 자락.’으로 노래된다.
이렇듯 다양한 관심과 가열한 창작욕구, 치열한 실험의지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후배 시인들의 모범이 된 경우라고 생각된다. 대부분 첫시집은 습작기의 작품들, 무르익지 않은 풋것 그대로의 모양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시집은 시인이 집중적으로 천착해 온 경향은 물론, 새롭게 정립해야 할 방향성까지를 제시한 드물게 보는 시집이라 생각된다.
3. 『묵계黙契』, 천부적 시재의 자유자재함.
1974년에 제2시집『묵계(黙契)』를 출간한다. 첫시집과는 6년 터울이 있으므로 다소 긴 시간이 요소 된 듯 보인다. 그러나 1969년부터 시전문지 『한국시단』월평을 비롯, 『현대문학』, 『월간문학』, 『한국문학』,『시문학』,『현대시학』등 잡지에 시조이론과 월평, 연평 등을 발표하면서 시조문학의 격을 높였고, 중흥에 힘쓴 시기이므로 그 터울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직장과 가정적으로도 변화를 겪던 시기였다. 기존의 직장을 그만두고 출판사를 차려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으나 도산의 아픔을 겪었고, ‘10월 유신’이란 시대적 고통과도 직면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그런 위기는 오히려 왕성한 집필의욕을 회복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암중모색의 시기에 또 하나의 결실을 거뒀는데 1969년 시인을 중심으로 ‘탁족회’ 모임을 시작했는데, 현재의 ‘오늘의 시조시인회의’의 모태가 되었다.
부시시 자리를 털고
동사(動詞)들이 일어난다
굼벵이는 땅 속에서
경칩알을 물고에서
처마다 기지개를 켜고
활용(活用)들을 시작한다.
형용사(形容詞)도 일제히
활용을 시작한다
민들레는 길섶에서
산수유는 가지에서
비단필 마름질하여
끝동 대고 고름도 달고,
철 아닌 강추위에
강물은 되얼어도
매운 바람 사이
모닥불 나는 불티
보아라 변칙(變則) 속에도
어김 없는 저 이법(理法).
-「문법文法하는 계절」전문
이 작품은 2000년대에 발표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 감각이 돋보인다. 계절의 이법을 문법의 맥락으로 이해하는 시인의 혜안을 본다. 매미로의 용천을 못한 굼벵이의 기지개를 활용이라 보고, 경칩에 깨어나는 만물들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보는 시각은 매우 신선하다.
또한 만물의 형상이 자연 속에서 변하는 모양을 형용사의 쓰임처럼 그려낸다. ‘민들레는 길섶에서/산수유는 가지에서//비단필 마름질하여/끝동 대고 고름도 달고’ 같은 표현은 형용사와 유사함을 나타낸다. 길가 민들레는 비단필 마름질로 형용하고, 가지에 노랗게 피어나는 산수유는 가지의 끝동이며 고름을 형용한다. 거기에다 예기치 못한 꽃샘추위는 변칙이지만 그 변칙마저도 ‘어김 없는’ 세상의 ‘이법(理法)’으로 이해한다. 즉 예외 없는 법칙이 없음이 바로 예정된 이법이란 것이다.
두 번째 시집에 이르면 어떤 소재도 시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위시를 포함하여「묵계(黙契)」,「무(無)」,「혹(惑)」,「유예(猶豫)」, 「구심(求心)」, 「허(虛)」 등은 철학적 명제를 던지는 작품들이다. 「구심(求心)」은 “나의 하루는/구심하는 팽이 꼭지//반지름 안에서는/태풍이 휘몰아치고//준절한 채찍으로만/겨우 몸을 가눈다”로 되어 있다. 팽이는 언제나 바깥을 지향한다. 그러나 구심으로 향하지 않으면 금세 쓰러지고 만다. 돌아갈수록 단순한 그림을 그려내는 팽이의 반지름 속엔 우리가 가늠치 못할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그런 상태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준절한 채찍뿐이다. 결코 시대를 말하지 않았으나 시대의 광풍이 내재되어 있고, 굳건한 중심을 말하지 않았지만 견제와 일탈의 균형을 웅변한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미소와 여유를 얻게 되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다소 무겁고 철학적인 내용을 띠고 있다면 9개의 소제목으로 이뤄진 「부산 희신戱信」은 매우 일상적이고 유쾌한 일면을 지닌다. 첫 번째 시조인 ‘사투리’는 “동래(東萊)예?/여기가 바로 동래 아입니꺼?/부산 어린이는 사투리에 천잽니다/자라면 경상도말을 썩 잘 하겠습니다.”라며 천진한 부산 어린이의 사투리를 앞세우고 시작한다. 첫 마디를 ‘동래예? 여기가 바로’로 표기하지 않고 첫 음수를 한 행으로 처리하는 파격은 당시로선 흔치 않은 파형이다.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자갈치 시장’은 더욱 재미있다. “전어, 갈치, 소라, 굴이 늘어앉았습니다/고구마, 옥수수도 간간이 끼였습니다/이 근처 바다에는 이런 것도 잡나봐요.”이 시조를 읽고 미소를 짓지 않을 이는 없으리라. 자갈치 시장이라고 해도 고구마와 옥수수 등속이 없을 수 없다. 이걸 보고 부산 바다에는 고구마도 옥수수도 잡나보다 하고 노래한다. 아홉 번째 작품인 ‘태종대’ 역시 동시조의 전범을 그려낸다. 새 배의 진수식을 보면서 중장과 종장에서 ‘오색 깃발, 징 꽹과리, 떡 과일도 있습니다/용왕은 애들인가봐 저런 거나 좋아하게.’하며 어린이의 시각과 음성을 차용해와 마무리 짓는 이 동심의 상상력은 동시조의 멋진 본보기가 된다.
그러나 이 정도로 장순하의 실험은 그치지 않는다. 그 실험의 정점에 이 작품이 있다.
한 뼘 햇살마저
인색하는 세모한천(歲暮寒天)
밤나무, 나도 밤나무
가름 없는 고개에서
삭풍 표표히 울고
치를 떠는 산초 나무.
그 가지 가시 끝에
매달린 하늘타리
나는 보았네
아, 그 쭈그러진 몰골 속에
한두 알 숨죽인 씨앗
네게 있음을.
-「삭풍朔風속에」전문
이 작품을 논하기 전에 이 시집 해설인 윤금초의 ‘진지한 실험보고서’를 인용한다. “대담하게도 첫째 수 첫구에 2자를 쓰고 있다. 필자가 알기로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쓴 예는 시조사상 처음일 것이다. 그는 자수(字數)를 거부하고 음수(音數)를 주장한다. (「종장 첫구 3자는 과연 성역인가」 ‘삼장시(三章詩) 주최 시조문학 세미나, ’풀과 별‘ 통권 22호). 그는 비록 2자로도 장음이 끼여 들면 3음보 구실을 하는 것이라 하고, 그 실증으로 이것을 제시했다. 즉 ‘삭풍’의 ‘풍’이 지니는 여운으로 해서 2자지만 3음보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 그는 사설시조의 종장 첫 구에 4자를 쓰고 고시조의 예로써 자신을 변호한다.”
이 글은 첫수 종장 ‘삭풍 표표히 울고/치를 떠는 산초 나무.’에 대한 것이다. 종장 첫 3음음보를 ‘삭풍’ 2자로 적고 ‘풍’이 2음의 여운을 지녔기에 3음보로 치고 썼다는 것이다. 또한 사설시조와 평시조를 혼작한 「뇌병원 분원」에는 첫 사설 종장 첫 구 - 하릴없는 건어물전 머리 가오리 새끼거든 -을 과감히 4자로 쓰고 있다. 이는 무모한 시도가 아니라 시조가 노래에서 비롯된 것이고, 시조인이라면 시조가 노래에서 발원한 것임을 알고 써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주지시키는 예가 아닌가 한다.
비록 한 수의 작품을 예로 들었지만 종장 3자를 2자로 표기하고, 이것을 자신의 주장 속에 담은 것은 파격 중의 파격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대시조에서 종장의 3자와 다음 음보인 5자 이상은 움직일 수 없이 정해진 법칙이 되어 있지만 ‘해동가요’나 ‘청구영언’ 등의 옛 서적에는 이를 완전히 지키지 않은 작품들이 더러 있다. 이들 책들은 노랫말들을 엮은 것이기에 음의 늘임과 줄임으로 인해 자수에 얽매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현대시조의 경우에는 언어만의 시조이기에 반드시 자수를 지켜야 한다는 보편성이 굳어진 탓이기도 하고 자유시와의 변별성을 갖는 최고의 이유로 의무규약이 되어 있다. 그러나 장순하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음의 여운이 길면 2자로 줄일 수도 있고, 짧은 음운으로 이뤄지면 4자로 늘여 쓰되 3자처럼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비록 이런 파격 실험이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고 하더라도 창작과 제언이란 측면에서 보면 상당한 무게를 가진다고 생각된다.
사람이 얼마든지 미천할 수 있다는 걸 알려거든
각설하고 통금 위반쯤으로 즉결 심판소에 가서,
소매치기 들치기 날치기 좀도둑 그들의 왕초인 깡패들과 매춘부와 그들의 끄나 풀과 포주와 그밖에 온갖 잡것들이 우글거리는
철창 안 짐승 우리에서 하루쯤 지내 보라.
영하 십몇도에 저녁 아침 점심 굶으면
한약국 파리똥 앉은 천정의 대못 끝에 매달려 한들거리는 하눌타리
빛바랜 종이 쪽지엔
“국수 40원, 계란 20원....”
-「배리(背理)」 전문
이 작품은 첫 시집에 본 사설시조의 일면을 다시 읽을 수 있다. 정격에서 보인 품격을 사설에선 단숨에 허물어 버린다. 시법에서뿐만 아니라 소재도 저변을 훑는다. 이 시 역시 그러하다. 여러 인간 군상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 통금 위반 ‘즉결 심판소’였다. 고매한 존재들과는 거리가 먼 온갖 잡것들, 소매치기, 들치기, 날치기, 좀도둑, 깡패, 매춘부, 포주 등이 우글거리는 곳이 그곳이다. 시인은 이들을 열거하면서 쉼표를 찍지 않았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앞말이 뒷말을 잇고, 그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다음 말을 잇는 방법은 사설이 갖는 묘미를 제대로 살리기 위함이다. 그런 입말의 장점을 더욱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쉼표를 생략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듯 독자를 자신이 의도한 곳으로 이끌어 가는 자유자재함과 시를 밀고 가는 저력이 돋보인다. 화초처럼 가꿔진 재능이 아니라 야산에서 찬비와 휘몰아치는 바람에 단련된 시인임이 드러난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삼청로 소견」,「복권」 , 「실의 시대」, 「의식」 등 이 시집에 실린 엇시조와 사설시조들은 그런 필요충분조건을 다 갖춘 시인의 실험이다.
4. 끝맺는 말.
이 글에서 6권의 시집을 다 말하기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초기 2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장순하 시인의 시 세계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말년에 시조의 대중화를 위해 의욕적으로 천착한 ‘경시조’ 창작도 이 글에서 거론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부분은 전문적인 연구자에 의해 연구되기를 바란다.
사족처럼 한 마디 덧붙이자면 장순하 시인을 말하면서 「고무신」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실험인 「고무신」은 많은 평문에서 거론되었으므로 굳이 이 글에서 거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밥딜런이 결정되었을 때 찬성하는 일군과 부정하는 일군으로 극명히 갈리는 것을 보면서 장순하 시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정하는 이들의 견해는 “문학은 어디까지나 언어만의 것이지 음률에 얹힌 노랫말의 감동을 과연 시적 감동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시조가 바로 「고무신」이다. 네모난 칸 안에 단란히 앉은 ‘하나 둘 세 켤레’는 언어이면서 분명 그림의 요소로 등장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교과서에 실린 것을 보면 논란보다는 이 새로운 실험이 동시대인의 공감대를 형성한 예가 아닌가 싶다.
장순하 시조를 생각하면 휘모리장단이 떠오른다. 기본에 충실하다가도 문득 파격의 일탈을 즐기는 신명, 북장구를 울려 한곳으로 마구 휘몰아치는 열정이 특별하다. 고품격의 충실한 정격, 사설, 사설과 평시조의 혼작, 시각화 실험, 종장 파괴 등을 실험하는 한편, 내용으로는 역사, 철학, 소외된 이들에 대한 애정, 거친 군상들에 대한 눈길 등으로 끝없이 변주된다. 어쩌면 시조로 실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실험해 버린 시인이 아닌가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확연한 장점들은 시조에선 매우 중요한 요소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시조에서 늘 우려하는 것은 정형에 얽매이다 시 본연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시편들을 통해 정형은 그대로 지키면서 어떤 내용이든 3장6구로 녹여낼 수 있음을 훌륭히 보여준다. 이런 결과물이 바로 미래 시인들에게 끼친 공적임은 분명해 보이다. 그런 다양성과 치열한 실험정신이야 말로 시조의 미래를 융성케 하는 원동력이다.
이달균 약력
57년 경남 함안 출생
87년 시집『南海行』과 무크 『지평』으로 등단하였고,
1995년 『시조시학』에 「생명을 위한 연가」연작을 발표하면서 시조창작을 겸했다.
시집 『늙은 사자』『문자의 파편』,『말뚝이 가라사대』,
『장롱의 말』, 『북행열차를 타고』,『南海行』등이 있고
영화에세이집『영화, 포장마차에서의 즐거운 수다』가 있다.
중앙시조대상, 중앙시조대상신인상, 경남문학상, 경남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경상남도문화상(문학부문) 마산시문화상(문학부문) 등을 수상했다.
주소 : 53040 경남 통영시 통영해안로 통영시청 집필실
E-mail : moon1509@hanmail.net
010-2590-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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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효, 치열함 속에서 고독삼화음에 주파수를 맞추는 시인 (0) | 2017.03.28 |
구성진 창보唱譜처럼 읽히는 신웅순의 시조미학 (0) | 2017.03.28 |
2015 유심 시조 월평 12월호 (0) | 2015.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