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와 소통하고 경계를 넘는 삶에 대한 통찰
이송희(시조시인. 전남대 국문과 외래교수)
칠흑의 밤을 밝히는 이들에게 들려주리
촛불에게 약속에게, 부딪는 부싯돌에게
내 미처 이름 짓지 못한
한 순간의 섬광에게
눈물에 닿기 전에, 선잠이 깨기 전에
뿌리마저 태우고 쓰러지는 나목처럼
눈 감은 밀랍인형의
창백한 새벽처럼
내일은 저 홀로 달려오지 않는다
지친 이름이여, 짧은 몇 줄 시여
도저한 생을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이여
-이달균「요절夭折」《서정과현실》2017. 상반기호
“한 순간의 섬광”, 이것은 순간 빛을 밝히고 꺼져가는 가는 빛이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는 아들을 낳기 전 태몽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보름인데 칠흙 같이 어두워, 방문을 열어보니, 한밤중인데 한여름 붉은 해가 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붉은 해가 자신의 가슴에 부딪혀서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는데, 자신의 가슴에 부딪힌 태양이 산산조각이 났다는 것이다. 그 조각난 불꽃들이 마을을 밝힌 것이다. 전태일이 세상에 빛을 남기고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되어 우리나라에 노동운동이 시작된 것과 연관해 볼 수 있는 태몽이다.
세상의 불의, 불합리에 학대당하고 고통 받는 존재들에게 불의한 세상에 저항할 있는 힘과 깨달음을 주는 일들은 요절한 선각자를 통해 시작되는 것이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사고로 세상을 등진 이들의 이야기, 사회의 불의에 저항하며 죽은 이들을 떠올리게 하는 시다. “눈물에 닿기 전에, 선잠이 깨기 전에”그 “뿌리마저 태우고 쓰러지는 나목” 혹은 “눈감은 밀랍인형의/창백한 새싹”같은 존재들이 없었다면, 내일은 달려오지 않을 것이다. 자기희생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을 도약시키고 간, 이들, 세상에 깨달음을 준 이들의 도저한 생이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이 여기 있다.
월간 『시와 표현』20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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