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 시집

이달균 제3시집- 장롱의 말(고요아침, 2005)

이달균 2011. 7. 14. 13:56

 

      

 

 

 

 

 

근조화(謹弔花). 1

 

꽃들이 영안실에 부동자세로 서있다

 

목발에 의지한 덧없고 창백한 도열

 

언제나 벽을 등진 채 배경이 되고 만다

 

관계를 맺지 못한 사자(死者)와의 시든 동행

 

한 번도 저를 위해 피고지지 못했던

 

목 잘린 꽃들의 장례, 순장(殉葬)은 진행형이다

 

 

 

 

 

 

등(背)

 

오늘도 한 사람과 등지고 왔습니다

 

슬픔을 나눠지라던 소명을 거역하고

 

냉정히 등만 보인 채 돌아온 내가 미워집니다

 

 

 

 

 

 

여름 삽화

 

 

1.

가마솥 걸어놓고 육두문자 퍼부으며

 

눈 뒤집고 혀 빼문 놈 몽둥이 찜질하는

 

기갈 센 황해도 아낙, 개 잡는 날의 오후

 

 

2.

설워라 저승길도 맞으며 가는구나

 

상주도 백관도 없이 숯검댕이 매미들만

 

재우쳐 마른 곡하는 여름날의 긴 장례

 

 

 

 

 

 

질주

 

내 곁으로 사람들이 광속으로 달려가고

나는 비켜 서 있다 느린 내 장례행렬

 

나는 왜

불화(不和)하는가

부러워라 저 광란의 질주

 

 

 

 

 

 

뫼르소의 도시. 3

-독신자 오피스텔

 

전기가 나가자 빌딩이 깨어났다

우루루 비상구로 몰려나온 사람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비로소 이웃이 된다

 

누군 연속극에 한참 빠져 있었고

또 누군 컴퓨터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아무도 혼자가 아닌 홀로된 사람들

 

이윽고 전기가 오고 승강기가 움직이자

안도한 이웃들은 총총히 사라진다

적막의 커튼을 치고 우린 다시 타인이 된다.

 

 

 

 

 

 

중심의 시

 

태양이 걸어가 지는 곳이 중심인가

메고 온 생은 무거워 몸을 접어 누이면

저만치 세상의 기울기도 한 뼘씩 낮아진다

길 위에선 누구도 중심을 보지 못한다

갈 곳 잃은 사람들의 발자국 흩날리고

바람은 맨발로 불어와 지문을 남길 뿐

시간이 정지된 마을은 어디에도 없었다

잎새들 추락하는 세상의 벼랑 끝을

우리가 발끝으로 걸어와 아득히 지고 있나니

차라리 그대가 지상의 중심이다

일몰도 철새들도 휘파람으로 데려와

낮아진 강의 수평을 채우고 또 비우는

 

 

 

 

 

 

모래늪

 

몸은 자꾸 부스러져 아래로 흘러내린다

뿌리가 닿지 않는 아득한 모래의 늪

조금씩 가라앉으며 지평선에 키를 맞춘다

허위적 허공에 손을 저어 보지만

꼬리만 쥐어주고 달아나는 도마뱀

손에 쥔 허공의 무게, 중심이 무너진다

뱀꼬리만치 남아있는 햇살과 나머지의 시간

텅 빈 몸속으로 모래가 채워진다

누군가 수레를 끌고 내 몸 위로 지나간다

 

 

 

 

 

 

채송화

 

뙤약볕을 누워 걸었고, 젖은 채 밤을 새웠다

천천히 몸을 밟고 지네가 지나가고

거대한 쇠똥 굴리며 쇠똥구리가 다가왔다

 

대지는 불온한 소문들로 가득했다

여우비에 저만치 덩굴손이 달아나고

웃자란 고춧대에 키를 재던 까치발이 저려왔다

 

햇살의 포화 속에서 나는 꽃을 피웠고

봉숭아 꽃잎은 저들끼리 더욱 붉어져

마침내 잘 익은 태양을 서산으로 돌려보냈다

 

이제 두렵지 않다. 왕지네도 쇠똥구리도

개미들이 어떻게 개미집을 만드는지

지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엎드려 세상을 본다

 

나비가 잠시 앉았다 간 여름날의 울안이

내겐 대지였고 지난한 생애였다

짓무른 등창의 흔적마저 거두어야 할 시간이 왔다

 

 

 

 

 

 

평촌역에서

 

나는 여지껏 기다리며 살아왔다

오지 않는 기차를, 허기진 한 줄 시를

이렇듯 목만 길어진 짐승처럼 살아왔다

 

기실은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다

비련의 사랑도, 피묻은 혁명도

혼돈의 이천년대를 열망한 적도 없었다

 

 

 

 

 

 

청구서

 

 

느닷없이 세상 뜬

이층집 그녀 앞으로

자꾸만 청구서가 날아와 쌓인다

그들은 우편물들을 선뜻 버리지 못한다

 

누군가 맡겨놓고 간

주인 없는 세탁물처럼

겨우내 정리되지 않은 낯익은 이름 석자

세상은 아직도 그녀에게 받을게 남았나 보다

 

 

 

 

 

 

불혹 이후

 

비겁하다 나여 나는 은유였고 이미지였네

 

생의 가면을 벗고 정면으로 깨어지는

 

명쾌한

일도양단(一刀兩斷)이

 

두려웠기 때문이네

 

 

 

 

 

 

 

 

아버지의 청춘

 

아버지의 젊은 날을 들은 적이 별로 없다

 

살기 위해 무작정 북만주 가서 얻어온

 

모래만 하얗게 갈앉던 물종지와 해소병

 

 

 

 

 

 

겨울 운주사

 

1. 눈

 

실없이 웃음도 헤픈 오광대 춤사위처럼

 

애비 말도 안듣고 집나간 절봉이처럼

 

못나서 속정도 깊은 석불 위로 눈이 내린다

 

 

2. 와불(臥佛)

 

이마에 떨어지는 새똥도 거룩하고

 

뿌리에 닿지 못한 진눈깨비도 거룩하여

 

부처님 누워 계신다 님들보다 몸을 낮춰

 

 

 

 

 

 

장롱의 말

 

안방에 놓인 장롱은 고집으로 가득 차 있다

비녀를 빼지 않은 어머니의 팔십 평생

오늘도 오동나무는 안으로 결을 세운다

 

손이 귀한 집 손자는 언제 보냐고

벽오동 한 그루를 담장 아래 심었을

외갓댁 어른들 한숨이 손끝을 져며온다

 

대동아 전쟁이란 흉흉한 소문 속에

감춰둔 놋그릇마저 기차에 실려가고

처녀는 장롱 속에서 며칠을 보냈다

 

일곱의 탯줄을 끊은 가위며 실꾸리며

눈치보며 세 들어 산 좀들의 흠집들과

닦아도 추억이 되지 않는 삭아가는 소리들

 

딸들은 내다버리자고 무심코 말하지만

피란 간 식구들을, 아버지의 임종을

묵묵히 지키고 기다리며 예까지 왔노라고........

 

솜씨 있는 장인이 만든 오래된 악기의

만 가지 소리와 만 가지 사연들을

너희가 어찌 알겠냐고 안방에 앉아 일러준다

 

 

 

 

 

 

선인장

 

선인장은 안간힘으로 그림자를 가진다

잎새가 되지 못한 저 가시의 공격성

바람을 상처내면서 제 존재를 묻는다

 

아무도 모래 위에 집을 짓지 않지만

척추를 곧추세운 사나운 직립의 꿈

햇살을 등지고 서서 생명들을 키운다

 

그늘에선 전갈이 덧난 종기를 삭히고

사막을 건너와 온몸으로 수액을 빨던

개미의 휘어진 등뼈 새순 틔워 덮는다

 

 

 

 

 

 

다시 가을에

 

또 다시 늑대처럼 먼 길을 가야겠다

 

사람을 줄이고, 말수도 줄이고......

 

이 가을, 외로움이란 얼마나 큰 스승이냐

 

 

 

 

 

 

여름 상가(喪家)에서

  

초침의 톱니에 잘려죽은 시간들과

 

제상 위에 놓여진 먼저 죽은 과실들이

 

이제 막 이사를 가는 영혼을 지켜본다

 

 

 

 

 

 

발효

-고초산방에서

 

나이든 바람들은 옹기를 넘나든다

네모난 소금들이 절어 눈물이 되는

곰삭는 일의 참맛을 익히 알기 때문이지

 

체념에 길들기란 쉬운 일이 아냐

햇살에 씻겨져 빛나던 감들이

곰팡이 뒤집어쓰고 곶감되는 모양을 보아

 

장맛 된장맛이 뉘집 아낙 손맛이라지만

뒷각담을 들며나는 바람이며 세월이며

시름도 삭여야 하는 곡절맛이 아니더냐

 

때깔 고운 푸른 잎만이 다 제 맛은 아냐

어찌 젊은 놈이 묵은 장맛을 알까부냐고

껄껄걸 눙치고 웃는 여유가 바로 발효인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