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잎 흔드는 여섯 악장 칸타타
『갈잎 흔드는 여섯 악장 칸타타』는 창비시선 189번으로 윤금초 시인이 엮은 사화집이다. 고정국, 오종문, 이달균, 이재창, 전병희, 홍성란 등이 참여하였다.
김상옥(창비시선 21) 선생을 제외하고는 시조집으로는 두 번째로 창비에서 발간되어 의미가 있다.
시조단에는 나름의 계보가 있다. 문학과 지성 시인선 33번으로 나온 『네 사람의 얼굴』(윤금초, 박시교, 이우걸, 유재영)을 필두로, 동학사에서 다섯 명(박기섭, 김연동, 이정환, 이지엽, 박권숙)의 시인이 엮은 『다섯 빛깔의 언어풍경』이후 기획된 사화집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시집의 해설을 맡은 신경림 시인은 “시를 읽는 즐거움의 많은 부분을 시조에서 충당하고 있으며..... 문학의 세계화가 문학의 세계적 평준화 또는 세계적 평이화가 아니라면, 다른 나라에 없는 문학형식은 좋은 무기가 되지 않을까?”라고 적고 있다.
저무는 가내공업 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
그래도 나는 쓰네 손가락을 구부려
떠나는 노래들을 부르고 불러모아
저무는 가내공업 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
관계
혼자 이곳까지 걸어왔다고 말하지 말라
그대보다 먼저 걸어와 길이 된 사람들
그들의 이름을 밟고 이곳까지 왔느니
별이 저 홀로 빛나는 게 아니다
그 빛을 이토록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하늘이 스스로 저물어 어두워지는 것이다
낙타
등짐이 없어도 낙타는 걷는다
고색한 성채의 늙은 병사처럼
지워진 길 위의 생애 여정은 고단하다
생을 다 걸어가면 죽음이 시작될까
오래 걸은 사람들의 낯익은 몸내음
떠나온 것들은 모두 모래가 되어 스러진다
모래는 저 홀로 길을 내지 않는다
동방의 먼 별들이 서역에 와서 지면
바람의 여윈 입자들은 사막의 길을 만든다
낙타는 걸어서 죽음에 닿는다
삐걱이는 관절들 삭아서 모래가 되는
머나먼 지평의 나날 낙타는 걷는다
북어
못에 찔려 날들이 많아졌다
좌판 위 마른 북어의 정물처럼 차갑게 누워
가슴을 짓밟고 가는 구두소리를 듣는다
뚜벅뚜벅 그들처럼 바다에 닿고 싶다
아무렇게나 밀물에 언 살을 내맡겨 보면
맺혔던 실핏줄들이 하나 둘 깨어날까
내 꿈들은 북(北)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하얗게 녹슨 생각들이 부서져 쌓이는 밤
뜨거운 피를 흘리며 깊은 잠에 들고 싶다
불륜(不倫)
가을날 몰래 핀 두어 송이 장미
그래도 꽃들은 감옥에 가지 않는다
위험한
이데올로기
저 반역의
개화(開花)
북행열차를 타고
사리원 강계 지나며 빗금의 눈을 맞는다
북풍의 방풍림은 은빛 자작나무
퇴화된 야성을 찾아 내 오늘 북간도 간다
북풍에 뼈를 말리던 북해의 사람들
결빙의 청진 해안을 박제되어 서성이고
고래도 상처의 포경선도 전설이 되어 떠돌 뿐
다시 나는 가자 지친 북행열차
어딘가 멈춰설 내 여정의 종착지는
무용총 쌍영총 속의 그 초원과 준마들
갈기세워 달려가던 고구려여 발해여
수렵의 광기와 야성의 백호를 찾아
꽝꽝 언 두만강 너머 내 오늘 북간도 간다
나는 랩시(詩)를 쓰지 못한다
1.
거리엔 랩처럼 세월이 지나간다
어제같은오늘오늘같은내일은행나무잎새같은하루또하
루긿은리듬과빛깔들이바퀴들이구름들이언약들이……
조국은 랩송을 부르며 도시를 질주한다
2.
새로운 시인들은
오늘도 랩시(詩)를 쓴다
하지만 나는
랩시(詩)를 쓰지 못한다
우리들 때이른 퇴장, 쓸쓸한 세대교체?
먼훗날 그대들의 랩송도 흘러가면
두만강 푸른물처럼 눈물젖은 사랑이 될까
연인들 가슴 무너지는 고전이 되어 남을까
국화빵
국화빵을 사들고 귀가하던 날이 있었다
양철지붕 아래 촉낮은 꿈을 누이고
더러는 구멍난 날들을 기우는 손도 있었다
쓰러진 바람 위로 또다른 바람이 불어
약속없이 지치던 이웃과 어깨들
가난한 사람들에겐 사랑도 힘겹다
우리들 내일도 국화빵처럼 구워져
잘익은 단팥처럼 넉넉할 수 있을까
희망의 포자를 날려 일기를 쓰던 밤
불빛은 식은 열망을 다독이는 힘이 있었다
저만치 포장을 뚫고 비치던 카바이트 불빛
그 빛에 손을 녹이며 난 내게로 걸어 왔다
잠자리•1
아득하다 중생대의 폐허를 건너와서
지구의 어깻죽지를 평행으로 날으던
고단한 비행(飛行)의 행로(行路)여기서 마감하노니
체념처럼 네 죽음은 투명하고도 아름답다
창문 틈 그 여백의 중심을 받들고 누운
누구도 예기치 못한 잠자리의 평화
다 타고 껍질만 남은 남루한 날개마저
개미의 양식으로 주고 마는 저 가벼움
버리고 버린 자들이 열어둔 만조의 바다
잠자리•2
사람의 뒤꼭지에선 비애의 냄새가 난다
제국을 꿈꾸던 공룡들의 최후처럼
백악기 그 잿빛 소멸의 쓸쓸한 냄새가 난다
아이들은 공룡이 남긴 발자국을 헤며 놀지만
어른들은 선 채로 석유냄새를 맡곤 했다
한 차례 더운 바람이 전야처럼 몰려왔다
잠자리는 날개를 펴고 잠행을 시작한다
비릿한 폐허의 연기 자욱한 도심 하늘
공장의 불빛을 지나 화력발전소 굴뚝을 지나
늙은 플라타너스에 관한 기억
늙은 플라타너스에 기대어 귀를 대본다
그때 무슨 약속인 양 칼금으로 이름을 새기고
역무원 깃발을 따라 타관으로 떠나왔다
달디단 수액을 빨며 잎새들 피어오를 때
물관부로 차 오르던 눈물의 투명한 삼투
나무는 저 홀로 훌쩍 키가 자라 있었다
어느덧 긴 강물이 나무 속으로 흘러갔다
강물은 밑둥을 돌아 나이테를 그리고
팔벌려 햇살과 교감하는 전언이 되기도 했다
늙은 플라타너스엔 기적소리가 묻어 있다
너무 오래 가두어 둔 칼금의 기억들
나무는 새 떼를 부르듯 이름들을 불러낸다
'이달균 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달균 제4시집- 말뚝이 가라사대(동학시인선, 2009) (0) | 2011.07.14 |
---|---|
이달균 제3시집- 장롱의 말(고요아침, 2005) (0) | 2011.07.14 |
이달균 제2시집-북행열차를 타고(태학사, 2001) (0) | 2011.07.14 |
이달균 제1시집- 남해행(도서출판 불휘1987, 도서출판 다층2001) (0) | 2011.07.14 |
비 내리고 바람 불더니(1983. 도서출판 청운) (0) | 2011.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