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 시집

이달균 제1시집- 남해행(도서출판 불휘1987, 도서출판 다층2001)

이달균 2011. 7. 14. 13:39

 

         

 

 

 

시집 『남해행』에 대하여

 

이 시집은 1987년에 펴낸 처녀시집이다. 친구가 청타기 하나 놓고 시작하던 출판사에서 멋모르고 펴낸 시집이다. 70년대에서 80년 초반에 쓴 시들이다. 다소 치기어린 부분이 많이 드러나는 글들이지만 누구에게나 첫시집의 느낌은 남다르리라. 동인활동을 하면서 매월 회지에 실은 시들도 있고, 혼자 끄적거려놓았던 것들도 있다.

 

출판기념회를 마산동서화랑에서 했는데 별반 준비도 못하고 있었는데 강신형 시인이 도와 주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사진이 몇 장 있는데, 돌아가신 황선하 선생님, 신상철 교수님도 보인다. 발송한 권수가 100 권이 넘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시 경남문단식구는 그리 많지 않았다.   

 

2001년엔 다층에서 재판을 냈다. 편집장이었던 시인이며 소설가인 정찬일씨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다. 마춤법과 단 한 편의 시를 개작한 것 외엔 그때의 시들을 그대로 실었다. 당시 내겐 87년에 낸 단 한 권의 시집을 갖고 있었다. 그것도 성선경 시인이 갖고 있다 내게 준 것이었다.

 

 

 

 

시집  시인의 말

 

 

모아둔 작품들을 묶어 한권의 책을 내게 되었다.

야원 몸으로 그것도 알몸인 채 무대 위에 모습을 나타내는 단역의 배우처럼 왠지 부끄럽고 구차해 지는 느낌을 어쩌지 못하겠다. 하지만 맡은 역할만은 부끄럽지 않게 해내고 싶다.

내가 쓰는 서정시 몇 편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해도 우리 이웃의 고통과 아픔에 대한 따뜻한 애정만은 외면하지 말아야겠다. 그것만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며, 시를 지탱하는 지주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작품들을 정리하다가 근래 몇 해 동안 내가 너무 나태하고 무력했음을 절감한다. 너무 게으르고 치열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이 한권의 시집을 내면서 무력해진 나를 채찍질하고 보다 깊은 반성의 계기로 삼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1987년 2월)

 

 

 

 

 

남해행(南海行)

 

자, 아침이다. 단칼에 나를 버히고 허구헌 날의 맹세만 가방에 우겨넣고 10시 10분 발 남해행 직행버스 나는 떠나자.

 

임국희는 아침 싸롱을 열어 행복의 꽃잎들을 흩날리고 저 구름 흘러가는 곳에 내 마음도 흘러갈 즈음 운전수는 미아리 눈물고개에서 울고 넘는 박달재까지 허덕허덕 뽕짝으로 차의 시속을 따라 잡는다. 나는 재빨리 호흡을 바꾸며 젓가락 장단에 맞춰 기능적으로 젖기로 한다.

 

그는 말했다. 무엇인가를 팔기 전에 먼저 나를 파는 법을, 가장 기능적으로 팔아치우고 가정 기능적으로 살아남는 법을. 차장(次長)은 가볍게 말하고 익숙하게 웃었다. 오늘 차장(次長)은 위대하고 부장(部長)은 더 위대했다.

 

남해대교를 지나며 나는 자꾸만 헛구역질을 하며 약을 팔기 전에 먼저 나를 팔리라. 나를 팔리라. 나를 팔리라. 세 번 다짐하고, 눈물에 씻긴 차창을 내다보았다. 남해바다 결 고운 물살에 밀리는 초경처럼 빨간 사루비아 한 송이.

 

여성통경제를 팔러 나는 남해엘 왔다.

 

 

 

 

 

사육. 1

 

코린트풍의 온실엔 화초처럼 아이들이 자라나고

체온계를 문 칸나 같은 소녀들이

열대어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향료를 뿌릴 때마다

오렌지를 닮아가는 여인이 양변기에 앉아

가늘고 긴 손톱을 세공하는 모양을

나는 차츰 앙증스런 악세서리 마냥 바라보았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우리는 줄곧 붙어 있었지만

그녀가 스피츠를 데리고 외출하는 날엔

나의 휘파람 소리만 살아남아서

모자이크 된 의식들을 푸득푸득 일깨우곤 했다

 

 

 

 

 

사육. 2

 

새장 속에서 꽁지가 없는 새들은

내장을 커피와 바꿔먹습니다.

그녀는 한 조각의 알약으로 점심을 때우고, 집회(集會)를 열고, 주기도문을 외우고, 새의 깃털 속으로 예쁜 못 하나를 박아 넣습니다.

심장에 박혀 떠는 못은 그날 나의 잠속에도 꽂혀 밤새 꽃피를 흘리게 하고, 깊은 밤 평화스런 죽음의 잠에 들게 합니다.

 

 

 

 

 

어느 샐러리맨의 죽음

 

서른아홉에 죽은 녀석의 죽음은 신선하다.

유리창에 다 닳은 이빨을 갉아대거나

혈관의 핏방울을 튕기는 장난도 시들할 무렵

느닷없이 그가 내린 삶의 결론은 경이롭다.

등 푸른 생선처럼 퍼덕이는

미결의 서류뭉치를 바라보며, 우선

며칠 동안의 뉴스를 갖게 되어 기쁘다.

내정된 그와의 관계를 청산하는 눈물은

아름다운 허구, 차라리

품격 높은 한 편의 시구(詩句)처럼

우리는 검정색 리본을 흩날리는 것인데

아아, 기다리던 오늘밤의 짜릿한 외도

그대의 죽음은 한 동안 나에겐 신선한 충격.

 

 

 

 

 

“여보오, 노인장” 하고 불러보고 싶은 당신이여

 

“여보오, 노인장” 하고 시민들은 부를 수 없습니다.

당신은 너무 아득하여 부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술 취한 날엔 그대의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충치에 삭은 이빨로 부르는 두만강 푸른 물을 나는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 날은 키 작은 뱃고동들도 목울대를 세우고 노래를 부릅니다.

 

당신은 황혼에 취하여 오래인 입상(立像)의 기지개를 켜며 묵중한 붙박이의 철골구조물을 허물고 나와 매연에 갈앉은 도시의 지붕 위로 민망하고 시원한 오줌을 철철철 싸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면 나도 이상한 동류의식(同類意識) 속에서 찔끔찔끔 뇨의(尿意)를 느끼며 흔쾌히 오줌을 누곤 했던 것인데 꿈결엔 듯 오줌 줄기를 따라가 보면, 거기 미명(未明)은 오고 아침 세숫물이나 쌀 씻는 대야에 까지 명명히 말씀은 되살아나와, 아아 진정 “여보오, 노인장”하고 불러보고 싶은 당신이여.

 

 

 

 

 

지상(地上)의 마지막 마을에서

 

 

지상의 마지막 마을에 닿았다.

한가로이 풍차가 보이는 반쯤 열려진 채광창으로

포도주에 취한 노을이 거나히 찾아오는 저녁 무렵

우리는 신(神)을 찾아 떠돈 날을 헤아렸고

주막거리 예수를 닮은 주인은 야윈 웃음으로

조용히 동방의 별을 얘기했다.

지친 여행자를 위해 문간에 내건 등불은 졸고

우리들 기다림의 소등(消燈)을 지키던 한 떨기 별

새로이 불을 지핀다.

지상의 가장 마지막별이 되어

떠올 사람의 이름은 누구인가

못 박힌 채 불면의 옹두리 밝혀 줄

경건한 묵상의 별

아름다운 계시의 밤은 내게도 깊어올까.

모란의 씨방을 훑고 간 바람들이

은빛 바다를 열고

개펄 깊숙이 꽃씨를 뿌리고 맺게 하는 날

못자국처럼 또렷이

부싯돌을 켜고 간 사람들의 짚세기에도

홍해의 맵짠 소금 따뜻이 눈꽃으로 뿌려줄까.

우리도 끊임없이 용서와 구원에서 헤매이는데

이 밤 폐허의 바다에도

오랜 기다림으로 기다림의 빛으로 별은 빛나리니

지상의 마지막 마을에서 부르는 노래처럼

새들은 비장한 깃을 터는데

부름켜로 목울대로 차오르는 아득한 신열, 아아

보라, 친구여

명징한 눈물과 폐허로 유다의 세상이 열리고 있다.

바로 하늘이 용서한 모습인 채 그의 세상이.

 

 

 

 

 

너는 모르리

 

너는 모르리. 눈물 버리고 다투어 떠난 너는 모르리. 달디 단 눈물의 이중성. 눈물 속에 앉아 눈물 먹고 사는 자의 삶이 왜 눈물처럼 투명한지를. 눈물에 섞여 잡탕들의 눈물에 섞여 사노라면 눈물 아닌 것 한낱 없음을 너는 모르리. 눈물의 나라를 떠나는 배 눈물 마른 나라를 적시고 마침낸 눈물 너머의 눈물과 맞닿은 여기, 눈물의 고향은 하수구, 하수구에 잇닿은 바다, 차버린 여자의 순결, 구두 뒷굽, 잊혀 진 약속, 식지 않은 사생아의 탯줄, 논리학자의 잘린 혀, 회수된 원고 뭉치, 로마로 뚫린 길을 지나온 수레바퀴, 세상을 사고 판 자들의 눈물, 그들의 사소함 뒤엉킨 눈물바다, 눈물의 상처 위에 흘리는 눈물, 아아 모르리. 왜 눈물이 눈물을 낳고 뜨거운 눈물이 뜨거운 대양을 지배하는지. 새로이 눈물에 젖어 세상을 바라보면 눈물의 강을 건너는 사람 뒷모습의 그 오랜 아름다움 너는 모르리. 눈물 버리고 다투어 떠난 너는 모르리.

 

 

 

 

 

그해 가을 우리는

 

그해 가을, 우리는 서로 별로 존경하지도 않으면서

이형, 김형이라 불렀고

화장실이 먼 젊은 시인의 선술집에 모여

고등어 갈비 살점 같은 70년대를

오늘날의 데모들을 얘기하다가

열등의식과 함께 섞어 마셨던 깡소주를

담벼락에 오줌을 내갈기고는

제각기 골목으로 골목으로 흩어져 갔다.

 

가을이 가고 있던 어느 날

문득, 한 녀석은 데모죄로 유치장엘 갔고

누군 눈물겨웠던 머리털을 밀고는 군대엘 갔고

나는 다시 우리들 시대의 사랑 받는 재수생이 되었다.

 

세월은 그래도 우리들 모두를 용서하였고

우리는 서로서로 무엇이 되어서 떠나갔지만

아직 누구도 진짜 무엇이 되었다는 녀석은 없었다.

 

 

 

 

 

눈을 밟으며

 

한밤에 내리는 눈은 사랑이다.

기적은 지나버리고 그래도 눈 내리는 레일을 따라

지상(地上)의 못내 잠들지 못한 심장의 고동을 들으며

그중 낯익은 눈을 골라 밟으며

닻 내린 민물어구의 적막을 생각한다. 아아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눈발이여. 메마른 사람의

폐부를 움트게 하고 황량한 얼음 속에 정박한

새들의 비상을 예언하여라. 눈이여, 이 고장에 돌아와

묻히는 눈이여. 스스로 수억의 허무(虛無)를 떨쳐버리고

여기 아리따운 사랑하나를 마련하나니

나의 현실을 장식하였던 회한(悔恨)과 욕망을 순결히 태우고

태워서 얻은 애오라지 인종(忍從)의 재를 밟으며

밟히면서 사는 우리네 얼굴 같은 레일 위로

지금 누구의 입술이 내려와 입 맞추는지

그들의 영혼을 밟으며 내가 가고 또 오랜 기억 속에서

나의 등을 따사로이 밟아줄 눈을 밟으며

지금 내가 가는데.

 

 

 

 

 

오뉘들의 사글세방에 피는 꽃불

 

1. 산복도로 行

 

언덕 위로 성당이 보이는 집을 나왔다.

두어 평 남짓한 방과 부엌,

남기고 가는 것이라곤

허리를 조이던 나일론 끈과

지나온 길들의 돌부리에 닳은 신발 한 짝

우리가 밤이면 꿈속처럼 바라보던

먼 산 위의 불빛이 고운 마을로

나의 중량만큼 깨어서 흔들리는 봇짐을 지고

하염없이 신작로를 따라

산복도로행 버스를 기다렸다.

산 좋고 물 맑은 곳으로 가면서도

나는 약간씩 슬프고 미안해서

한 모금의 담배를 피우고는

제법 어른이 된 순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그렇게 사는 거라고.

철 따라 연탄이며 물 걱정도 해 가면서

양지 바른 언덕바지 공터 아래로

시꺼먼 하늘이 내다보며 사는 거라고

그렇게 웃으며 힘껏 어깨를 추스르고는

우린 휘파람 불며 버스에 올랐다.

 

 

2. 실업자(失業者)

 

비가 내린다. 바람이 분다.

낙방한 수험번호표를 찢어버리고

길을 걸어본다. 선 채로 담배를 피워본다.

우산을 접으며 누군가를 생각한다.

나의 누구인 누구보다 누구의 누구인 나를 생각한다.

구인광고 벽보판에서 비에 젖은 나를 바라본다.

공장에서 묻혀 온 순이의 피곤을 위해

항해를 결심하고, 중동행을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부질없는 시인을 결심한다.

오랜 마음의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몇 켤레의 헌 양말과 헤진 내복

희망과 절망들을 화물에 실어 보낸다.

편지를 읽는다. 텅 빈 대합실에서

아직 한 타래의 세월이 남았다는

친구의 노래와 기타 소리를 듣는다.

키 작은 풀들이 꺾인 쑥대며 질경이가 돋아난

신작로 위로 똥개 한 마리가 짖고 서 있다.

오늘보다 두려운 내일이 오고 있는 길을

내일보다 더 두려운 모레를 예비하기 위해

머리를 깎는다. 허리띠를 조인다.

 

 

3. 장마철

 

순이야, 오늘도 비가 내린다.

나지막이 하늘이 헐릴 때마다

빗물 듣는 소리 따라 잠을 깨는

사글세방 아랫목으로 비가 내린다.

해마다 이맘때면

번지 없는 산동네 집집마다에도

비는 내려서 해묵은 계절을 씻어내는데

뚫린 천정 아래 하염없이 젖은 채

비를 맞는 우리는

하늘의 어디를 동여매고 싶은 거다.

순이야, 이제 남은 그릇은

서러운 네 젖가슴의 쪽박 두 개 뿐

먼저 떠난 이웃의 봇짐을 따라

우리도 이름이 거룩한 이재민이 되지만

반드시 이 세상 어디쯤에는

오랜 목마름을 견뎌온 누군가의

꿈으로 촉촉이 내릴게다.

그들의 기다림으로 저 하늘을 메워야지.

순이야, 오늘은 고향집 뒷각담

돌우물에 스미는 달빛이 그립다.

 

 

4. 가을 日記

 

저녁 안개 속으로 보이는 공장은 아름다웠다.

황혼으로 길들여진 바다기슭

왼종일 꿈 조각을 맞추고 돌아가는 날은

잃어버린 가슴만큼이나 바람이 불고

먼저 잠이 든 순이의 연탄아궁이를 지키며

조심조심 하루의 일기를 썼다.

창밖엔 지친 어둠 위로 또 다른 어둠이 내리고

몇 년씩 잠들지 못했던 산바람

헐은 적막의 옷을 걸치고 누운

옹송그린 순이의 결 고운 빛깔의 꿈

행복, 희망, 이런 의미들을 태우고

마지막 카바이트의 불빛이 사라진 언덕 위엔

미루나무의 야윈 아랫도리가 떨리고 있었다.

 

 

 

 

 

개미사냥

 

1

걸음을 멈추고 후레쉬를 켰다

수척한 밤의 수족(手足)들이 하얗게 잘려나간 곳으로

돋보기를 들고

어제 보아둔 개미의 행진을 추적하였다

누군가의 잠을 몰래 빠져 나온

모발들이 모여 선 골목

까칠한 수염이 돋는 밤에

후레쉬는 콘크리트벽을 따라

조심조심 시간을 허물며 내려갔다

골목은 이미 끝나 있었고

정지된 시간의 한 가운데서

집에 두고 온 몇 마리 개미들을 생각했다

허리가 잘룩한 아이들의 잠

개미들의 입구에서 후레쉬가 멈췄다

 

2.

열쇠 구멍 속으로

썰렁한 개미의 방이 보였다

늙은 개미의 식탁 위로

빵부스러기 흩어져 있고

젊은 내외가 다투는 방을

부황 든 얼굴로

무릎이 다 닳은 어린 개미가 기어 나왔다

한 겹씩 내의를 껴입을 때마다

한 겹의 옷을 벗는 무허가 지붕 위로

바람은 쉴 새 없이 구둣발로 지나가고

완장 찬 개미가 다녀간 집엔

늙은 개미만 홀로 남아서

철걱철걱 엿장수 가위소리에

철거되는 겨울의 골조들을 얼핏 보았다

 

3.

사내는 손바닥에 침을 발랐다

신경이 돋은 머리칼을 뽑아

열쇠 구멍 속으로 내리는 순간

운명처럼 전율이 오고

구원의 힘으로 끌어 올렸다

왕개미였다 선잠 깬 밤마다

꿈을 허물고 달아난 얼굴

노예의 얼굴을 한 왕을 움켜쥐고

사내는 행상에서 돌아온 아내와

정강이를 맞대는 몇 평의 행복을 위하여

망나니처럼 웃었다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

포획물을 단단히 포박하고

시청직원이 꽂고 간 깃발들을 따라

눈 먼 자의

 

꿈처럼 은밀히 반응하는

판자촌에 이르면

도시계획 조감도 위로

때 이른 첫눈이 송이송이 내렸다

사내의 가슴에도 눈꽃이 활짝 피었다

 

 

 

 

 

소멸기(消滅記)

 

이 가을, 너는 쓰러지고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네 비석에 새긴 나이만큼 자란 나를

후회하면서 두 손 꽁꽁 묶인 바람처럼

깊은 적막이 잦아들기 전에 친구여,

이제 나는 돌아가 한번은

더욱 젊어지기 위하여

때로는 고단한 불빛으로 무모한 어둠을

지새우기 위하여 이 어둔 밤

뱁새 우는 숲길을 다시는

어둠 속에서 만나지 않기 위하여

낮은 누구네 집 녹슨 처마 끝

가랑비라도 되어서

허허로이 살아온 얘기나 듣고 있자면

추워서 추워서 흔들리는 것이

우리들 생활만은 아니더라만

친구여, 너는 쓰러져 뼈를 태웠고

나는 휘파람을 불면서

제각기의 중량만큼 갈앉는

소멸의 바다, 그 사라짐의 풍경을

아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K시의 바다

 

꽃구름이 떼로 몰려 왔다. 몇 방울의 붉은 빗줄기. 시시각각 하늘은 수상한 낯빛으로 변해가고, 침묵의 바다에 버려진 녹슨 배들의 늑골, 흐르다 다시 멎는 기름방울 위로 잠시 보였다 사라지는 문명의 포말.

한때 분주하던 공장의 사내들이 담배를 피우며 서성거렸다. 포기하자. 갯가에서 다량의 수면제에 취한 나무들. 점액질의 엉킨 바다풀 혹은 문 닫은 말미잘의 꿈. 몇 마리 털 뽑힌 새들이 날아갔다. 가을과 함께 낙엽을 떨어뜨리고 낙엽처럼 우리도 최후의 고개를 떨구고 돌아오는 길엔 바다로 향한 목책 팻말이 하나 서 있었다.

- 이곳에서 해수욕 및 어패류의 채취를 금함. -

 

 

 

 

 

나무들의 흔들림을 보며

 

요즘 나무들의 손이 흔들림을 보면서

한 떼의 바람이 흔들린다는 걸

또한 세상의 어디가 흔들린다는 걸 알겠네

하늘이 끝낸 푸른빛이면

오직 흔들이는 바다가 푸른빛이면

흔들리는 세상만큼이나

나도 함께 서서 흔들리다보면

가슴이 푸른빛으로 닮아오는 걸 알겠네.

모두가 쪽빛 바람이 되어 올 때

바람 깃 속으로 흔들리면서

잔잔한 찻잔이 고요와 같은 마음의 고요

그런 아름답고 조용한 이유를 알겠네.

더는 푸러지지 않는 가을 하늘

영원한 하늘빛을 이제야 알겠네

 

 

 

 

 

세모(歲暮)

 

남성동(南城洞) 지하도 건너 누가 가고 있데

한 입 낙엽이나 낙엽만한

슬픔이라도 되려고

외투 깃을 세운 채

눈 오는 길을 눈 보다 바쁜 걸음으로

그를 닮은 방울이 하나 가고 있데

딸랑딸랑 로터리를 돌아

미라보 다리 건너

옛날 베토벤이 살던 집으로

풍선껌을 씹으며 누가 뱉은 껌을 또 누가 밟으며

누구도 아닌 그대와 내가 가고 있데

어디선가 조금씩 조금씩

운명교향곡이 들려오는

남성동 지하도 입구

먹을수록 배고픈 우리들의 한 해가 가고 있데

언제나 그랬듯이 시린 악수나 나누면서

 

 

 

 

 

허수아비

 

올해도 기우제(祈雨祭) 신단(神壇)엔 오래 갈무리 해 둔

별똥별이나 삶아놓고 쭉정이 벼 두어 가마니 낸

천수답(天水沓) 한 마지기 꾸려 밤새 하늘로 가는 우마차(牛馬車) 탄

농촌지도소 허주사와 도열병 잎마름병을

안주 삼아 한 됫박 술을 나누면 한기(寒氣)를 지고 온

술잔에 어리는 잊었던 아내 얼굴과 별, 바람, 구름

 

 

 

 

 

종이배

 

어릴 적, 흐르는 물굽이 위에 놓인 다리에 앉아 흘러가는 물결 헤고 있노라면 어느덧 내가 구름처럼 물의 반대편으로 가고 있음을 보았다. 나는 종이배를 접어 띄우고는 언젠가 나의 배가 다시 내가 앉은 곳으로 오리라 믿으면서 집으로 갔다. 물은 내 믿음의 거리만큼 멀어져 갔고, 담배를 피울 무렵에야 그게 꿈이란 걸 알게 되었지만 언제나 꿈은 우리의 반대편으로 흘러가고, 나도 꿈의 반대편으로 흐르다보면 어쩌면 꿈이라던 종이배와도 만나리라는 정말 꿈같은 꿈이 꿈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켠에 새겨 보면서 이젠 차라리 꿈을 갖지 않으리란 꿈 하나를 오래 오래 갖고 되었다.

 

 

 

 

 

K화집(畵集)에서

 

1.원근법

 

산수국 꽃잎 하나만 젖어 울고 있다.

몇 마리 멧새가 날아가고

낮은 구름 낀 날에만 들리는 기적이

밀물에 젖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위엔

해거름의 몇 점 발자국이 남았고

영영 길이 끝난 곳에선

팔이 긴 아이 비석처럼 선 채 물에 잠긴다.

바다엔 돌팔매 하나 굴러가고

어느덧 어둠 속에서

팔이 긴 아이 인어가 된다.

 

2. 점묘법

 

누가 가울 속으로 가고 있는가

거리엔 오렌지빛 담배연기

화가는 쥐똥나무 숲으로 돌아가고

한 모금의 담배를 피우며

하나 둘 술병들이 쌓여가는 마을을 향해

내게는 다만 손을 흔들었을 뿐

지금 누구의 가을 속으로 내가 걸어가고 있는가

오래 오래 기다리던 것은

끝없는 기다림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가장 멀리서 이른 첫눈을 내리고

이 계절 밖으로 밤 기적은 흩어져 가는데

가을은 아직도 누구의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가

 

3.겨울비

 

그는 나를 포기 했다. 어느 날엔가

내가 그를 포기함을 예고하면서

바다에서 바다로

이랑에서 이랑으로

당겨진 평행선이 차츰 낮게 기울고

한 마리 절름발이의 새 기울며 나는

지붕 위, 눈 내리는 겨울이 오고 있다.

잊어야지 잊어야지

우리들 지친 유년도 뉘우침도

이제는 마지막 아궁이의 불을 당기면서

기다려야지. 어느 날엔가

수염이 돋은 얼굴로

나 또한 그의 기다림을 예고하면서

 

 

 

 

 

늪에 내린 환상

 

바람을 보는 눈 속엔

바람이 없다.

몇 번씩 속눈썹이 흔들리고

이윽고 투명한 늪이 쓸어져 왔다.

늪 속엔 갈앉은 별무리

하얗게 비늘이 돋고 있다.

누군가 스스로 잠을 깬다.

문득, 잠을 에워싼 바람이

안으로 날이 선 꿈의 키를 재고는

물뱀의 허물을 벗어놓고 달아났다.

풀밭을 헤쳐 온 어둠

다색(多色)의 수초(水草) 가슴 가슴마다에 새겨진 반점

쓰러지고 다시 쓰러뜨린 이야기

바람은 벼랑에서 강물에 투신하는

아름다운 죽음으로 작별하였다.

하류의 새들이 어둠을 털고 날았다.

한 잎씩 마침내 늪은 일서서서

흔들리던 섬섬옥수를 더욱 흔들고

늪을 바라보는 눈 속엔

바람꽃이 뽀얗게 일고 있었다.

 

 

 

 

 

하구(河口)

 

초저녁 별 하나 뜨고 있었다.

옷깃 여미고 누가

급히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조금의 바다 위로 어둠이 오고

해소기침 소리가 낮게 들렸다.

며칠 째 갯물에 버려둔 빈 배

닻줄에 옮아오는 낯선 고요

머리 푼 여인이 울고 있었다.

아이는 어구로 나와

방금 별똥별 떨어진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로 갈 수 없는 별을 위하여

이름 없는 별이 되어 돌아간 사람

영영 해소기침 소리 들리지 않았다.

 

 

 

 

 

시(詩)를 위한 동화(童話)

 

옛날, 어느 궁색한 집에 시주승 하나 찾아와

시주를 청하는데 하도 궁하여 물 한 그릇의 시주를 드렸다고 하길래

나도 찾아온 동냥아치더러 옛소!, 며칠을 공들인 피붙이라며

어줍잖은 시(詩) 한 닙을 동냥했것다

 

그러자 그 동냥꾼

퉤퉤, 두어 번 침을 뱉고는

시 적은 종이로 코를 풀더니

처억 하니 바지춤을 끌어내리고는

종이 위에 시원하게 쉬를 하고는

배고픈 시보다는

급한대로 쉬 한 번 자알 했다며

무논의 뭇개구리 재우쳐 울리더니

한 마장 빈들을 울음으로 채우고는

허위허위 숲정이 흔들며 사라져 갔다.

 

 

 

 

 

7월의 방

 

우체부가 다녀간 방은

더욱 넓어 보인다

7월의 달력과

나를 마주보는 거울이 하나

거꾸로 세워도

세상은 물구나무서지 않는다

냅킨을 한 소녀의 웃음이

부끄러운 겨드랑이를 간지럽히고

긴 장마에 수염이 길어난

흰 염소는

냅킨의 소녀와

달력에 흩어지는 파도 속에서

몽롱한 결혼식을 올렸다

줄을 잘 고른 기타가

빗물을 튕겨 올리고

램프엔 한 움큼의 구름이 솟아올랐다

마른 사내와 사내를 쫓아오던

비단 풀잎의 화음은

물빛 수틀에 앉아 부르던

여자의 낡은 노래와

돌아앉아 피우던 짙은 담배연기를 수줍어한다

연기가 자욱한 방을

유리 비늘을 단 물새가 날고

시방 거울 속으로

발신이 없는 먼지가 날아왔다

“길 잃은 물상들이 달아나기 전에

당신의 방에다 무중력의 한 척 목선을 띄우십시오.”

 

 

 

 

 

밀물

 

여인은 옷을 갈아입었다.

긴 머리채가 흔들릴 때마다

바다는 일정하게 일렁거렸다.

늘 목조계단에 젖어 있는 바람

여인은 그냥 빈 의자를 마주하고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에 떠가는 배를

한낮의 소금 먹은 갈매기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턴지 몸이 더운 꽃잎 하나

물살에 떠밀려 있고

젖은 방갈로 너머

정결한 물푸레나무 정강이 위로

바닷물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여인의 둥근 어깨가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렸다.

 

 

 

 

 

낯선 도시에서

 

오랜만에 혼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낯선 도시에 와 닿은 까닭이겠지요.

지금 나의 시계는 잠들고

외로운 채 하염없는 자유가 밀려왔습니다.

익어가는 고도(古都)의 황혼에 손을 내밀어

누구의 귓바퀴를 닮은 낙엽을 주워

그대의 책갈피에 끼워 둔 낙엽과

빈센트 반 고호의 캔버스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자주 만나던 헌 책방 주인의

너털웃음과 웃을 때마다 흔들리던

빛바랜 자화상을 생각하면서

마치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의

공원처럼 호젓한 찻집에 들러

한 잔의 커피와 일인분의 고독을 주문합니다.

창밖엔 우리의 이별과는 무관한 바람이

긴 머리칼을 흩날리게 하고

나와는 무관한 가로등이 켜지는 이런 저녁에

빈 찻잔에 남았던 그대는

슈베르트를 따라 목조계단을 내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