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 시집

이달균 제2시집-북행열차를 타고(태학사, 2001)

이달균 2011. 7. 14. 13:53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북행열차를 타고>에 대하여

 

이 시조집은 최남선의 <백판번뇌>를 1번으로 하여 현존하는 시인까지 100인을 선정하여 묶은 태학사의 기획시집이다. 

 

이 시리즈 시집을 묶으면서 간행위원회는

 "....이 혼돈과 좌절의 시기, 욕망과 죽음과 속도가 질주해간 척박한 한 세기의 끝에서 우리는 새로운 천년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면서 천년의 지나간 시대를 돌아 본다...."고 썼다.

 

문학평론가 오형엽교수는 이 시집 해설에서 "이달균의 소멸의 미학은 죽음의 운명을 죽음으로 맞서려는 대결의 미학이다. 따라서 시인이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은 소멸을 견디고 넘어서는 역설의 힘을 낳고 있다."고 했다.

 

 

 

 

저무는 가내공업 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

 

그래도 나는 쓰네 손가락을 구부려

떠나는 노래들을 부르고 불러모아

 

저무는 가내공업 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

 

 

 

 

 

 

관계

 

혼자 이곳까지 걸어왔다고 말하지 말라

 

그대보다 먼저 걸어와 길이 된 사람들

 

그들의 이름을 밟고 이곳까지 왔느니

 

별이 저 홀로 빛나는 게 아니다

 

그 빛을 이토록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하늘이 스스로 저물어 어두워지는 것이다

 

 

 

 

 

 

낙타

 

등짐이 없어도 낙타는 걷는다

고색한 성채의 늙은 병사처럼

지워진 길 위의 생애 여정은 고단하다

생을 다 걸어가면 죽음이 시작될까

오래 걸은 사람들의 낯익은 몸내음

떠나온 것들은 모두 모래가 되어 스러진다

모래는 저 홀로 길을 내지 않는다

동방의 먼 별들이 서역에 와서 지면

바람의 여윈 입자들은 사막의 길을 만든다

낙타는 걸어서 죽음에 닿는다

삐걱이는 관절들 삭아서 모래가 되는

머나먼 지평의 나날 낙타는 걷는다

 

 

 

 

 

 

북어

 

못에 찔려 날들이 많아졌다

좌판 위 마른 북어의 정물처럼 차갑게 누워

가슴을 짓밟고 가는 구두소리를 듣는다

뚜벅뚜벅 그들처럼 바다에 닿고 싶다

아무렇게나 밀물에 언 살을 내맡겨 보면

맺혔던 실핏줄들이 하나 둘 깨어날까

내 꿈들은 북(北)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하얗게 녹슨 생각들이 부서져 쌓이는 밤

뜨거운 피를 흘리며 깊은 잠에 들고 싶다

 

 

 

 

 

 

북행열차를 타고

 

사리원 강계 지나며 빗금의 눈을 맞는다

북풍의 방풍림은 은빛 자작나무

퇴화된 야성을 찾아 내 오늘 북간도 간다

북풍에 뼈를 말리던 북해의 사람들

결빙의 청진 해안을 박제되어 서성이고

고래도 상처의 포경선도 전설이 되어 떠돌 뿐

다시 나는 가자 지친 북행열차

어딘가 멈춰설 내 여정의 종착지는

무용총 쌍영총 속의 그 초원과 준마들

갈기세워 달려가던 고구려여 발해여

수렵의 광기와 야성의 백호를 찾아

꽝꽝 언 두만강 너머 내 오늘 북간도 간다

 

 

 

 

 

 

불륜(不倫)

 

 

가을날 몰래 핀 두어 송이 장미

그래도 꽃들은 감옥에 가지 않는다

위험한

이데올로기

저 반역의

개화(開花)

 

 

 

 

 

 

종소리

 

그 성당 종지기 영감이 죽었다

말없이 종만 울리며 살다간 사람은

가슴에 무슨 말들을 여미고 살았을까

 

종각 옆 광목빨래처럼 펄럭이던 한 생애

당신의 이빨빠진 웃음도 내 유년도

한 장의 낡은 사진처럼 붙박혀 남았을 뿐

 

 

 

 

 

 

겨울 화집(畵集)

 

 

박수근 화집 속의 마을을 지나간다

 

빛바랜 파스텔조의 머리깎은 나무들

 

하늘엔 겨울새 한 마리 다리를 절며 간다

 

불현듯 요절한 사내들이 그리워진다

 

모둠발로 벽 위의 생을 걸어서 떠나간

 

미완의 생애 속으로 저 새는 날고 있다

 

 

 

 

 

 

풍각쟁이

 

풍각쟁이가 죽으면 약장수도 되는가 보아

 

자고 새면 쌓이는 약 내다 팔다보면 맛좋고 빛도 좋은

고놈의 약, 헤픈 여자같에서 나는 얄밉더라 허어, 이

고약한 심보 다스릴 약 어디에도 없고, 풍각쟁이 역마살

다스릴 약 또한 없었으니 나는 떠돌이 풍각쟁이 혼. 요

입술 붉은 알약 팔다가 지치면 내 유년의 대산 장터 목

쉬어라 외치던 동동 구리무 동동 구리무 장수나 되어

떠돌고 싶어. 글매산에도 가고 배양산에도 가고 재너머

배나무실에도 닿으면 똘배 몇 알 얻어다 주린 배 맛나

게 불리고 싶어. 나는 누구 넋이냐, 나는 누구 넋이냐.

 

흥나면 소리도 곧잘 하는 영락없는 풍각쟁이 넋

 

 

 

 

 

 

순장(殉葬)

 

 

묻혀주마 충직한 개처럼 살았으니

죽음의 핏방울도 그렇게 뿌려주마

나란히 청동보검의 녹빛으로 썩어질 몸

나머지의 여생도 내 것이 아닐 바엔

차라리 빛나는 수의를 걸치고

장엄한 노래에 묻혀 뜬눈으로 죽어주마

동강난 헌 칼처럼 쓰러져 뒹굴어도

뼈마디 마디마디 꺾어 울진 않겠노라

한 마리 준마와 함께 서서 잠들 내 영혼

 

 

 

 

 

 

실상사

 

사람아 얽은 석장승 맘같이 고운 사람아

 

다래끼의 눈썹 하나 섬돌 밑에 묻어두고

 

실상사 어둔 석등같이 그리워서 운다

 

 

 

 

 

 

나는 랩시(詩)를 쓰지 못한다

 

1.

거리엔 랩처럼 세월이 지나간다

 

어제같은오늘오늘같은내일은행나무잎새같은하루또하

루긿은리듬과빛깔들이바퀴들이구름들이언약들이……

 

조국은 랩송을 부르며 도시를 질주한다

 

2.

새로운 시인들은

오늘도 랩시(詩)를 쓴다

하지만 나는

랩시(詩)를 쓰지 못한다

우리들 때이른 퇴장, 쓸쓸한 세대교체?

 

먼훗날 그대들의 랩송도 흘러가면

두만강 푸른물처럼 눈물젖은 사랑이 될까

연인들 가슴 무너지는 고전이 되어 남을까

 

 

 

 

 

 

잠자리•1

 

 

아득하다 중생대의 폐허를 건너와서

지구의 어깻죽지를 평행으로 날으던

고단한 비행(飛行)의 행로(行路)여기서 마감하노니

체념처럼 네 죽음은 투명하고도 아름답다

창문 틈 그 여백의 중심을 받들고 누운

누구도 예기치 못한 잠자리의 평화

다 타고 껍질만 남은 남루한 날개마저

개미의 양식으로 주고 마는 저 가벼움

버리고 버린 자들이 열어둔 만조의 바다

 

 

 

 

 

 

잠자리•2

 

사람의 뒤꼭지에선 비애의 냄새가 난다

제국을 꿈꾸던 공룡들의 최후처럼

백악기 그 잿빛 소멸의 쓸쓸한 냄새가 난다

아이들은 공룡이 남긴 발자국을 헤며 놀지만

어른들은 선 채로 석유냄새를 맡곤 했다

한 차례 더운 바람이 전야처럼 몰려왔다

 

잠자리는 날개를 펴고 잠행을 시작한다

비릿한 폐허의 연기 자욱한 도심 하늘

공장의 불빛을 지나 화력발전소 굴뚝을 지나

 

 

 

 

 

 

돌배의 노래

 

잘 있거라 나무야

함께 열린 돌배들아

 

네 잎새 그늘은 아름다웠지만 그대의 자양만이 나를

키운 게 아니라 지나치던 햇살과 바람들이 그리고 더 많

은 무엇들이 나를 만들었기에 나는 나무의 것도, 거두는

농부의 것도, 또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라네. 운명처럼

그저 머언 먼 하늘길을 가는 허기진 철새들의 것, 엷은

크레파스로 나를 그리는 서툰 화가의 것, 이슬 맞으며

새벽 밝히는 새벽별들의 것, 하늘의 소리와 지상의 소리

에 몸을 씻으며 진정 내 모습 내 빛깔로 지고 새고픈

 

떠도는

내 이름 하나

외로운 돌배

 

 

 

 

 

 

최북

 

그는 광물성이다 수직으로 걷는다

함부로 토양과 친화하지 않는다

손으로 제 눈을 찔러 실명의 길을 간다

 

 

 

 

 

 

늙은 플라타너스에 관한 기억

 

늙은 플라타너스에 기대어 귀를 대본다

그때 무슨 약속인 양 칼금으로 이름을 새기고

역무원 깃발을 따라 타관으로 떠나왔다

 

달디단 수액을 빨며 잎새들 피어오를 때

물관부로 차 오르던 눈물의 투명한 삼투

나무는 저 홀로 훌쩍 키가 자라 있었다

 

어느덧 긴 강물이 나무 속으로 흘러갔다

강물은 밑둥을 돌아 나이테를 그리고

팔벌려 햇살과 교감하는 전언이 되기도 했다

 

늙은 플라타너스엔 기적소리가 묻어 있다

너무 오래 가두어 둔 칼금의 기억들

나무는 새 떼를 부르듯 이름들을 불러낸다

 

 

 

 

 

 

일기(日記)

 

오늘은 하루끼✻의 소설집 한 권과

벗들이 보내주신 시집들을 읽었다

왼종일 나는 없었고 그대들만 있은 하루

 

 

 

 

 

 

남쪽물고기자리의 별들

 

남쪽엔 물고기를 닮은 별들이 있다네

신화집 속에서도 별들의 무덤 속에서도

예전에 본 적이 없는 눈이 붉은 작은 물고기

 

자꾸만 자꾸만 강물이 어두워지고

넋 나간 고기들 하얗게 떠올라 오면

개오동 잎사귀처럼 등뼈가 휘는 남쪽 물고기

 

가난한 사람들의 한 끼 저녁을 위해

따뜻이 몸을 데워 스스로를 바치는

남쪽엔 물고기자리의 별들이 있다네

 

 

 

 

 

 

내원동

 

 

내원동에 없는 것은

사람들의 자취 뿐

 

허물어진 연초 건조창을 헤집는 늙은 쥐들과 마른 잎

담배처럼 서걱이는 바람들. 지겨워서 뿌리치고 온 생이

이곳에도 있다니. 가보면 아니고 또 가봐도 아닌 것이

소리라고 되뇌던 안숙선을 생각했다. 그녀가 평생을 부

르다 갈 목쉰 곡절처럼 다 못 자람 것은 못 자란대로

덜 여문 것은 덜 여문대로 고분고분 지고 있는 내원동

의 가을

 

사람은

다 떠나가도

내원동은 늘 그대로다.

 

 

 

 

 

 

우울한 빗속의 드라이브

 

 

낯익다 가을날 어느집 처마 밑을

맨발로 서성이는 사십대의 빗줄기

불빛에 문득 비치는 누굴 닮은 빗줄기

 

우울한 날이면 FM도 우울하다

빗소리도 섞여서 잡음으로 떠도는

우울한 저녁을 향해 경적을 울린다

 

 

 

 

 

 

오래된 약국

 

그 오래된 약국엔

늙은 약사가 있다

먼지나는 헌책방과

풀빵집이 있던 때부터

조제실

의자도 함께

낡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다 떠나보내고

성자처럼 홀로 남아서

쿨럭이며 감기를

데불고 온 사람들에게

하루분

첩약을 지어

이마를 만져준다

 

그리고는 가만히

담배를 피워문다

 

창밖엔 빈 약통처럼

낙엽들이 굴러가고

잊혀진

국화빵 냄새가 나는

저문 거리의 초겨울

 

 

 

 

 

 

생명을 위한 연가•1

―낙태

 

 

오두마디 한 소절

표절의 시구처럼

 

가위질에 잘려서

점점 한 점 점이 되어

 

왔던 길

되짚어 가는

절름발이 별 하나

 

 

 

 

 

 

생명을 위한 연가•2

―지워지면서

 

 

어머니, 한 방울

눈물의 평토제

꽃답고 아름다웠으니

가시어요 훌훌총총

빛낡은

수사법 몇 잎

은장도로 잘라내듯

 

애장터 돌무덤길

혼점(魂占)의 사내따라

분바르고 연지찍어

봄꿈처럼 가옵니다

철자법

틀린 언문 한 줄

지워져 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