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화개장터 지나 쌍계사로 향한다. 언젠가 강기주 시인이 한 대야 가득 은어를 담아와 먹었던 생각이 난다. 연한 수박 향이 입에 고인다.
다리 건너 오르막길을 쭉 올라가면 쌍계사 도량 입구를 상징한 큰 바위 두 개가 석문처럼 우뚝 솟아 있다. 양쪽의 바위 위에는 각각 雙磎와 石門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고운 최치원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대웅전 뜰 한 가운데엔 진감선사탑비眞鑑禪師塔碑가 있다. 진성여왕 원년(887)에 건립 되었다는 이 비는 최치원이 짓고 쓴 유일한 비석으로 국보 제47호다. 탑비 전신에 금이 가 있어 보존이 중해 보인다. 자세히 보면 이수 맨 꼭대기엔 연꽃을 닮은 문양이 새겨져 있고, 자갈 속에 묻힌 듯한 부대석은 거북형상을 하고 있는데, 귀부머리는 용머리를 조각한 듯하다.
칠불암 아자방, 국사암, 진감 선사 묘탑, 육조 정상탑, 마에 조각 아미타불 좌상 등등 쌍계사는 이름난 사찰인 만큼 다 헤일 수 없을 정도로 유적이 많다. 사실 ‘천년 구들 동안거’ 아자방亞字房 하나만 해도 들어야 할 얘기가 얼마나 많은가. 구들도사 담공선사 애기며 문수보살의 화현이라는 ‘목마 탄 동승童僧’ 얘기 등등 이 방면의 전문가와 함께 온다면 그 설명만으로도 며칠은 묵어야 할 것 같으니 여기선 그만 하자.
팔상전 곁으로 나 있는 좁은 등산로를 따라가면 불일폭포다. 한 사십분쯤 산행하면 출가했다가 다시 속퇴 해 산다는 노인이 있는 봉명산장을 만난다. 산장을 지나 곧장 가면 청학, 백학 두암봉 사이의 절벽에서 거대하고 수려한 물줄기가 쏟아진다. 불일폭포다. 이쯤이면 쌍계사 구경은 다한 셈인가. 뭐 언강생심이지만 주마간산격으로 보고 올밖에.
불일폭포를 내려오면서 하동이 낳은 소설가 이병주를 생각했다. 사십대의 늦깎이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나 20여 년간 그가 쏟아낸 양과 질은 우리 문단의 한 획을 긋기에 충분하다. 불혹의 나이에 영어의 몸이 된 경험을 살려 쓴〈소설 알렉산드리아〉,〈관부 연락선〉,〈신하〉,〈지리산〉,〈그 해 5월〉등등. 유난히 역사의 기록으로서의 문학을 세워야겠다는 의지를 관철한 작가다. 문학은 역사의 그물이 놓친 인생의 실상, 민족의 애환 등을 구체적으로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의 소설 속에선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절망하는 패자들이 많다. 역사는 승리한 자와 패배한자가 함께 만들어 간다.
다시 읍내로 왔다. 적량 회성 진교로 가야겠다.
진주행 언덕 위엔 탑이 하나 있다. 1994년 5월 적량면 청년회가 세운 애농탑愛農塔이다. 가만히 보니 낯익은 이름이 있다. 적량면 출신 시인 김연동이 탑돌을 놓은 의미를 적어놓았다. 문득 바람에 섞여 몇 점 빗방울이 뿌렸다. 섬진강 하류로 모래를 싣고 가는 배가 보인다. 그의 시집『저문날의 구도(構圖)』한 페이지를 펼쳤다.
알몸의 언어들이 장마에 젖고 있다.
녹슨 가슴 위에는 말없음표만 찍히고
뭉개진 적막 하나로
노를 젓고 가는 길,
나직이 내려앉은 어둠의 끄나풀에
막장 정소리처럼 음각으로 떨고 있는
내 손금 한 잔의 바람
비어 있는 오선지
- 김연동「바람 일기日記」 전문
시인은 이곳에서 강물과 함께 저물지 못했다. 오선지는 비어서 노래를 잊었고, 언어들은 비 맞은 채 침묵하고 있다. 끝내 안으로 침잠하는 시인의 외로움. 이미 노젓는 사공은 없어진지 오래지만 그는 홀로 적막하여 마음의 노를 젓고 있나보다.
차츰 빗방울이 거세진다.
이 비를 뚫고 청학동을 올라가야 할 것인가. 쌍계사 뒷산에서 능선을 따라 동남쪽으로 가면 산중 마을인 청암면 묵계리 땅에 닿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이 앉은 두메가 청학동이다. 기실 고운 최치원이 사라졌다는 불일폭포 근처의 청학동은 어디에도 없다. 그곳은 상상 속의 이상향이기 때문이다. 무릉도원이나 아틀란티스, 샹글릴라는 존재하지 않아야 진정 신비롭지 않은가. 이인로도 청학동을 찾아 헤매었지만, 끝내는 찾지 못했다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해발 830m가 넘는 이 산 중턱에 마을이 이루어진 때는 한일합방이 있자〈정감록〉을 섬기는 사람들이 가솔들을 이끌고 와 살기 시작하면서였다고 한다. 남자들은 머리 땋고, 상투 틀고, 아낙들은 쪽을 지고 모두 한복을 입는다. 하지만 이제 묵계리 청학동은 예절교육이란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경쟁적으로 강학당을 연다. 청학동이란 신비주의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은 아닌지. 어쩔 수 없이 이곳에도 부익부 빈익빈의 자본주의에 물들고 말리라. 세찬 빗줄기 속에서 망설이다가 결국청학동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난세의 피난지로서 이름난 곳이라지만 슬레이트 지붕과 텔레비전이 들어와 있는 청학동 어느 기슭에 내 한 몸을 숨길 수 있으리. 지친 심신의 피난처로야 내 승용차만한 데가 없다.
하동 사람 정공채 시인의 시집〈아리랑〉을 펼쳐 숨결 고른 시 한 편을 읽었다.
밤은 깊었으나 그 공장의 불빛은 밝았다.
이 깊은 밤에
나는 그대의 작고 어린 손
흰 손등의 착실한 꿈을 보았다.
달달달달
밤 깊은 고요를 일깨우며
재봉틀은 노래하고
그대 작은 흰손이 일감을 누비고 있었다.
꿈을 밤새도록 누비고 있었다.
그 공장의 밤 늦은 불빛과
불빛 속의 작고 하얀 손
채곡채곡 쌓여가는 완성품
이 꿈 속의 아름다운 일들과
그 손등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어디선가
하얀 목련이 피고 있다.
- 정공채 「작고 어린 손」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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