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문학 여행

진해-군항에서 올리는 문학의 깃발 2.

이달균 2011. 9. 8. 14:47

진해시민회관은 군항에서 예항으로 향하는 상징적 건축물이다. 뒤쪽엔 장복산이 둘러쳐져 있고 앞으로는 진해양의 물빛을 굽어본다. 그리고 이 언덕엔 김달진 시비가 있다.


    가끔 바람이 오면

    뒤우란 열무우 꽃밭 위에는

    나비들이 꽃잎처럼 날리고 있었다.


    가난한 가족들은

    배적삼에 땀을 씻으며

    보리밥에 쑥갓쌈을 싸고 있었다.


    떨어지는 훼나무 꽃 향기에 취해

    늙은 암소는

    긴 날을 졸리고 있었다.


    매미 소리 드물어가고

    잠자리 등에 석양이 타면

    우리들은 종이등을 손질하고 있었다.


    어둔 지붕 위에

    하얀 박꽃이

    별빛 아래 떠오르면,


    모깃불 연기 이는 돌담을 돌아

    아낙네들은

    앞 개울로 앞 개울로 몰려가고 있었다.


    먼 고향 사람 얼굴들이여

    내 고향은 남방 천리,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생각이여.

                               - 김달진의 시「열무우꽃」전문


 월하月下 김달진金達鎭은 1907년 진해시 소시동에서 출생하였다. 1929년『문예공론』에 양주동의 추천으로 등단하여 1936년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등과『시인부락 詩人部落』에 참여하게 된다. 1946년 청년문학가협회 부회장을 거쳐 이듬해『죽순』동인으로 참여하였다. 시집『청매靑梅』(1940), 시전집『올빼미의 노래』(1983), 장편서사시『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1984)등을 펴내었다. 특히 불경 번역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이 방면에 많은 저서와 역서를 남기기도 했다.


 시비는 전면에 사향시「열무우꽃」전문을, 양쪽 측면엔 생애와 문학활동의 이력을, 뒷면엔 건립취지문을 새겨 놓았다. 시민회관과 이 시비의 건립은 진해가 예항으로 거듭나기 위한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장복공원 위 숲길을 따라 장복산을 오른다. 해발 582m의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다. 화산은 불모산에서 동주향한 산맥과 잇닿아 있고, 팔판산은 진해쪽을 향해 있는데 이 두 산의 사이가 진해와 김해의 경계가 된다. 또한 장복산의 능선은 불모산의 지맥에 닿기 위하여 계속 동진한다.

 

  신항만으로 웅비하는 도시 진해로 진입하는 길은 다섯 군데다. 옛날엔 마진터널로 불렸던 장복터널을 넘어 오는 길과, 창원 안민동에서 뚫린 안민터널, 부산 김해에서 새로 단장한 4차선도로를 따라 웅천 웅동 고개를 넘어 들어오는 길과, 예부터 있었지만 최근에야 포장이 된 창원 성주사 쪽에서 안민고개를 넘어 오는 길, 그리고 창원의 간이역들을 거치면서 한 시간을 걸려 찾아오는 철길이 있다. 예전에는 창원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진해에 와서 물건을 사가곤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창원이 대도시가 되었고, 따라서 열차 이용객도 줄어 세월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내가 긴 터널 앞에서 서성이던 그때는 내 나이 스물 댓 되던 여름 한낮이었다. ‘성주사역’에서 차를 놓치고 산을 넘어갈 양으로 철도를 따라 걸었더니 ‘진해굴’의 입구가 마치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처럼 열려져 있었다. 더구나 신기하게도 5리가 넘는다는 그 굴의 출구가 빠끔히 뚫려 보이지 않는가.

    ‘굴이 어둡더라도 저 출구를 향해 곧장 가기만 하면 바로 진해로 나서게 된다. 빠르기도 하려니와 무더위를 피해갈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굴을 들어서면 칼을 문 귀신이 앞을 막아설 것도 같고 살인강도가 옆구리를 찌를 것도 같았다. 나는 이런 상념들을 뿌리치기라도 하듯, 침을 한번 내리 삼키고는 굴속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싸늘한 살기 같은 것이 전신에 스며왔다. 나는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천정에서는 낙수가 듣고 고인물이 발밑에서 퉁겨 오르기도 했다.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차츰 빛은 가시고 굴은 어둠의 그늘이 짙게 까리기 시작했다. 그때쯤엔 내 심경은 오히려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 신상철의 수필「굴을 지나면서」중에서


 신상철은 1936년 진해서 출생했다. 1966년 등단 이후 수필집『소리 없는 나팔수』『벽을 허물고』『나를 보고 세상을 보며』등을 펴냈고, 한국수필문학상과 경남문화상, 노산문학상을 수상했고, 한동안 경남문인협회장을 지냈으며, 교육자로서 문인으로서 많은 후학들을 키워낸 경남문학의 산 증인이다.


 위의 글은 그가 젊은 시절 성주사역에서 기차를 놓쳐 진해로 걸어오면서 터널 속에서 만난 어떤 사내와 그로 인해 겪게 되는 막연한 두려움에 관해 쓴 수필이다. 이 터널은 길다. 난 이 터널을 걸어보지 못했다. 기차가 터널 입구에 들어섰을 때 숨을 몰아쉬고 다음 숨을 쉴 때까지 있어보았지만 굴은 너무 길었다. 이 글에는 굴에서 만난 사람에 관한 얘기가 있는데, 만약 그랬다면 등골이 오싹할 수도 있었겠다. 어른들은 한적한 곳에선 범보다 사람이 무서운 법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도 이런 상황에 처해본 경험이 있다. 그때 느끼는 심정은 연관된 아무런 적의도 없이, 그저 막연히 엄습해오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다. 그의 수필은 담담하고 사실적이다. 현란한 수식이 없이 담백하게 다가온다.


 이제 진해역은 잊혀지고 있다. 승객은 물론이려니와 군수물자의 수송도 현저히 줄었다. 플랫폼에서 바쁘게 들고나던 통학생들의 모습도 자취가 없다.


    지금 진해 비행장 자리 -, 거기가 덕산리德山里라고 불리우던 마을이다.

    염전이 있고, 개울이 흘러가고, 동리 아이들이 갈잎을 긁으러 가는 동뫼가 있고, 그 동뫼에는 탕근바위가 있고 -, 그런 잠자듯 고요한 마을에서, 나는 다섯 살에서 일곱 살까지 조부모님 슬하에 자랐다.

    부산을 다녀온 아저씨가 내게 양복 한 벌을 사다주셨다. 난생 처음으로 입어보는 양복-. 쑥스럽고 부끄럽고 -, 그보다는 자랑이 더 하고 싶어서 그 양복 입은 뉴우 스타일을 구경시키느라고 동리를 한 바퀴 돌던 길에 동갑 또래들이 소꿉놀이 하는 곁을 지나치게 되었다.

    쑥스럽고 부끄러운 것을 꿀꺽 참으면서 아주 뽐내고 가노라는데 뒤에서 "야 -, 저게 뭐야․․․․무슨 옷이 저래․․․․."하고 아이들의 지껄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물론 기대했던 반응이다. 거기까지라면 나는 무대를 걷는 명배우名俳優처럼, 관객을 의식하는 신경 하나를 다치지 않고 그 자리를 통과했으련마는, 그 중의 한 아이가"우습다 야․․․․." 하고 약간 지나친 비평을 한 것이 내 자존심을 건드려버렸다.

                                 - 김소운의 수필「동몽년기 童蒙年記」중에서


 1981년에 작고한 수필가 김소운은 진해를 추억하는 짧은 몇 편의 수필을 남겼다. 위에 인용한 수필「동몽년기」와 또 한 편의 글「도마소리」는 덕산리 조부모님의 슬하에서 자라던 유소년 시절의 삽화를 그리고 있다. 두 수필은 각각 난이와 연이라는 소녀에 대한 그리움을 엷은 물감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이 이야기를 모델로「5월의 훈풍」이라는 소설이 쓰여지기도 했단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5월의 훈풍」이라는 소설을 찾아 읽지도 못했고, Q라고 쓴 소설가가 누군지도 밝혀내지를 못했다. 그의 이야기는 진해의 것이지만 이 소설 속의 공간은 서울로 설정되어 있어 작가의 손을 거치면 추억마저도 살풍경해 보인다고 김소운은 이 글에서 적고 있다.


 그가 기억하는 덕산리는 염전이 있고, 개울이 흘러가고, 아이들이 갈잎 긁으러 가는 동뫼가 있고, 그 동뫼 위에 탕근바위가 있던 잠자듯 고요한 마을이었다. 오늘 진해 사람들은 이곳 어디에 염전이 있었는가 의아해 할것이지만 조선조의 문신 서거정의 시에도 염전에 관한 구절은 나온다. 이곳은 장천 가는 길목인 지금의 덕산동인데 염전은 매립되어 자취가 없고 작은 비행장이 있었다가 지금은 군부대가 들앉아 여간 살풍경해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