訪古伽倻草色春 興亡幾變海爲塵
當時斷陽留詩客 自是心淸如水人
燕子樓前燕子回 郎君一玄不重末
當時手種梅花樹 爲問同風幾度開
옛 가야 풀빛 봄을 찾으니 흥망이 몇 번 변하여 연자의 바다가 땅이 되었던고?
당시의 애끓는 시객이 머물러, 이로부터 마음이 맑기 물과 같은 사람이라.
연자루 앞에 제비새끼 돌아오지만 낭군은 한번 가고 다시 오지 않는다.
그 당시에 손수 심었던 매화나무, 묻노니 바람에 몇 번이나 피었던고?
- 포은 정몽주가 연자루를 찾아와 지은 한시
여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는 김해 연자루에 와서 천 년 전 가야국의 흥망을 노래했다. 국운이 다해가는 고려의 운명을 예감하듯이 돌이키지 못할 가야의 흥망성쇠를 비감하게 읊었다. 포은이 상기한 천 년 전의 가야국은 흔적만 남아 있고, 경향의 선비들이 들러 시를 짓던 연자루 또한 시 속에서만 남아 있다.
가락국 시절에 세워졌다는 연자루는 호계천변에 서 있던 큰 누각이었다고 한다. 촉석루, 영남루와 함께 영남의 대표적 누각의 하나였는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없다. 다만 정포은이 김해에 다녀갔다는 흔적으로 만장대에 있는 분산성터 한켠에 글자도 희미하게 그를 기리는 비석이 하나 외로이 서 있을 뿐이다.
"신도란 섬에 가면 우리 염전이 제일 컸지!"
할머니는 고향 애기를 할때는 염전 애기를 빼놓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미륵당길목인 나루터에서 그곳 소금배가 와 닿아 있는걸 보면, 할머니는 곧잘 달려가서 아무개 무쇠가마에 불 들었던가, 띠밭 등 아무개 잘 있던가 하고, 친정소식을 깍듯이 묻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러이더, 그러이더 하고 대답하던 뱃사람들의 우스꽝스런 사투리를 분이는 재밌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런 먼 곳에서 차도 발동선도 없던 옛날에, 바다같은 강까지 건너가며 시집을 오자니 사흘이 걸렸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할머니의 말로는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길길이 자란 갈밭 속을 십 리도 더 빠져나와야 되는데, 그 갈밭 속 길이란 게 또 예사로 미끄럽지가 않은데다, 돌이 지난 첫아이까지 달고서 가마를 탔으니까, 네 사람이 메는 가마라 하지만 교군꾼들이 땀을 팥죽같이 흘렸더란거다. 게다가 강기슭에 나와서도 하필 시위가 내린 위에 바람까지 어떻게 사나웠던지, 배끌기(배를 줄을 매어 어깨로 끄는 사람)들의 어깨가 뭉개질 정도가 되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두 차례나 팟자를 놓았다고 한다. 이러다간 아무 일도 되지 않으리라는 공론이 돌아서, 결국 시위나불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는 판인데, 만약에 파선이 되거나 한다면 아기와 함께 죽을 작정으로 신부(할머니)는 젖먹이를 자기의 앞배에다 층층 동여매었더란 거다. 그때만 해도 할머니의 친정은 명호서도 울리던 집안이라 배도 예사 크지 않은 고물대 이물대가 다 갖춰진 큰 배였지만, 덩그런 사인교에다 상객, 몸종, 하님, 교군꾼들까지 합쳐서 자그마치 일행이 열다섯도 넘는데, 오라범이 타신 청노새를 비롯해서 말까지 세 필이나 실어놓았으니, 그런 난리가 어디 있었겠느냐는 할머니의 이야기였다.
- 김정한의 소설「수라도修羅道」부분
문학의 자양분은 강에서 비롯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섬진강, 영산강, 금강, 남한강 등등 얼마나 많은 시문들이 이들 강을 따라 씌어졌던가. 낙동강도 예외가 아니다. 김해평야를 감고 도는 이 물굽이는 남도 사람들의 상상력의 보고다.
제6회 한국문학상 수상작이 된 위의 소설「수라도」는 김해를 배경으로 쓴 김정한의 대표작이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가족의 불행한 단면을 통해 우리 모두가 감내해야 할 고통의 문제들을 진지하게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가야부인의 굴곡 많은 삶은 곧 일제 강점기를 지나오면서 겪어야 했던 민족의 비애와 좌절이었다. 곳곳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경상도 사투리의 정겨움과 신주상 앞에서의 푸념이나 축원문들이 곁들여져 독서의 즐거움을 맛보게 하는 중요한 소설이다.
이 낙동강 유역을 배경으로 또 한 편의 인상 깊은 소설이 생각난다.
내가 강진에 도착한 것은 그 해 사월 어느 날의 저녁 으스름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곳의 첫인상을 강렬하게 만든 것은 우선 안개와 갈대였다. 이제 막 넓은 강 수면으로부터 피어오르듯 포구를 자우룩이 덮어오는 저녁안개는, 그것이 거의 사철 피어올라 아침 햇살에 스러질 때까지 마을을 포근히 감싼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데도, 그곳의 한 중요한 표지가 되리라는 걸 대뜸 느끼게 해주었다. 마찬가지로 갈대도 이제 겨우 보리만큼이나 자랐을까 말까였지만, 손바닥만한 논밭을 제하고는 어디든 한없이 펼쳐진 갈대밭과 지난해 미처 베어내지 못한 그루들의 높은 키는 머지않은 여름의 무성함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그 둘-안개와 갈대는, 뒷날 강진을 떠난 후에도 내가 그곳을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가장먼저 떠올리게 되는 기억의 배경이 되었다.
그 다음 강진의 인상으로 들어온 것은 그곳의 가난이었다. 선창쪽으로 통틀어 오십 호 정도의 인가가 몰려 있었는데 대부분은 초가집, 그것도 갈대로 두텁게 이엉을 엮어 유난스레 낮고 음침해 보이는 세 칸 내외의 한일자 집이었다. 도회의 행락객을 위한 술집인 듯 선창가 전망 좋은 곳에 몇 군데 멋 부려 지은 양옥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오히려 원주민들의 가난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 이문열의 소설「젊은 날의 초상肖像」중에서
젊은 시절 화자인 ‘내’가 낙동강의 한 어구 강진이라는 마을에서 겪은 일들을 회상하는 소설이다. 작가 이문열은 이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작품이 작가의 일부일진대 기왕에 내보낸 책에서도 내 삶의 편린은 점점이 박혀 있을테지만, 이 책처럼 내 삶과 밀접한 것도 없다. 비록 턱없는 감상과 애정 때문에 극적인 과장과 미사美辭의 폐해를 입고 있긴 해도 이 갈피갈피에는 무슨 열병처럼 지나온 내 젊은 날들이 영원한 그리움과 회환으로 숨 쉬고 있다."
그가 주체치 못했던 격동의 젊음에 대해 써내려간 비망록 같은 이 소설은 세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하구河口」, 「기쁜 우리 젊은 날」, 「그해 겨울」을 완결하여 『젊은 날의 초상』이라고 이름 붙였다.
위에 인용한 부분이 제1편에 해당하는 「하구」다. 여기에 나오는 지명인 강진은 실재하는 하구가 아닌 듯하다. 김해 사람들은 강진이란 지명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곳은 낙동강의 한 어구이며 바닷물과 강물이 섞여 흐르는 남해에 연한 작은 포구다. 밀려온 모래를 채취하여 모래장사를 하는 형을 찾아온 한 청년이 겪게 되는 방황과 그리움에 대한 기록이『젊은 날의 초상』전반부다.
인용한 부분의 말미에 조금 언급이 된 ‘선창가 전망 좋은 곳에 몇 군데 멋 부려 지은 양옥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오히려 원주민들의 가난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는 기술처럼 김해는 전통의 것과 새로운 것들과의 부조화가 극심하게 나타나는 도시다. 김해사람들은 문명의 그늘에 밀려가는 옛 문화, 전통, 자연, 환경 등을 우려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나는 가리라 연두색 돌풀 바람에 나부끼고
휘도는 강물엔 가물치 튀어 오르는 곳
삘기꽃 하얗게 흔들리던 그곳으로
꿈결같은 도화빛 무척산의 봄
개구리 우는 진례의 밤 들판으로
․․․중 략․․․
아아, 파헤치면 어디에서 다시 만나랴
찬란한 초록 물결치고
연두의 바람이 불던 김해
나는 가리라 구포교 지나
눈물젖은 낙동강 건너
비닐하우스의 불빛과
안동공단의 피곤을 지나
동상동 서상동 부원동 천관의 마을
가출한 딸들 분칠하고
유산의 손자 땅판 돈을 호리는 곳
밤마다 언덕엔 고분의 주인 일어나
옥대소리로 거니는 곳
젊은 수로왕 황옥과
아들을 열 명이나 낳던 곳
나는 가리라 아름다운 김해로
열정과 게으름으로 활기차고 나른한
신화와 젊음의 도시
고풍과 새로움으로 뒤섞이며
무덤 위에서 다시 솟는 곳
아직 땅 속 깊이 보물을 묻어둔채
사라지려는 황금벌판으로
- 장정임의 시「김해는 아름다워라」
장정임 시인이 바라보는 김해는 “열정과 게으름으로 활기차고 나른한/신화와 젊음의 도시”이며 “가출한 딸들 분칠하고/유산의 손자 땅판 돈을 호리는 곳”으로 대별된다. 고대의 찬란한 문명을 바탕으로 힘차게 미래를 내달리지만 신도시의 땅을 호리는 졸부들의 그늘이 공존하는 곳이다. 그런 까닭으로 무턱대고 김해를 찬미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수필가 박경룡과 함께 신어산을 오른다. 박경룡의 수필집『구지봉에 올라서』는 김해에 바치는 연서다. 무척산과 서젯골, 만장대, 봉황대와 임호산, 화목 갈대밭, 구지봉, 가야인의 기질, 연지, 아유타국쌍어문장 등등 이 책 한권 속에 김해가 촘촘히 녹아 있다.
그의 글 속엔 황세장군 바위에 관한 전설이 나온다. 구지봉 정상 오른편에 오줌에 녹아내린 아주 선명한 흔적이 있는 바위가 있다. 황세장군은 여의낭자와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유민공주와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게 된다. 여의낭자는 애인을 그리워하다가 죽고 황세 장군은 결국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그는 승려가 되어 여의낭자의 혼백을 빌다가 끝내는 그 역시 병사하고 만다. 공주와 장군 그리고 한 낭자. 이 비련의 사연이 응축된 바위가 바로 황세장군바위로 화려했던 가야국 성지 김해의 전설답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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