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문다. 서녘 햇살에 물든 벼들이 눈부시다. 밀양密陽, 원래 뜻인 '햇볕이 잘 드는 고장'이란 이름도 좋지만 이창동 감독이 영화에서 말한 ‘은밀한 햇빛이 있는 고장’도 좋다.
멀리 기차 지나간 철길에 여운이 깊다. 가방에서 고증식을 시집을 꺼내어 읽는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본다
늘 지나치던 저 겨울 숲도
훨씬 깊고 그윽하여
양지바른 산허리
낮은 무덤 속 주인들 나와
도란도란 햇살 쪼이며 앉아 있고
더러는 마을로 내려와
낯익은 지붕들을 어루만져주기도 한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보면
살아 있는 것만 빛나는 게 아니다
가볍게 떠다니는 영혼들이
햇살 속에서 탁탁
해묵은 근심을 털어내고 있다
-고증식 「기차를 타고」전문
이제 두어 달 후면 겨울이다. 시인의 말처럼 “양지바른 산허리/낮은 무덤 속 주인들 나와/도란도란 햇살 쪼이며 앉아” 말똥 굴러 가는 것을 보면서 너털웃음 웃고 있는 이재금 시인도 있으리라. 그런 기운으로 늘어선 긴늪, 그 솔숲은 겨울이 와도 푸르다.
옹골찬 밀양문학의 원류는 이운성, 박재호, 예종숙 등으로 구성된 석화(石畵) 동인에게로 명맥이 이어졌다. 석화란 말 그대로 돌에 그려진 꽃이란 뜻이다. 영남루 아래 아랑각 가는 소롯길에 자세히 보면 꽃잎 문양의 돌들을 볼 수 있다.
용평터널을 지나왔다. 곽경택 감독의 영화 <똥개>에서 패싸움 하던 영화촬영지다. 일제 때 철로였으나, 경부선이 이차선이 되면서 지금은 기차대신 소형차들과 자전거길로 변했다. 이 터널 입구언덕에 밀양8경 중 4번째에 해당하는 월연정月淵亭이 있고, 그 아래 밀양강에 동천이 합류하면서 이룬 절경을 굽어볼 수 있다.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좁은 길을 통과하는 드라이브의 묘미도 있지만, 터널 중간에 하늘이 보이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길 아래쪽엔 희귀종인 백송 두 그루가 있다. 뚫린 터널로 하늘을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들을 볼 수 있다.
밀양 출신 시인으로 밀양을 대표할만한 시인 이유경의 시를 읽는다.
우리와 함께 살았던 잎들은 모두 저승 멀리 가 있단다.
그때 흘렀던 냇물 바다 어디선가 지금 흘러가 있듯이
수없이 죽어가 태어나는 것 있으면 흙이나 물에서 뿐
썩는 향기 그리운 나이에 닿아 우리 여기 숨어
먼저 간 세월 한 올씩 헤기로 하자 그렇게 하자
차가운 비바람 몇날 며칠밤 저 고사리밭 쑤신 다음
몸살난 뿌리 굵은 새순 내밀 때 우린 악기처럼 만나서
잎들 위에 다른 잎들 썩고 또 새잎 떨어져 맨 밑에
저승천지 적막 죽은 짐승같이 누었음 분명하지만
다들 한 알 모래 같은 비료로 돌아가느니 노래하고 싶지
꿈의 허무 서러운 기다림 씻겨 가버린 나이 되면
우리 사랑하던 사람들 넋이나 되자 그렇게 되자
안개 자욱한 봄날 아침 그들 떠나온 도시와 길을 향해
있어도 없어도 좋은 이름으로 우리 나란히 서서
- 이유경「겨울숲에 선 나무의 傳言」전문
그렇다. 윤회하지 않는 것이 있으랴. 시인은 지상의 모든 것들과 함께 수없이 죽고 태어나 악기처럼 만나서 노래하고 싶단다. 새순도 냇물도 시인에겐 다 악기다. “있어도 없어도 좋은 이름으로” 살아서 “꿈의 허무 서러운 기다림 씻겨 가버린 나이 되면/우리 사랑하던 사람들 넋이나 되자”고 겨울 숲의 말을 전한다.
수많은 이들이 밀양을 사랑하였고 나조차도 밀양을 사랑한다. 삼랑진에서 오는 새길을 사랑하고, 그 길 위에서 보이는 밀양강, 그 강 속의 섬, 그 섬 위에서 말라가는 잡풀들과 억새들, 다시 억새 꽃잎을 흩뿌리며 날아오르는 이름 모를 새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밀양의 문학과 밀양에서 만난 사람들을 사랑한다.
고향인 밀양을 떠나온 후 고향으로 영원히 돌아가려고 한 순결한 영혼의 방랑자 박재호 시인의 시집「간이역簡易驛」한 페이지를 읽으며 나는 밀양을 떠나왔다.
간이역두簡易驛頭에 가을이 스쳐간다
잊히어진 시간時間 위로
긴 목청을 가끔 돋우는
기적소리에
눈물을 찔끔거려 본다
허망한 손짓도 해본다
바람속에
햇살속에 물구나무 서있는
어느 왕조王朝의 풍경화風景畵가
자꾸만
차창車窓에 매달리는
어느 한역寒驛의 가을날
- 박재호「간이역簡易驛」전문
'이달균의 문학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해-神의 지문을 읽는 사람들 2. (0) | 2011.09.06 |
---|---|
김해-神의 지문을 읽는 사람들 1. (0) | 2011.09.06 |
밀양-남천강에서 사자평까지4. (0) | 2011.09.05 |
밀양-남천강에서 사자평까지3. (0) | 2011.09.05 |
밀양-남천강에서 사자평까지 2 (0) | 2011.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