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문학 여행

하동-하동포구 팔십리의 사연 1.

이달균 2011. 9. 9. 11:03

  글을 시작하면서 기차를 거론하는 것이 온당치 않은 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하동!”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하동역임을 어쩔 수 없다. 열차는 내 성장기 때의 여행과 밀접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하동역은 붐비지 않는다. 역을 지나치면서 본 한가함은 쓸쓸하기까지 하다. 예전의 하동역은 온갖 사투리들로 가득찬 곳이다. 경상도 땅이라곤 하나 물길과 산길로 이어진 마을들 특유의 사투리들이 뒤섞여 매우 번다한 곳이었다. 순천, 광양, 진주, 구례, 하동 사람들이 섞여 뿜어내던 사람 냄새는 가히 하동을 서부경남의 큰 고을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기실 조선말까지의 하동장은 우리나라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큰 장이었다. 이렇게 큰 장을 형성하게 된 원인은 바로 섬진강 때문이다. 남으로는 사천, 삼천포, 남해에서 가까이는 여수, 곡성, 구례 등지에서 사오십 채씩의 거룻배와 발동선을 타고 와 하동 나루에 장꾼과 물건들을 부려 놓곤 했다. 섬진 포구에서온 배들은 산채며 나뭇단, 대자리 같은 산중의 물건들을 싣고 와 오일장을 풍성하게 했다. 장꾼들은 인근의 진교, 옥종, 화개장에까지 짐을 풀어 자연 하동의 여러 다른 장들도 함께 번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하동장은 예전의 풍성함과는 거리가 멀다. 여느 시골 읍내장과 다르지 않다. 간혹 청학동에서 내려온 머리를 땋은 떠꺼머리총각들이 보이는 것이 하동장만의 풍경이라 할까.


 하동구경을 해볼 요량이라면 두 곳으로 묶어서 하는 것이 좋다. 먼저 하동포구 팔십리를 따라 읍내, 고천, 악양, 화개면을 묶고 또 다른 한 곳은 하동읍에 서진주쪽 길을 따라 적량, 횡천, 옥종, 진교면 을 묶으면 된다.


    하동포구 팔십리에 물새가 울고

    하동포구 팔십리에 달이 뜹니다.

    섬호정 댓돌 우에 시를 쓰는 사람아

    어느 고향 떠나온 풍류랑인고


    하동포구 팔십리의 굽도리 배야

    하동포구 팔십리에 봄을 실어라

    백사장 위에 남아있는 글자는

    꽃바람에 날리는 충성 충자요


    하동포구 팔십리의 물결이 고아

    하동포구 팔십리의 인정이 곱소

    쌍계사 종소리를 들어보면 알게요

    개나리도 정답게 피여 줍니다.

                           -〈하동포구〉노래비 노랫말 전문


 하동 사람 남대우(아동문학가)가 노랫말을 쓰고 작곡가 한상기가 곡을 붙인 이 노래비는 하동을 떠나 있는 사람들의 향수를 달래주기에 충분하다. 실제 이 노래의 가사처럼 전국의 이름 있는 문인들은 이곳 하동포구를 지나며 많은 시를 짓기도 했다.


 섬진 모래톱 위 하동읍 광평리 2000평에 위치한 200년생 송림들을 뒤로하고 화개로 향했다. 하동에서 구례로 가는 19번 도로의 풍광은 가히 압권이다. 긴긴 섬진을 따라 햇살은 부서지고 군데군데 모랫벌 위엔 재첩을 줍는 사람들이 허리를 편다. 길 양편엔 시오리 배꽃길. 늦은 삼월이나 이른 사월 쌍계사 가는 십리 벚꽃길이 도화끼 물씬 풍기는 환장한 여인네의 몸태라면 배꽃은 달빛 아래 교교히 앉은 한 서린 여인네의 자태라고나 할까. ‘이화에 월백하고’란 시구가 그냥 노래된 게 아니다. 늦은 사월 경이면 부시듯 하얀 배꽃들이 섬진의 물빛과 함께 절경을 이룬다. 평소 그냥 지나친 여행객이라면 부시듯 하얀 배꽃길의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꼭 기억해 두기 바란다.


    대잎보다 푸르고 솔잎보다 연한 섬진강 맑은 물에 굽이굽이

    서러운 발 담그고 섰는 산이, 왜 나를 닮았는지 모를 일이다.

    산길대 우거진 묵정밭 지나 뒷산에 즐비하게 당구는 탄피와

    비오는 밤 헛것이 어지럽게 뛰어 다니는 해골 옆에 살찐 다북

    쑥이 자라고 있었다.


    그길이

    산으로 가던 길인데

    개미 한 마리 돌아오질 않았다.

    겨울마다

    하얀 눈이 쌓이면서

    멋대로 사는 늑대는 집 앞까지 와서

    어정거렸고

    한 마리 남은 비루 먹은 똥돼지

    눈치없이 꿀꿀거리던 그 무서운 밤에

    간이 콩만 해진 할머니

    안심시킨다며

    귀신 쫓던 간짓대로

    마당을 후려치는 할아버지는

    정말 소문처럼 노망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 정규화의 「지리산 수첩1」전문


 하동엔 유난히 대숲이 많다. ‘댓잎보다 푸르고 솔잎보다 연한’ 빛깔이라니. 깊고 얕음을 알지 못할 섬진의 내밀함과 시시로 변하는 저 물빛을 이처럼 한 마디로 표현해 낸 말이 또 있을까. 나는 이 구절 하나로 “그의 대표작은 「지리산 수첩1」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현재는 과거가 걸어와 만들어진 집이다. 역사의 물길은 어느 날 여울이 되어 뺑이 치다 사람들끼리 생이별을 하게하고, 놀람병을 얻은 이들은 문밖 비루먹은 똥돼지 소리에도 놀라 이불을 덮어쓴다. 간이 콩만 해 진 사람에겐 산사람만 무서운 게 아니다. 지리산녘에서 산 할아버지는 완장 찬 사람도, 배고파 사립을 여는 사람도 다 무섭다.  소문엔 노망이 들었다는데, 그렇다면 그 노인에게는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시인 정규화의 고향인 하동군 옥종면이다. 그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기에 시집『농민의 아들』을 펴내었고, 96년엔 여간 모질지 않으면 견디기 쉽지 않다는 인공신장 투석을 하는 환자가 되어 『지리산과 인공신장실과 시詩』란 시집을 펴내었다. 이후 시작을 계속하여 모두 11권의 시집을 펴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을 내어 존재를 확인하는 그였기에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출판기념회 사회를 도맡는 것이었다. 어느 날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삶은 고통이었지만 자는 잠에 죽고 싶다는 소원대로 죽음은 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