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을 지나다 늑도에 대한 생각 하나가 난다. 곽재구의 ‘포구기행’엔 바다와 가까운 학교인 늑도분교가 등장한다. 학교 운동장 바로 앞에 바다가 시작된다. 운동장 왼쪽에 거대한 그늘을 드리운 거목이 이 학교정경을 예사롭지 않게 만들어 준다.
이 학교를 지나 오른편으로 작은 몽동밭이 시작되는데 한 150미터를 가면 공룡발자국처럼 생긴 웅덩이(길이 1.5~2m 깊이 15cm내외)들이 3~40개 나온다. 나는 이것들이 필시 공룡발자국이라 여기고 이 방면 권위자인 김항묵교수(67. 부산대학교 지질학과)와 함께 탐사에 나섰다. 탐사결과 이것들은 공룡발자국이 아니라 침식구조인 ‘수구소혈(水口巢穴)’로 밝혀졌다. 김교수는 “약 8천~1만 년 전부터 생겨난 웅덩이로 작은 물구멍에 돌이 들어가 바닷물의 회전운동에 의해 생성된 것”이라며 “공룡발자국 만큼이나 희귀한 것으로 경남 도내에서 이렇게 큰 ‘수구소혈’ 발견은 처음”이라 했다. 어쨌거나 내 주면 몇 분들이 관심을 보여주었는데 그날의 발견은 헤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 기억 때문일까 오늘은 남해대교를 지나가고 싶다. 딱히 그것만은 아니다. 남들에게 잊혀 져 가는 것에 대한 연민과 이 대교를 지나며 1987년 나의 첫 시집 제호인 ‘남해행’이란 시를 쓴 기억도 새롭기 때문이다.
자, 아침이다. 단칼에 나를 버히고 허구헌 날의 맹세만 가방에 우겨넣고 10시 10분 발 남해행 직행버스 나는 떠나자.
임국희는 아침 살롱을 열어 행복의 꽃잎들을 흩날리고 저 구름 흘러가는 곳에 내 마음도 흘러갈 즈음 운전수는 미아리 눈물고개에서 울고 넘는 박달재까지 허덕허덕 뽕짝으로 차의 시속을 따라 잡는다. 나는 재빨리 호흡을 바꾸며 젓가락 장단에 맞춰 기능적으로 젖기로 한다.
그는 말했다. 무엇인가를 팔기 전에 먼저 나를 파는 법을, 가장 기능적으로 팔아치우고 가정 기능적으로 살아남는 법을. 차장(次長)은 가볍게 말하고 익숙하게 웃었다. 오늘 차장(次長)은 위대하고 부장(部長)은 더 위대했다.
남해대교를 지나며 나는 자꾸만 헛구역질을 하며 약을 팔기 전에 먼저 나를 팔리라. 나를 팔리라. 나를 팔리라. 세 번 다짐하고, 눈물에 씻긴 차창을 내다보았다. 남해바다 결 고운 물살에 밀리는 초경처럼 빨간 사루비아 한 송이.
여성통경제를 팔러 나는 남해엘 왔다.
-이달균 「남해행南海行」전문
내게 있어 남해대교는 보물섬으로 가는 느긋한 여정이 아니라 팍팍한 삶을 꾸려가기 위한 전장이었다. 자칫하면 낙태가 될지도 모르는 여성통경제 사루비아를 팔기위해 가방을 들고 뱀의 혀 같은 넥타이를 매고 약을 팔러 가는 길이었다. 비록 큰 약국도 없고 주문량도 뻔한 곳이지만 남해는 내 노동의 성터였고 양식의 곳간이었다.
오늘도 역시 남해대교는 덜컹거린다. 이 대교가 놓여 진 노량바다는 이순신 장군이 장렬히 전사한 노량해전의 현장이다. 그 바다 위로 해오라기 한 마리가 날아간다. 분주히 날개짓을 하는 해오라기는 남해읍 아산리 숲이나 남면의 평산리 쯤에서 날아온 것일까.
이순신李舜臣이 가고 있다.
대교大橋에 걸린
낮달 바라보고
쾌속선의 꽁무니에서
태평양 쪽으로
이순신李舜臣이 가고 있다.
유자柚子는
그가 남긴 말과 더불어
갯벌 속으로 떨어지는데
하동河東을 건너 북상北上하는
임진년 壬辰年의 소리
그 뒷덜미 잡은 채
이순신李舜臣이 가고 있다.
- 양왕용「남해도 南海島 5」전문
남해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고려 중엽부터 왜구들의 끈질긴 침공과 약탈을 받아왔다. 고려말에 와서야 명장 최영, 해도원수 정지장군 등에 의해 왜구의 약탈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외부로부터의 침공에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동질감이 그들을 묶는 연대의 끈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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