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 칼럼

‘장지연(張志淵)로(路)’ 지나며

이달균 2011. 8. 19. 17:04

‘장지연(張志淵)로(路)’ 지나며


  

이달균


  위암 ‘장지연(張志淵)로(路)’ 지나면서 조금은 복잡한 심회에 잠겨본다. 현동 검문소 지나 덕동쪽으로 좌회전하면 이 길이 있고 건너편에 선생의 묘소가 있다. 하긴 이 바쁘고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시대에 이런 길이 있다는 것을 시민들은 얼마나 알며 표지판에 눈길을 주기라도 하랴.

 

독립정신의 한 귀감에서 친일이란 오명으로 이름을 더럽힌 대표적인 인사로 각인되어버린 역사의 풍운아를  생각해보면 한국현대사의 상처가 너무 깊어 보인다. 이 길을 지나면서 왠지 가속페달을 밟지도, 그렇다고 낮은 속도계를 즐기며 운전하지 못하는 나를 느낄 때가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선생의 정신을 본받고자, 혹은 이곳에 와 참배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민족애를 가진 사람으로 인정받고자하는 욕망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주목받는 곳임에 분명했다. 마산에 선생의 묘소가 있다는 자긍심도 있었을 테고 그래서 마산시에서는 ‘장지연로’라는 길도 지정했으리라.

 

 

  선생은 1897년 고종임금이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가자 '만인소'를 작성하였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황성신문〉에 사설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을 실어 이 조약의 부당함을 만천하에 알렸다. 이로 인해 일본경찰에 의해 투옥되었고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었다. 계속된 항일운동을 위해 망명과 귀국을 거듭한 생애였다. 이런 삶을 인정받아 1962년 건국 공로 훈장이 수여되었다. 그러나 몇 해 전 <경남일보>와 <매일신보>에 친일한시를 발표한 것이 알려져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고 말았다. 이런 전력 때문인지 요즘은 이곳에 참배 오는 이들은 거의 없다.

 

 

  친일과 군사정권의 부역이란 꼬리표는 피해갈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원죄다. 이 칼날 위에서 이은상, 조두남이 쓰러졌고 이원수, 장지연이 그랬다. 살아남은 이들 역시 옷깃에 묻은 친일의 피 때문에 후손들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역사는 슬프다. 힘없는 나라에 나서 처음엔 애국애족 하였으나 시종일관 지켜내지 못한 생애가 슬프다. 그러나 더 슬픈 것은 그 역사를 오늘 우리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로 삼지 못한다는 것이다. 친일을 미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밀가루를 뿌리고 목청을 높이는 우리는 지금 얼마나 떳떳하고 공명정대한가?

 

국권을 상실하지도 않고 탄압하지도 않는데 힘에 편승하여 이익을 찾고 있지나 않은가? 침묵하는 그대에게서 베여나는 냄새도 슬프긴 마찬가지다. 그 침묵은 관조인가 기회주의인가? 혹시 이끼를 먼지라고 하여도 침묵할 것인지 묻고 싶다. 이른 여름날 아직 철거되지 않은 표지판이 있는 ‘장지연로’ 지나며 괜한 심회에 젖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