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 칼럼

김교수는 왜 투사가 되었나?

이달균 2011. 8. 18. 15:25

김교수는 왜 투사가 되었나?

이 달 균


 

  우연히 TV를 보다가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아주 잠깐 지나가는 화면이라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다시 지역 뉴스시간에 그를 보게 된 것이다. 커다란 현수막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은 분명 그였다. 얼굴은 햇빛에 그을려 있었고, 약간씩 보이던 새치는 어느새 백발에 가까워 보였다.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고 하지만 세월의 무게보다는 훨씬 늙어 있었고 지쳐 보였다.

 

  김교수는 창신대학 문예창작과의 초대 학과장을 지냈다. 그가 학과장 시절에 필자도 몇 년 간 시간강사 생활을 한 적이 있으므로 외부강사와 전임강사란 관계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내가 아는 그는 매우 신사였고 인격적으로도 배울 게 많은 사람이었다. 당시 문예창작과는 처음 개설되었으므로 여러 가지 신경 쓸 게 많았다. 학생의 수급에서부터 외부강사 선임, 과목 관리, 학과의 정체성 확립 등등 일인 다역을 해야 했다. 전임강사 두 사람으로 학과를 꾸려가기가 버거워보였지만 제가끔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천식인가로 고생하면서도 학과를 꾸려나가는 성실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축제 때면 문창과에선 시극(詩劇)을 공연하였는데, 김교수는 학과장 신분으로 직접 출연하여 연기하였는데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연습에 지친 학생들을 위해 호주머지를 털어 간식을 준비해 주는 등 교육자로서의 열정과 사명감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교수들의 시위에 앞장 선 것이다. 처음엔 참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교수의 성향 상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뭔가를 외치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런 사람이 이런 일에 앞장서는 것을 보면 뭔가 잘 못되어도 단단히 잘 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관심 있게 들여다보았다. 2008년 6월 18일 <사학비리 척결과 창신대학의 교육민주화를 위한 경남대책위원회>의 기자회견문을 보면 “14명의 교수협의회 교수들만이 부당한 규정의 개정을 촉구하며 4년여를 싸워오다 차례차례 교직을 잃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대학에서는 2006년에 1명, 2007년에 2명, 2008년엔 김교수를 포함한 4명의 교수가 재임용에 탈락하고 말았다. 그들은 모두 시위에 참가한 교수협의회 소속이라 한다. 혹자들은 그들이 타협을 모르는 모진 교수들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아는 김교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평가 기준의 어떤 부분이 그를 임용기준미달로 평가하였는가. 듣기에 창신대학엔 고등교육법과 사립학교법에 규정된 이외에  ‘학내 교회의 출석’ 여부와 ‘행정협조’라는 항목도  평가대상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부기관 발주 프로젝트를 2억 원 이상 수주하고, 2억 원 상당의 기자재와 1,500만원의 장학금을 얻어 와야 50점 정도의 산학협동 영역의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조항도 있다.

 

  이런 교육과는 상관없는 조항을 철폐하고 정당한 평가방법을 취하라며 집회를 연 교수들에겐 하루에 3점 혹은 1점씩 감점토록 하고 있어 교육정상화를 외치는 교수들은 결국 학교를 떠나게 되어 있다. <창신대학 교육민주화를 위한 경남대책위원회>가 밝힌 창신대의 여러 문제를 이 글에서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창신대학의 현재 상항을 보면 민족사학으로 설립한 옛적 창신학교의 개교이념에 흠결이 가지 않을까 걱정된다. 창신학교는 1908년 개교하면서 우리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교육이념을 바탕으로 설립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운동의 거점이었고, 민족의식으로 무장된 많은 선열들이 거쳐 간 학교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학서적으로 평가받는 ‘조선문학사’를 지은 독립운동가 안확선생, 그리고 진단학회, 수양동우회회원으로 활동하다 결국 조선어학회사건으로 1943년 옥사한 이윤재선생 등이 먼저 떠오른다. 이 두 분을 평생의 스승으로 생각한 이은상, 조선어학회장을 지낸 이극로와 국문학자이며 역사학자였던 김윤경, 일제 때 의열단을 조직하여 저항한 약산 김원봉 등이 이 학교를 거쳐 간 대표적 인물이다.

 

  이런 역사와 전통을 가진 창신대학이 5년간의 학내민주화 과정에서 잡음이 일고, 이로 인한 국민감사가 운운된다고 하니 착잡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학과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김교수가 재임용에 탈락하여 실업자가 되었다하니 정신적 충격과 건강이 걱정된다. 지금 그는 5월의 강의실과 연구실 등 학내를 떠나 어디를 쓸쓸히 배회하고 있는지 안부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