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문학 여행

마산 9경 중 제 1경 <무학산 >

이달균 2011. 8. 18. 14:08



마산 9경 중 제 1경 <무학산 >



합포만 파도소리를 배음으로 깔고

앝은 산자락엔 낙동구절초를 다소곳이 앉힌다


버혀진 조선소나무 등걸에

갯바람이 걸터앉아

안개약수터, 시루봉 가는 길을 곁눈질한다

제 빛깔을 놓치지 않으려

혼신의 힘으로 버티고 있던 먼 산들

어깨를 감추고

뒤로 물러 자리를 내어준다


산 너머 감천골엔 언제쯤 어둠이 깔릴까

산 너머 어둠은 산을 넘어봐야 알지

서마지기 억새들이 더듬더듬 수군거린다

하늘 저편에 몸 닿지 않아도

눈이 부시다


가을 무학산은

내 마음의 넓이만큼 아름답다

열린 귀만큼 눈부시다

-하영 <가을 무학산>


마산 9경 중 제 1경인 무학산은 낙남정맥을 잇는 산맥 중 하나이며 높이는 해발 761.4m, 주소는 마산시 교방동 산 31번지다. 2002년 산림청이 선정한 100 대 명산에 속한다. 조선초기의 지도 ‘신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해 조선 후기 신경준의 ‘산경표’(1769)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엔 모두 두척산이란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다.

시인이 노래하듯 무학산은 그냥 육지에 우뚝 솟은 여느 산과는 다르다. 우선 “합포만 파도소리를 배음으로 깔고” 선 것이 예사롭지 않다. 합포만은 이 고장 사람들의 터전이다. 여기서 먼 이국의 소식도 듣고, 뱃고동 소리 울리면 갯일 나간 남편을 마중가기도 하던 생의 바다다. 그래서 선창과 어시장이 생기고 마을과 골목이, 그렇게 질펀한 사연들이 생겨났다.

그게 바로 역사다. 산은 이 역사의 바다에 뿌리를 뻗고 한없이 자애로운 눈빛으로 도시를 감싸 안는다. 그래서 무학산을 마산의 산이라 이름 한다. 산 정수리에 해당하는 학봉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정기를 흐리게 할 목적으로 쇠말뚝을 박았는데, 한국 산악회 경남지부가 1986년 8월 15일 제거했다.

시인이 찾은 가을 무학산의 “앝은 산자락엔 낙동구절초”가 다소곳이 피었고, 더 높이 오르면“서마지기 억새”가 키를 재듯 흔들리는 모습이 아름답다. 어디 가을뿐이겠는가. 초봄엔 생강나무꽃이 언뜻언뜻 피어나고, 봄이 깊어지면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가 등산객의 발길을 잡는다.


무학산의 전설


◎만날고개 전설


만날고개 전설은 고려 말엽의 애절한 사연에 관한 것이다. 마산포에 사는 가난한 이씨집안의 큰딸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개 너머 윤진사댁으로 시집간다. 윤진사댁 아들은 반신불수에 벙어리였고, 시집살이는 가혹했다. 어느듯 세월은 흘러 시집살이 삼년이 되어 친정에 근행을 가게 되었는데, 사내는 이 고개에서 아내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자 그만 바위에 머리를 부딪고 죽는다.

스무살의 과부는 수절을 하며 살았지만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보고 싶어 행여 집이라도 뵐까 고개를 찾아왔다. 어머니 역시 딸이 그리워 행인이 넘나드는 고개를 찾아왔는데, 오매불망하던 딸을 만나 부둥켜안고 재회를 하였다. 헤어진 이들이 그리워서 이심전심으로 만나기를 기원하며 기다리는 고개가 바로 만날고개다.


◎돝섬과 무학산에 얽힌 전설


또 하나의 전설은 돝섬과 무학산에 얽힌 사연이다. 김해 가락왕의 총애를 받던 미희가 어느 날 밤 사라진 뒤 골포(마산) 앞바다의 한 섬에서 어부에게 발견된다. 왕이 돌아오라 권했으나, 갑자기 금빛 돼지로 변해 두척산(무학산) 상봉의 큰 바위틈으로 사라져버렸다. 당시 백성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일이 종종 있었으므로, 왕은 느낀 바 있어 군병을 동원해 바위를 포위하고 돼지와 싸움을 벌였다. 싸우던 돼지는 바위 밑으로 굴러 떨어졌고 한줄기 이상한 구름이 섬으로 뻗어 사라졌다.

이후 섬에서는 밤마다 돼지 우는 소리와 함께 괴이한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이 월영대에 향학당을 설치하고 골포에 살던 무렵, 초승달이 뜬 어느 날 밤에 이 괴이한 현상을 보고 섬을 향해 활을 쏘았더니 광채와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선생은 다음날 섬에 건너가 화살이 꽂힌 곳에 제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이 섬이 바로 돝(돼지)섬이고, 선생이 제를 올린 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영험이 있다고 해서 후세에 오랫동안 그 풍습이 이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