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깔리는 마산의 오후 다섯 시. 전조등을 켜고 봉암 해안로를 지난다. 합포만엔 불빛이 일렁거리고 차의 꼬리는 어둠 속에 묻힌다. 간간이 걷는 이들이 저녁 한기를 느끼는지 옷깃을 여민다. 강구항을 지나는 바람은 안간힘으로 버티는 자유무역지역의 마른 잎들을 흔든다. 성큼 겨울이 다가왔다. 지구 온난화다 뭐다 해도 사계절은 아직 뚜렷하다. 계절 탓인가. 문득 길 위에서 생성과 소멸, 영화와 쇠락을 생각한다.
낡고 퇴락한 공장들과 꺼져버린 무역 진흥의 나팔소리. 생산과 번영의 전진기지였지만 90년대 들면서 극심한 공동화 현상을 겪는다.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이긴 하지만 이곳 시민들의 상실감은 크다. 변화하는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후회는 늦은 감이 있다.
지금 마산엔 ‘로봇랜드 유치 축하’라는 현수막이 곳곳에 나붙었다. 아직은 속단할 수는 없지만, 시민들은 “마산을 확 바꿀 획기적인 일”이라며 기대에 부풀어 있다. 이 일에 관여한 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치적이라 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동안의 낙후를 묵묵히 견디면서 절치부심해 온 시민들의 고통과 염원의 보상임을 잊어선 안 된다. 개관을 앞둔 마산시민회관과 합포만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마창대교도 마산의 미래임에 틀림없다.
이 변화의 뒤안길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들도 많다. 가포는 우리들 청춘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추억의 장소다. 하지만 지금 옛 자취는 없다. 상가들은 진작 철수하였고, 바다는 매립 중이다. 철 지난 바닷가를 돌아 다시 시내로 향한다.
얼마 전 마산에서 제일 큰 서점이 문을 닫아버렸다. 한때 교보문고가 마산 입점을 준비할 때 반대운동에 앞장선 서점이다. 하지만 끝내 자신도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이는 여느 상점의 셔터가 내려진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래서 더욱 도심은 어두워 보인다.
문 닫은 강남극장과 연흥극장 별관이 보인다. 연흥극장 본관은 이미 철거되고 없다. 시민극장은 벌써 사라졌고, 중앙극장은 가구점으로 변해 있다. 도시는 빛바랜 추억처럼 쓸쓸하다. 이들 극장들은 기성세대의 추억을 간직한 곳이다. 시민극장 앞에서 친구와 연인을 기다렸고, 10·18 마산 항쟁을 벌였다. ‘벤허’와 ‘십계’를 보면서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사라진 극장들은 추억의 창고 하나를 통째로 잃어버린 것이다. 문신 화백도 젊은 날 극장 간판을 그리며 생계를 이었다고 했다. 역사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렇다. 사라지는 것들에 생명의 피를 돌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옛 극장들을 활용해 보는 것도 좋다. 옛 극장은 그대로 하나의 박물관이다. 낡은 영사기나 간판을 그리던 이들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있으리라. 재정이 허락된다면 이를 개조하여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것도 한 방안이다. 얼마 전 종합운동장 내 문화원 한편에 문을 연 마산영화자료관을 이곳으로 옮겨도 좋겠다. 20석의 의자와 작은 화면으로 추억을 되살리기엔 한계가 있다. 큰 돈을 들여 번듯한 건물을 지어야만 문화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주차공간이 없고 접근성이 용이하지 않지만 잘 생각해 보면 방법은 있다.
이와 함께 불 꺼진 자유무역지역 건물들도 작업실이 부족한 화가들의 공간으로, 혹은 음악연주자들의 연습실로 활용할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작업실이 없어 시골 폐교를 전전하기도 하고, 아예 먼 곳으로 떠나버리기도 한다. 소문이 나면 타 지역의 예술인들도 이곳에 둥지를 틀기 위해 찾아오리라. 자연스럽게 예술가들이 모이다 보면 방치된 건물에서 음악소리도 흘러나오고 조형물과 그림으로 인해 문화마을로 환골탈태될 수도 있다. 마산의 자랑이라는 문신 화백을 기리는 일도 이렇게 모인 후배 화가들의 몫이 아닐까.
마산 경제의 재건이 한 축이라면 그 대척점에서 문화 마인드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아득히 사라진 ‘예향 마산’의 기치를 다시 들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 기사작성: 2007-11-28
'이달균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동(洞) 마산 성호동의 큰 문화 축제 (0) | 2011.07.29 |
---|---|
BBK와 ‘비비’, 그 차이와 교훈 (0) | 2011.07.29 |
정치인들, 장묘문화 변화에 관심 갖길 (0) | 2011.07.29 |
슬픈 눈물의 `드림베이' 마산 (0) | 2011.07.29 |
추락한 날개 신정아를 위한 변명 (0) | 2011.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