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었다. 지난 가을 초입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도 어김없이 전 국토는 벌초행렬로 인해 몸살을 앓았다. 조상을 기리기 위해 가는 길이지만 도로 위에서 몇 시간을 지체하다 보면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차일피일 미루다 가는 길일 경우, 깨끗이 정리된 산소를 보면 괜한 부끄러움이 밀려들고, 돌로 치장을 하고 상석에 망두를 세운 산소를 보면 조상 모시는 정성이 부족한 듯하여 자신을 책망하기도 한다.
얼굴 보기 쉽지 않은 요즈음, 가족끼리 친지들끼리 모여 땀 흘린 후 잔 올리는 광경은 흐뭇하다. 하지만 부득이한 사유로 혼자 벌초를 하게 된다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용역회사에 부탁하기도 하지만 맘은 편치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 사자를 위한 산자들의 행렬을 보노라면 시간과 열정의 낭비가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내놓고 말할 처지는 아니다.
조상을 기리는 것과는 별개로 장묘문화는 바뀌어야 한다.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아직 속도는 느리다. 오래된 풍습을 바꾸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발전적인 형태로 납골당을 만들기도 하지만, 가족 납골당의 경우 산에 돌집을 짓는 것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일부에는 수목장을 권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극소수에 불과하다.
정치인들은 유림의 눈치를 보며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을 꺼린다. 아니 솔선수범해야 할 그들이 산소 신봉자가 되어 있다. 선거가 가까워오면 길지를 택하느라 바쁘다. 1995년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경기도 용인으로 가족묘를 옮겨 대선을 예비하였고, 같은 해 신한국당 대권주자군 중 한명으로 꼽히던 김덕룡 의원도 조부모 묘를 이장하였다.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2001년에 선영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2004년 선친 묘를, 이인제 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2005년에 선영을 이장하였다. 고건 전 서울 시장의 아버지 고형곤 박사는 타계 전 자신의 무덤을 직접 지정하기도 했다.
대선 열풍이 불 때는 후보들과 풍수와의 상관관계에 언론도 지면을 할애한다. 이런 명당론은 장묘문화의 변화를 가로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직 나는 어떤 대통령 후보도 자신의 묘를 쓰지 말고 화장하여 뿌리거나 납골당에 안치하라고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환경이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 하며 뜬구름 잡는 말들의 성찬은 끝이 없지만 이런 작은 것 하나도 공약하지 못한다.
외국 관광객들에게 기괴한 관광거리가 되는 산소의 조성에 열정을 낭비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2000년대에 살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장묘문화의 변화는 산의 파괴를 막고 후손들의 일상을 실용적으로 가꾸는 미래지향적인 일이다. 이런 작은 실천은 아랑곳 않고 산소를 옮기고 석물 치장에 앞장서는 것을 보면 국민을 믿는 것이 아니라 풍수와 운수에 기댄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대운하나 한중페리, 일자리 1만 개 창출 같은 거대한 공약만이 다가 아니다. 국토의 균형발전 못지않게 국토의 온전한 보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대통령은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생을 다하고 숨을 거둘 때 꼭 온전한 몸이어야 할까. 산자를 위해 건강한 자신의 장기를 떼어주고 한줌 흙으로 가는 미덕은 정치인들에겐 요원한 것일까. 감히 상상해 본다. 지지자들과 후보자가 줄을 서서 헌혈을 하고 다시 장기기증 서약을 하는 장면을. 비록 표를 의식한 행동이라 하더라도 박수를 쳐주겠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절실한 시점이다. 아직 우리 주변엔 밥을 굶는 이웃들이 많다. 배고픔 때문에 방학이 두려운 어린이들이 있고, 식사 시간이 슬픈 독거노인들이 있다. 후보들은 모두 복지를 외친다. 국가 예산으로 하는 복지는 쉽다. 하지만 진정한 복지는 자기희생과 절제에서부터 나온다. 더 이상 죽은 자가 산자를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다. 산소를 옮기고 치장하는 돈은 산자를 위해 쓰여야 한다.
- 기사작성: 2007-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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