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꿈
이달균
더 오래 어둡고 홍건한 잠이었어. 수초는 부드러웠고 냄새는 향그러웠어. 조금씩 젖어들면서 목울대가 잠겨왔어.
녹슨 금관이던가 떨리는 현이었던가. 이윽고 몽롱한 낮꿈에서 깨어난 순간, 홀연히 시간의 꼬리가 달아난 순간이었어.
처음 네 몸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본, 그 밤 따뜻했던 물관부를 떠올렸지. 이불을 더 위로 올려 더운 숨을 쉬었지.
쇠골을 드러낸 채 낮은 문을 열었어. 까마득 존재마저 잊었던 사람에게 무작정 주소불명의 편질 쓰고 싶었어.
설레고 고단한 잠, 길 잃은 한낮의 꿈. 긴 늪 혹은 숲길, 홀로된 타인이었다가 표백된 자작나무처럼 아득히 서 있었지.
-유심 2015 4월
낮꿈을 꾸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환상 또는 환시처럼 아득한 미로를 돌아오는 젖은 새의 독백 같은 그리움의 냄새를 펴 올린다. 하여 필자는 그 내용을 따라 흥미를 가지고 시를 따라간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 될까, 호기심을 가지며 끝까지 따라 가보았다.
5수의 시조 속에 장마다 3장 6구의 내재율이 흐르는데 구두점으로 그것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도 시조의 율격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그리고 낮꿈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다가들면서 그 내용에 이끌리게 된다.
시조는 3장 6구이지만 표기는 3행으로만 하는 것에는 나도 가끔 일탈을 저지르고 싶다. 시의 내용에 따라 표기법이 달라지는 일은 신선하다. 또한 형식을 고수한답시고 옛날에 매달리는 시조는 맛도 멋도 없다. 앞의 말에 뒤의 생각이 묻어오는 것은 좋지만 내용이 너무 단조롭거나 일상적이거나 뻔한 것, 남이 먼저 쓴 비슷한 글은 우리를 싫증나게 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조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시적화자는 낮꿈을 꾼다. 수초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물속으로 유영하며 목울대까지 잠기는 순간 녹슨 금관 같은 금속성의 현이 떨리는 소리를 아득히 들으며 낮잠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 그 꿈은 잘려나가고 말았다. ‘녹슨 금관이던가 떨리는 현이었던가.’ 금관은 한나라의 상징이다. 화려하고 고귀한 것이다. 한 개인도 스스로 하나의 왕국이라 할만하다. 사람은 누구나 왕국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국의 영화도 무한하지 않다. 낡고 쇠퇴하고 멸망한다. 이제는 ‘녹슨 금관, 떨리는 현’을 찾아 시의 내용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처음 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본 그 밤 따뜻했던 물관부’ 에서는 옛날의 한 일화가 나타난다. ‘이불을 더 위로 올리고 더운 숨을 쉬었’ 던 그날. 시적화자는 쇠골을 드러낸 채 낮은 문을 열었지만 그 일은 까마득한 옛일이었으며 존재마저 잃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이다.
그런데 그 존재마저 잃었던 사람에게 무작정 주소불명의 편지를 왜 쓰고 싶었던 걸까. 무슨 내용일까? 그 땐 철없었다고 고백할까? 아니 사랑했다고 아니 함께 했으면 좋았으리라고? 아니다. 애련한 기억일 뿐이다. 편지를 쓰고 싶지만 시인은 시를 쓴다. 주소불명이므로. 편지보다 더 깊은 마음은 시가 되어 나타난다. 인생의 고통이나 지난날의 아픔, 상처, 그것이 잘 삭으면 시의 질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설레고 고단한 잠이었다고 화자는 고백한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단하지 않으면 낮잠을 잘 수가 없다. 한낮의 꿈속에서 깨어나 시인은 생각하는지 모른다. 젊음의 한때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느 한 길을 선택해야했던 순간,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던가? 후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지나간 일이다. 그것은 긴 늪이거나 숲길처럼 적적하고 고독한 길이지만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길. 아름다운 길이라 생각하자.
‘홀로된 타인이었다가 표백된 자작나무처럼 아득히 서 있었지.’ 아득하고 쓸쓸한 회상에 젖는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각인된 사람 하나, 몸둥이(몸뚱이) 하얀 자작나무그늘아래 길게 남아 마음을 금관악기처럼 떨리게 하는 날이 있다. 낮꿈 이다(낮꿈이다).
-(박옥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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