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문학 여행

통영 - 상처 입은 龍들의 도시 1.

이달균 2011. 10. 10. 22:03

 

윤이상과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을 엮은 책「상처 입은 용」의 첫 부분에서 윤이상은 그의 어머니가 꾸었다는 태몽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용은 신비의 영산인 지리산 구름 속을 날고 있었지만, 하늘까지 높이 올라갈 순 없었다. 용은 상처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꿈에 놀랐고 훗날 이 꿈이 그에게 심각하게 중대한 운명을 예언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한국 예술사의 한 절정을 이룬 예인들의 혼으로 채워진 도시라면 나는 주저 없이 통영을 꼽는다. 이 작고 아름다운 도시 통영은 내게 <상처 입은 용>을 자꾸 떠올리게 한다. 동백림 사건으로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숨을 거둔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은 분명 상처 입은 용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가만히 현미경을 들이대면 굵직굵직한 통영의 예인들은 치유할 수 없는 나름대로의 상처를 안고 있다. 한국 연극사에서 한 획을 그은 유치진은 대표적인 친일문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고, 생명파 시인 유치환 역시 후대인들에 의해 친일의혹에 휘말리면서 큰 멍에를 짊어지고 있다. 5공 시절 본질과 근본을 외면해 버린 정치판에 참여하여 속앓이를 하는 무의미의 시인 김춘수는 또 어떠한가? 시대와 불화한 그들의 상처가 후대를 사는 우리들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런 슬픔들이 외려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 그렇다. 통영은 분명 상처 입은 용들의 도시다. 한국현대사는 이들에게 면류관과 멍에를 함께 씌워주었다.

 

그 갈등 속에서 통영의 물빛은 조석으로 변한다. 찬란할수록 비애의 빛깔은 더 짙어지는 법이다. 이곳을 배경으로 한 집안의 몰락을 그려낸 소설로 <김약국의 딸들>이 있다. 아니, 이 소설은 한 집안의 얘기라기보다 통영의 얘기라고 해야 마땅하다. 소설 속에서 통영만의 삶과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중간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 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난하여 매우 살기좋은 곳이다.

<중략>

이 고장을 찾을 때 통영어구에 있는 죽림고개에서 갓을 벗어 나무에다 걸어놓고 들어온다고 한다. 그것은 통영에 와서 양반행세를 해봤자 별 실속이 없다는 비유에서 온 말일 게다. 어쨌든 다른 산골 지방보다 봉건제도가 일찍 무너지고 활동의 자유, 배금사상이 보급된 것만은 사실이다.

어업 외에 규모가 작지만 특수한 수공업도 이곳의 오랜 전통의 하나다. 근래에 와서는 두메산골로 들어가도 좀처럼 갓 쓴 사람을 볼 수 없게 되었고, 이조왕실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최상품의 것이라면 으레 통영갓이었고, 그 유명한 통영갓은 제주도의 말총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지금도 여염집에 들러는 뜨내기 소반장수가 싸구려 소반을 통영소반이라 사칭하고 거래하는 풍경이 있는데 통영갓, 통영소반은 그 세공이 정묘하여 매우 값진 상품이었다. 이밖에도 소라껍데기로 만든 나전 기물이 이름 높다.원료를 바다에서 채집하는 관계상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진주빛보다 미려하고 표질이 조밀한 소라 껍데기, 혹은 전복 껍데기를 갖가지 의상으로 목재에 박아서 만든 장롱, 교잣상, 경대, 문갑, 자(尺)에 이르기까지 화려 찬란한 가구제작은 일찍부터 발달되었다.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중에서

박경리는 이 소설에서 고향에 대한 기억들을 매우 소상히 그려놓고 있다. 526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아로새겨진 한려수도의 중심, 임란 당시의 통제영이 있었던 곳이다. 소설 속에도 언급된 400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나전칠기는 삼도수군 통제영 12공방에서 전승된 소중한 유산이다. 이 열두공방은 지금도 통영의 자랑으로 계승되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