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의 사공아 뱃머리 돌려라
우리 님 오시는데 길마중 갈거나
너희가 날같이 사랑을 준다면
가시밭이 천리라도 맨발로 갈기나
간다 못간다 얼매나 울었다고
정거장 마당이 한강수 되노라
자굴산 상상봉 서 있는 저 소나무
날캉도 같이도 외로이 섰는구나
정암에 강물이 이내 숲 같으며는
의령읍내 저 건달 내 친구 될거나
의령에 남산이 내돈 같으면
산길이 점방이 내 점방 될거나
후렴 : 아이고 되이고 뚜땡구 뚜땡구
성화가 났네
- 「정암 뱃사공 노래」(엄상현, 남호현, 허백년 수집)
일제 때 철교를 놓은 후로 정암 나루는 흔적이 없어졌다. 이 노래 역시 다른 지방 구전민요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후반부의 ‘신길’이란 왜인 상인 이름과 읍내 건달이 등장하는 것이 특이하다. 의령은 예부터 인근 함안과 내왕이 활발한 편이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남강이 가로놓여 배가 아니면 왕래할 수 없는 지리적 조건 때문이었다. 의령읍으로, 정곡으로, 지정으로 어디를 가도 배편을 이용해야 했는데 이런 지리적 환경이 구슬픈 뱃사공 노래를 낳게 했으리라.
의령군은 경남도내에서 재정자립도가 매우 취약한 편에 속한다. 그들은 기실 타 도시에서 겪는 환경문제 같은 것을 고민할 여유가 없다. 은근히 큰 공장이라도 하나 들어와 군민의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한국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국부國富가 태어난 곳이지만 번듯한 공장 하나 없으니 원망이라도 할 만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런 생각은 안중에도 없다. 예부터 의령 가서 인물자랑마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출중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고장의 자존심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빼어난 태백산같이 한 시대 뛰어난 이여
줄기찬 낙동강처럼 고난의 길 헤쳐 간 이여
불굴의 기백과 지조 백대의 스승이외다
망한 나라 찾으시려고 영화안락 버리신 이여
광복된 오늘이오니 도로 이 복록 누리옵소서
이 강산 이 겨레 함께 길이길이 사시오리다
-「이은상이 지은 백산 안희제 추모 비문」
의령은 백산 안희제의 고향이다. 선생은 1943년 8월 3일 광복을 두 해 앞두고 향년 59세로 숨을 거두기까지 오로지 조국과 겨레를 위한 헌신했다. 10세에 사서오경을 익혔고, 17세에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는 등 그의 비범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한다. 백산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분연히 책을 덮고 상경한다. 이때 그의 나이 21세. 이후 대동청년단 조직, 중외일보 경영, 동아일보 창간 발기, 대종교운동, 협동조합운동, 조선어학회 사건 등등 중국과 조국을 오가며 수많은 일들을 한다. 그리고 70여회의 고문으로 인해 출감 3시간 만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무덤은 부림면 입산리 산기슭에 있다.
백산선생의 생가는 문이 잠겨 있었다. 잠시 후 육십쯤 되어 보이는 여자분이 문을 열어주며 손녀라고 했다. 현재의 건물은 화재로 손실되어 재건축 하였다고 한다. 원래 생가 건물을 보수하느라 인부들이 왔는데 그들의 담뱃불로 인해 전소되어 버렸다고 한다. 백산 생가는 함안군 대산면을 지나 의령군 지정면을 향해가다 부림면 하천을 끼고 우회전하여 좁은 농로 길을 5분정도 달려가면 왼쪽편에 있다. 신반행 지방도로 한켠에 ‘백산 안희제 생가’라고 쓴 팻말이 있다.
망우당 곽재우와 백산 안희제, 그리고 조선어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조선어학회 사건의 주인공 이극로, 그분들의 이름만으로도 의령은 분명 충의의 고장이라 이름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수파집 사건으로 유명한 수파 안효제, 송은 안창제, 파리장서운동의 수산 이태식, 면암 최익현의 유지를 이은 구국의 화신 조재학 등등 이름을 다 헬 수 없을 정도다. 이렇게 의령에 인물이 많이 나는 이유를 사람들은 자굴산의 정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달균의 문학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영 - 상처 입은 龍들의 도시 1. (0) | 2011.10.10 |
---|---|
의령- 충의忠義의 붓 높이 들고 3. (0) | 2011.09.16 |
의령- 충의忠義의 붓 높이 들고 1. (0) | 2011.09.16 |
함안-역수의 땅, 역류하는 혼 5. (0) | 2011.09.16 |
함안-역수의 땅, 역류하는 혼 4. (0) | 2011.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