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문학 여행

함안-역수의 땅, 역류하는 혼 2.

이달균 2011. 9. 16. 11:12

지형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함안은 절의 선비로 유명한 곳이다.


喬木如存可假花, 王春惟到暮山家

悲歌哀詠相隨地, 恥向長安再着紗


교목도 있기만 하면 꽃이 필수 있으니

해 저문 산가에도 봄이 찾아 왔구나

슬픈 시가 읊으며 서로 따르는 이 자리

서울 가서 다시 벼슬하기는 아예 싫어졌네.


  마산에서 함안 가야읍으로 가다가 산인면에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여러 채의 기와집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고려유신 모은茅隱 이오李午의 고려동高麗洞(산인면 모곡리 장내마을)이 있다. 이오의 본관은 재령載寧으로 후기 성균관진사였는데 고려가 망하기 전 정몽주가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시기가 적당치 못합니다.”하고 때를 보던 중 고려 사직이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갔다. 이방원이 두문동을 파괴하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남으로 내려온다. 이곳을 지나다 백일홍이 핀 것을 보고 거처를 정한다. 화무십일홍으로 꽃은 열흘을 넘기지 못하는데 백일홍은 백일을 피니 충신이 살만한 곳이라 하였다.


  입구에 ‘고려동학高麗洞壑’이란 비석을 세우고 담을 둘러쳐 ‘고려동’이라 하고 이곳의 논밭을 고려답, 고려전이라 하여 담장 안의 것으로 자급자족하였다. 태종 때 여러 차례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나 결국 나가지 않았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이곳을 장내라 부르는데, 현재는 장내牆內라 표기한다. 하지만 이곳 출신 여인들이 시댁에서 불리는 택호는 늘 ‘담안댁’이다.


  선생이 이곳에서 은거하자 고려의 유신들인 함안 원북의 금은琴隱 조열趙悅, 합천 가회의 만은晩隱 홍재洪載 선생은 서로 왕래하며 시와 문장으로 여생을 보냈다.

  “밤마다 바다에서 떠오른 외로운 달을 맞이하고, 해마다 구기자, 국화 심을 작은 밭을 개간하네. 끝내 돌아봐도 요순 시대는 만날 수 없으니, 소먹이 나무꾼 동무됨을 만족하게 여기네.”

  이 시와 함께 입신출세의 길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지내는 삶이 잘 드러난다.


황해도하고도 재령에 가고 싶다

장수산 열두 굽이를 돌아보지 않고서야

누구도 황해금강을 말하지 말라던


단암절, 모음사, 닦아야 보인다는 세심대와 세심폭포, 논두렁도 이쁘고 불러보면 더 정겨운 재령나무리, 봉산어러리 소출 좋은 너른 들 다 팽개치고 두문동杜門洞에서 또 남으로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담장 둘러치고 담 밖 세상이야 조선의 해가 뜨건 말건 고려인으로 살겠다던 모은茅隱 선생 그 지조, 그 양반 자랑으로 육백 년을 버텨온 일족이지만 내사 물려받은 것이라곤 비장脾臟 약한 체질과 재령載寧이란 본本 하나


그래도 한 번은 다녀오고 싶다 그곳 산세인들 무에 그리 장대하고 울창하겠느냐 딱히 무엇이 그리워서도 아니다 내나 제나 요령부득으로 중도 속도 못된 재령 사람들 자꾸 눈에 밟혀와 눈다래끼가 나는 이 봄날, 그래서 나는


   -이달균 「재령載寧 아라리」 전문


 이 졸시는 재령일문의 한 자손으로서 황해도 재령과 그 내력의 연관을 생각하며 썼다. 그 핏줄을 타고 났다지만 딱히 연관지울 무엇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재령이란 본관을 물려받은 선생의 20대손 정도가 되는 후손으로 그 권원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이 이 시를 낳게 했다. 비옥한 재령평야 근처엔 ‘노동자구’라는 마을도 있다고 한다. 어쩌면 한 일족이 살지도 모르는 그곳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