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눈부신 역작을 발표한 작가로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이 있다. 김정한은 1997년 작고할 때까지 민족문학 진영의 거목이었으며 후학들에게 존경을 받아 온 소설가다. 그는 이곳에서 단편「사하촌」,「항진기」를 비롯, 여러 편의 작품들을 발표한다. 억압받던 시대 민족의 고난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섬 속의 섬 노도에 갇혀 고독 속에 묻혀 간 서포 김만중, 일제의 지배 하에서 민초들의 삶을 그려내기 위해 현미경을 들이대었던 김정한, 그들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그들의 큰 그늘 탓일까. 남해는 유난히 소설가가 많이 난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이동면 출신의 정을병이 있다. 정을병은 34년 현대문학으로 데뷔한 이후 16권의 창작집을 낸 왕성한 활동의 현역이다. 현대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등 문단의 권위 있는 상들을 다수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면에서 출생하여 남해를 지키다 2002년 타계한 문신수가 있다. 61년 7월 자유문학 제3회 신인상에 단편 「백타원白楕圓」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수필, 동화에까지 장르를 넓혀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백시종을 생각한다. 가장 남해사람 기질을 대표할 것 같은 느낌으로 그가 떠오다. 남면 평산리에서 출생하여 여수와 광주, 서울로 객지 생활을 하지만 그의 귀는 늘 바다 쪽으로 열려 있다. 어쩌면 먼 해원을 떠돌다 이제 막 정박한 작은 섬처럼 그도 유랑의 닻을 내리고 캄캄한 유배를 꿈꾸는 지도 모른다. 1994년 펴낸 그의 창작집『청산을 기다리며』한 곳을 펼쳐본다.
바람막이 하나 없이 휭하게 트인 덕양만德陽灣의 겨울은 그 어느 곳보다 드세었다. 수평선을 따라 한없이 가면 곧바로 태평양이 나온다는 황량한 바다에서 시작한 바람은 흡사 국그릇처럼 움푹 팬 덕양만에 와서 더 갈데없이 주저앉게 마련이었다.
하나, 단 한 번도 얌전히 주저앉는 법이 드물었다. 마지막 발악이라고나 할까 병목에 불어넣는 입바람 소리처럼 웅웅, 울기도 하고 때때로 얼기설기 올려놓은 율촌栗村 부락 콜타르 지붕을 깡그리 걷어 내기도 하는 것이었다.
특히 비라도 뿌리는 밤, 느닷없이 불어닥친 역풍은 더 그랬다. 도통 깊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무슨 원한이 그리 많길래 산발한 미친 여자인 양 저토록������워이, 워이, 우웅, 응―������울어 쌓는 것일까?
남옥은 거기 있었다. 얼핏 보면 새끼 등대가 서 있는 방파제 같았지만, 기실은 10층 높이도 더 되는 살물선 갑판 위였다. 고개를 내밀기만 해도 아찔한 거대한 홀드(화물 적재소) 옆이었다. 웬 청년이 아득한 그 곳의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밤인지 새벽인지 푸르끼한 간데라 불빛이 한 개 켜 있었는데.
그래서 청년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 보였다.
그가 피우는 담배 연기 같기도 하고 용접 파이프에서 새어 나오는 가스 같기도 한 야릇한 더미가 마치 이무기의 입김처럼 뭉얼뭉얼 홀드 안속을 에워싸는 것이었다.
- 백시종 소설「허망虛妄의 다리」앞부분
덕양만이 되었든 미조 앞바다가 되었든 그의 소설의 소재는 대부분이 바다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해구〉〈흐르는 섬〉〈망망대해〉〈배가 산으로〉〈환상의 바다〉〈다정한 바다〉〈바다 위를 걷다〉〈북망의 바다〉〈바다의 함정〉〈새벽을 잡는 그물〉〈허리케인〉등 절반에 가까운 작품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했거나 소재를 따온 것들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영혼은 바다를 떠나 있지는 못하는 듯하다. 남해에서 태어나 여수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성장기의 영향이 큰 탓이라 생각된다.
남해를 여행한 사람들에게 나는 남면 홍현리 가천마을을 가보았느냐고 묻곤 한다. 어쩌면 가천마을은 숨겨진 남해의 마지막 마을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 그들은 하필 이런 곳에 마을을 일궜을까. 경사가 심한 산비탈을 개간하여 다랑논을 만들고 가파르고 좁은 골목을 이어내었다. 산에서 굴러 내려온 바위들과 함께 마을은 이루어져 있다. 심지어는 커다란 바위가 마당에 터억! 하니 앉은 집이 있다. 이곳에 치성을 드리는지 촛대가 놓여 있다.
쓰싹쓰싹 깍기 시작한다 깍고 깍았던 바다와 산, 기인 긴천과 짚자락에다 노자돈 묶어놓고 도솔마을을 떠난다 신방을 차린 암미륵은 어둠의 숲에서 마른 마늘을 까고 있다 저녁의 계단을 오르고 있는 바닷바람은 홀로 잠든다 추운 새벽의 허리를 부여잡고 살을 비빈다 안개가 내린 정토淨土의 숲, 찬 기운이 감돌고 있는 밥무덤 아래 그 오랜 뇌리에 약간씩 미동하는 풍어의 배, 망망대해에서부터 붉은 해가 굵다랗게 끄덕거리자 수평선이 서서히 풀리고 있다 그러자 다시 붉어지는 도솔마을
-이진욱 <가천 미륵불>전문
가천 마을은 바위와 인연이 깊다. 마을을 내려가면 거대한 암수바위가 관광객을 기다린다. 이 바위에도 그럴 듯한 전설이 전해온다. 영조 27년 이곳 현령 조광진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 “나는 땅에 묻혀 있다. 땅을 파서 나를 일으켜 주면 좋은 일이 있으리라.”해서 묻혀 있는 바위를 파내어 세웠다고 한다. 그후 마을은 번성하였고, 인재가 많이 났다고 한다. 영험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예부터 여성들은 이곳을 찾아와 아들을 점지해달라고 빈다.
시인은 이곳이 부처님이 깎아 만든 도솔마을이라고 믿는 모양이다. 마늘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암미륵이 밤새 뜨거운 인연을 맺는다. 해풍에 드러난 알몸은 차갑지만 잉태와 풍어를 기원하며 나누는 운우지정은 지나는 나그네의 얼굴을 발그레 달아오르게 한다.
시인이 눈길을 준 밥무덤은 남해의 상징이다. 가천마을을 찾아오지만 밥무덤엔 눈길도 안 주고 암수바위만 보고 간다. 시집가기 전, 아니 죽을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 흰 쌀밥 몇 말이나 먹고 갔을까. 밥무덤은 알량한 복을 비는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거룩한 생명이었던 것이다.
이상을 찾아 서둘러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노량 바다는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가라고 파도를 높인다. 흩어져 말이 없는 섬들도 바쁜 길을 막는다.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기다림을 안다. 먼먼 손짓으로도 오지 못하는 섬사람들은 또한 그리움의 의미를 안다.
치자와 유자 그리고 비자나무만큼 문인이 많이 나는 남도의 한 섬 남해. 십 수년도 더 흐른 어느 날, 남해의 일몰을 배경으로 창선 뱃머리에서 바쁘게 손을 한번 잡고 헤어지던 아동문학가 임신행이 생각난다. 그는 마산에서 오고 나는 마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금남호 뱃전에서 우린 서로 손을 흔들었다. 지금은 사라진 그리운 금남호.
이수정, 이처기, 박평주, 박윤덕, 박윤규 이런 남해 출신 문인들도 이 뱃머리에서 손을 맞잡고 헤어져 본 적이 어디 한 두 번 이었을까. 오늘 나는 금남호 뱃머리의 흔적을 살피며 삼천포에 걸쳐진 대교를 지나간다. 마늘밭에 흔들리는 푸른 해풍 같은 남해 출신의 젊은 시인 김우태의 시 한편을 소리 내어 읽었다.
비 갠 아침
어머니가 울타리에
빨래를 넌다
간 밤
논물보고 온 아버지의 흙바지며
흰 고무신
천둥 번개에 꿈 잘꾼
손자녀석 오줌바지
구멍난 양말들이
햇살에 가지런히 널려간다
쪼들리는 살림일수록
빨랫감은 많아
젖어 나뒹굴던 낱낱의 잡동사니
가렵고 눅눅했던
이불 속 꿈들이
줄지어 널려가는 울타리에
오이순도 넌출넌출 감겨 오른다
빗물 빠진 마당가엔
풀새들이 눈을뜨고
지붕 위 제비떼 날개 말리는
비 갠 아침
어머니가 빨래를 넌다
꺾인 팔은 바로잡고
꼬인 다리는 풀어 주며
해진 목덜미
닳은 팔꿈치
아무리고 다독이면서
새옷보다 깨끗한 빨래를 넌다
- 김우태〈비 갠 아침〉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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