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명의 시, 우리 시대의 자화상
- 이상옥 시집 『그리운 외뿔』을 읽고
이 달 균(시인)
이상옥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그리운 외뿔』을 읽었다. 이 시집을 통해 그간 묻어둔 자신의 체취와 고통의 빛깔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시집을 완독하고 난 후의 느낌은 ‘참 편하다!’였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요즘 시들이 편하게 읽히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난해한 어휘와 어휘의 충돌, 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 심각한 감정의 기복 등등의 기류에 조금은 지쳐있다. 살아온 시간의 경험치와 사물을 바라보는 의식이 엇비슷한 동년배의 동류의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편안함을 매너리즘 혹은 패배주의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현란한 단청으로 채색된 집보다는 꾸밈없는 서까래와 대들보가 투박하게 어울린 집에 더 끌리지 않는가.
나는 그가 문단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지방대학 문창과를 열고 교수 생활을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곁에서 지켜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나직한 말, 도무지 화를 낼 줄 모를 것 같이 온화한 인상으로 지천명이 넘은 오늘까지 자신을 다독여 왔다. 그러나 그의 삶이 결코 포장도로만 있었던 건 아니다. 어느 날 고교교사 사표를 던지고 반 백수의 대학강사를 하면서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갓 시작하는 문창과 교수가 되어 힘든 살림을 지금껏 꾸려왔다. 그 와중에서 여섯 권의 시집을 펴내었고, 디카시라는 낯선 길을 홀몸으로 헤쳐 왔다.
한때 그는 ‘로즈’라는 카페를 즐겨 찾았다. 붉은 장미와 핏빛 칵테일, 그리고 달콤함에 끌리곤 했다. 상당히 지속적이었고 조금은 탐닉하는 듯 보였다. 무엇인가에 집착할 것 같지 않은 그가 집요하게 매달리며 걸어온 것은 무엇인가? ‘단순하고 범박한 아름다움’이 이상옥의 아포리즘이라면 틀린 말일까. 그와 관련하여 이 시집 ‘시인의 말’의 한 부분에 주목했다.
“일반 문자시 쓰기도 사람이나 사물, 혹은 에피소드 속에 언뜻 드러나는 시적형상을 문자로 고스란히 옮기는 것으로 대신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나는 진정한 의미의 견자로서 에이전트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말하는 시적 형상이란 단번에 느끼는 어떤 이미지를 말한다. 그가 천착하는 ‘디카시’라는 형식도 프리즘으로 만나는 대상에 대한 즉물적 느낌을 사진과 글로 옮겨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엔 인식과 주장을 위한 장치보다는 독자에게 맡겨두는 여백의 묘미가 더 빛난다.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간디가 올라타다가 그만 신발 한 짝이 벗겨져 플랫폼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기차가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간디는 그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다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려 놓았다 사람들이 의아해하자 간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간디’ 전문
이 시집에는 왜 많은 유명인들이 등장할까? 간디를 비롯하여 미켈란젤로, 마더 데레사, 펄벅, 샬럿 데이비스, 브리짓 바르도 등과 시인은 어떤 관계로 엮이는가.
미켈란젤로에게 시인은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피에타 상이나 다비드 상 같은 훌륭한 조각상을 만들 수 있었습니까 당신은 정말 위대한 예술가가예요”라고.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대리석 속에 숨어 있는 조각상을 정이나 쇠망치로 손상 없이 꺼내주었을 뿐이예요/ 나도 택배꾼일 뿐이예요”하고 대답한다. 결국 시인이 만난 천재 조각가의 특별함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신의 일을 대신하기 위해 얻은 재능이란 것이다. 그 ‘택배꾼’의 뜻은 “신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는 선물을 배달하는 택배꾼”(초보 심마니)이란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그렇다면 마더 데레사, 간디 등등과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가진 것이라고는 어둠, 외로움과 고통, 신앙과 사랑, 믿음을 잃은 상실감과 공허밖에 없다고, 아무것도,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깨달음조차 가지지 못한 기쁨만을 누리고”있다는 성녀 마더 데레사를 있는 대로 기술하면서 시를 맺는다. 어떤 생각도 끼워 넣지 않고 그저 밑줄 치며 읽는 자신을 내보일 뿐이다.
시인은 왜 이들에게 천착해 있는가. 위인들의 생애를 시로 형상화 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독자를 가르치거나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신의 생각을 철저히 배제하고 팩트 자체를 강조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유명한 일화를 소재로 한 인용 시 ‘간디’ 역시 시인의 생각을 철저히 배제시킨다. 그저 간디의 행동으로 시작하고 간디의 말로 끝맺는다. 언어를 다루는 시인도 결국은 택배꾼이다. 시인은 디스플레이 디자이너처럼 맵씨 좋게 언어를 배치하고 나머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주려 한다. 그런 여백이 있어야 독자의 생각이 스밀 여지가 있다.
고등학교 교사 노릇을 그만 두고
시간강사 시절부터 쭉 타고 다닌 구형 프린스
거제로 진주로 마산으로 창원으로 저 태백까지
끊임없이 달리고 달려 40만 킬로에 육박하다
카센터 주인이 말한다
이제 웬만하면 바꾸시죠
말귀도 알아들을 만한 구형 프린스
섭섭하지는 않았을까
오늘 아침에는 몸을 어루만져주며
깔판도 털고 종이 부스러기도 치우다
-「구형 프린스를 생각하다」전문
이 시는 시인의 40대를 고스란히 말해준다. 김유신의 말이 천관녀의 집으로 안내했듯이 이 구형 프린스도 가만히 시동만 걸고 있어도 한반도 곳곳으로 주인을 데려다줄 것만 같다. 무생물과도 오래 교감하면 서로 아픈 데를 알까. 그의 시간강사시절은 고단했다. 진주 경상대와 진주교대로 저 강원도 태백의 어느 대학에서 다시 거제대학으로 구형 프린스가 달린 거리만 해도 수십만 킬로에 달한다. 그렇게 정든 녀석을 카센터 주인은 구형과 신형으로만 구분한다. 기성의 것은 소비하고 신제품을 낳아야 경제가 돈다. 시인은 딱하게도 ‘말귀도 알아들을’만하다고 폐기될 제품에 정을 불어넣는다. 경제인의 눈으로 보면 참 세상살이에 아둔한 사람으로 보인다. 이런 시에 공감하는 나도 함께 아둔한 사람일 뿐이다.
산이 움직이고 있었다 “산이 걸어간다”소리치자 그만 서고 말았다 ‘걸어산’ 바로 거류산이다 고성 사람들 거류산 얘길 예사로 듣고 자랐다 김열규 교수도 김형오 의장도, 나도 들었다 고성 사람들 간이 크다 공룡 브랜드를 선점해버렸다 고성하면 공룡, 공룡하면 고성, 2009 경남 고성 세계엑스포, 고성 사람들 오늘도 고성 판타지를 쓴다 강력한 해상왕국을 꿈꿨던 철의 가야, 쇠가야의 사람들
나는 습관적으로 약력 맨 앞줄에 1957년 경남 고성固城 출생이라고 쓴다 그럴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뭔지 모를 단단한 힘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나도 영락없는 쇠가야의 사람
-‘쇠가야’ 전문
‘쇠가야’는 중의적 의미로 읽힌다. 물론 이 시에서는 철기문화를 꽃피운 소가야를 말하고 있지만 소를 쇠라고 발음하는 경상도식 발음도 한 몫을 한다. 쇠가 발달했던 가야도 좋고 옛 이름인 소가야도 좋다. 어쨌든 고성사람의 긍지를 나타낸다.
시집엔 ‘나’의 얘기들이 더러 나온다. 위의 시가 그렇고 이 시와 또 다른 시들이 그렇다. 자칫 자신의 얘기를 주절주절 널어놓다보면 시도 안 되고 뭣도 안 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시는 그런 우려를 보란 듯 훌륭한 한 편의 시로 만들어낸다. 주변 사람 이름도 스스럼없이 쓰고, 그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도 꾸밈없이 드러낸다. 압축과 함축보다는 자질구레한 얘기들을 망라하여 한 편의 시를 완성해 낸다. 이런 자연스러움은 20년이 넘는 시력이기에 가능하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불교최초 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구절이다
무소는 다름 아닌 인도코뿔소다
아프리카코뿔소는 뿔이 두개지만
인도 코뿔소는 정신의 뿔을 베어버리고
육체의 뿔 달랑 하나다
무리 짓지 않고
혼자서 길 가는 외뿔이다
아, 나는 너무 관념주의자다
-「그리운 외뿔」 전문
이 시집의 제호로 쓰인 시답다. 소박한 지천명이라고나 할까. “정신의 뿔을 베어버리고/육체의 뿔 달랑 하나”만 달고 혼자 가는 길은 그의 간절한 지향이다. 시인에게 두개의 뿔은 필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한쪽 뿔인 회의와 고뇌는 태생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시인의 운명이다. 그는 ‘무리’라는 사회를 버리고 생각의 원천인 ‘정신의 뿔’도 버리고 앞을 향해 가는 외뿔이고 싶어 한다. 그런 단순무식이야말로 깨달음마저 인식하지 못하는 피안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그 피안에 이르기엔 한 없이 부족하므로 그 외뿔은 그리움으로 존재한다. 그는 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단단한 또 하나의 뿔을 가지는 ‘관념주의자’일 뿐이다. 이 시는 거울속의 자신을 그리고 있지만 혼자만의 초상은 아니다. 외로움을 사랑하지만 기실 외로움이 두려운 이 시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이 시집에는 한 사람을 위한 두 편의 시가 있다. 하나는 “비범했지만 평범했던/향년 51세 이영옥의/오빠”(오빠였던 나)로서의 ‘나’가 있고, 또 한 편은 “아들이 밀어주는 휠체어에서/생의 마지막 터널을 지나고”(누이-심영무에게 주는 시)있는 누이의 오빠로서의 ‘나’가 있다.
얼핏 읽다보면 지나칠 수도 있지만 꼼꼼히 읽다보면 피붙이를 향한 애절함을 숨겨둔 시집임을 알 수 있다. 너무나 편안하게 썼지만 결코 편안하게 읽을 수만은 없다. 그 솔직함은 일부러 소박함을 가장하지 않았고, 괜한 불교적 성찰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뒤의 시는 51세에 죽은 누이의 아들인 생질에게 주는 시인데 담담히 동생과의 작별을 말하는 오라비의 가녀린 떨림을 읽는다.
시의 인플레이션 시대다. 한 주일에도 몇 권의 시집이 배달되어 온다. 시를 사랑하는 일이 쉽지 않다. 시집이 왜 한 장의 편지보다 덜 감동적일까. 그런 의미에서 이상옥의 시집은 오랜 한 친구에게서 온 편지 같다. 동생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고, 집에서 키우는 개 ‘고야’의 이야기도 있다. 이 글은 실제 얼마 전 이상옥 시인이 내게 보내온 편지의 답장이라 생각하고 썼다.
복잡한 시대, 이상옥 시의 존재이유는 분명하다. 가장 평이한 진술을 통해 잔잔히 가슴이 젖어드는 느낌은 쉽게 만나지지 않는다. 몇 해 동안 숨을 몰아쉰 한 시인의 기록이지만 그만의 것이 아니라 동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으로 읽었다. ‘그리운 외뿔’ 그 뿔 하나를 얻을 것인가 둘 중 하나의 뿔을 버릴 것인가? 다음 시집이 기다려진다.
'이달균의 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3 나래시조 봄호 권두언 (0) | 2013.04.29 |
---|---|
김윤철 시집 『 너울가지 』해설..<결핍을 춤추는 생명의 제의祭儀 >-이달균 (0) | 2012.05.25 |
시각장애인 시 공모 당선작 심사평-이달균 (0) | 2011.08.23 |
시조 쓰기를 통한 세상 읽기 -2010 교원연수 강의록 (0) | 2011.08.18 |
시조 작법의 실제 - 2009 경남 교원연수강의록 (0) | 2011.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