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평론

시조 작법의 실제 - 2009 경남 교원연수강의록

이달균 2011. 8. 18. 13:19


      시조 작법의 실제

                                                                                  

                                                                                 2009 경남 교원연수강의록

 

                                                                                                               이달균

 

                                                                                             

 

1. 시조의 정체성


  시조의 정의에 대해서는 굳이 이글에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기로 한다. 그것만으로도 여러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작법의 실제를 통해서 이론에 접근하는 방법도 효율적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곧바로 시조창작의 실제에 대해 얘기하기로 하겠다.

  시조란 신재효의 시절가조(時節歌調)라는 말에서 왔는데 시절의 노래란 바로 <오늘의 노래>란 뜻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 내가 처한 현실’, 즉 ‘현대인의 사실적 서술’ 을 시화한 것이다.

   시조는 그동안 첨예한 당대의 얘기를 노래해 왔다. 이방원과 정몽주가 주고받은 ‘하여가’와 ‘단심가’가 가장 대표적이다. 한 세력은 군사 혁명으로 새 왕조건설을 획책 중이었고, 또 한 세력은 쓰러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온몸에 짊어지고 지켜내고자 했다. 권력과 이념을 대표하는 두 세력의 대표주자 간 목숨을 건 혈투가 이 시조 속에 담겨있다.

  뻗쳐오르는 조선혁명의 기운에 스러지는 왕조를 보며 야은 길재는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 어즈버 태평연월이 이뿐인가 하노라”라고 읊었다. 이들 시조들은 첨예한 정치성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매우 참여적 시조들이다. 참여시란 시대적 아픔을 함께하는 시이므로 가장 대중적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면 황진이의 사랑시, 정철과 진옥의 화답시 역시 대중적인 시조의 한 표본일라 할 것이다. 이처럼 시란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고 세기를 뛰어넘는다.


2. 현대시조, 현재를 노래하다.


  이렇게 시조는 700년을 고수해 왔다. 시조가 시절의 노래(시절가조)라면 21세기의 시조란 어떤 모습으로 쓰여 지는가. 먼저 사실성의 관점이 중요하다. 사실성의 생명은 우선 시대성과 현대적 감성을 잘 나타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확한 이미지를 차용하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대표적인 현대시조 두 편을 예로 들어 본다.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이우걸 <팽이>


 ②

천년 유랑아로 돌종 흔든 바람으로


유곽을 돌아오던 나는 지금 풍각쟁이


피묻은 역신의 뜰에


꽃을 심는 풍각쟁이


북창 문풍지처럼 우는 밤을 이고 앉아


달빛도 죽어버린 서울 어느 골목길을


암병실 간병인 같이


신발 끌며 가고 있다

 -김연동 <처용>


  ①은 팽이의 속성과 존재방식을 먼저 얘기 한다. 팽이는 오로지 매에 얻어맞을 때 비로소 그 존재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지개는 팽이가 돌면서 그려내는 무늬를 말한다. 그 무지개의 형상은 접시꽃을 닮았다. 팽이-매질-무지개-접시꽃이란 그림은 하나의 완벽한 이미지다.

  그러나 정작 이 시조가 말 하려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무지개라는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혹한 힘이 가해져야 한다. 팽이는 그 매질에 쓰러지지 않고 그럴수록 더 존재를 드러낸다. ‘증언’이란 시어는 바로 가혹한 매에 저항하는 몸짓 혹은 의지를 보여준다. 그 매질을 견뎌낸 힘이 비로소 접시꽃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접시꽃이 의미하는 것은 읽는 이의 느낌에 따라 달라진다. 시대적 억압을 견디는 민주의지이든 우리들 동심의 무지개이든 읽는 이의 몫으로 남겨진다. <님의 침묵>에서 님이 조국, 사랑, 동경 등등으로 읽혀지는 것과 유사하다. 중요한 것은 결코 옛 시절의 노래와는 전혀 다른 오늘의 얘기를 전하고 있다는 것에 유념해야 한다.


  ②는 천 년 전의 사내 처용을 현대에 끌고 왔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역신에게 겁탈 당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상처 입은 자다. 시인은 유곽을 돌아 나오다  풍각쟁이처럼 꽃을 심는다. 그것도 “피묻은 역신의 뜰에”다. 여기서 이 표현은 무엇을 은유하는가. 시대에 피를 뿌린 역신은 시대를 겁탈한 자들이다. 그 무서운 현실 앞에 시인은 그저 허랑한 풍각쟁이처럼 노래할 뿐이다. 정면으로 머리를 치받지 못하는 우리들 시대의 보편적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풍각쟁이다. 두 번째 수 역시 첫수처럼 상처받고 절망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저 “북창 문풍지처럼” 서럽게 울고, “암병실 간병인 같이” 체념의 쓸쓸함으로 “신발 끌며 가고 있다”고 노래한다. 과거의 신화 속 인물인 처용을 절망에 신음하는 현대인으로 치환시킨 것이 인상적이다. 


   인용한 두 편의 시는 전혀 다르면서 어떤 부분에선 동질성을 드러낸다. 우선 흔히 범하는 몰아와 영탄에 빠지지 않는다. 두 편 다 시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①은 동심의 것인 팽이를 소재로 했지만 저항의 의지를 드러내었고 ②는 상처 입은 남자 처용을 차용해 와 현대인의 절망을 그리고 있다. 시대성과 역사성을 밀도 있게 다룬 점이 공통적이다. 바로 현대시조가 지향해야 할 모범을 보여준다. 극단적인 구호에 매몰되지 않고 알맞은 소재를 통해 현재를 비유하는 표현은 새겨보아야 할 부분이다.


3. 서정의 실체


  그렇다면 현대적 서정성은 어떻게 표출될까? 다소 막연한 부분이지만 현대시조작법에서 중요한 부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전에는 서정을 “자기의 감정이나 정서를 그려 냄”이라 정의하고 있다. 자신의 감정이란 주관적인 서정을 뜻하는데, 시에서는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으로 담보해 내야 한다. 자신이 슬프다고 말하는 것을 독자들이 슬프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개그맨이 밤새 짜온 대사를 관객이 웃지 않으면 실패한 것이다. 이처럼 좋은 시는 나의 사랑을 함께 아파하고 보듬어 줄 수 있는 객관성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예문으로 접근해 보자.


 ①

사랑을 아는 바다에 노을이 지고 있다

애월.하고 부르면 명치끝이 저린 저녁

노을은 하고 싶은 말들 다 풀어놓고 있다

누군가에게 문득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벼랑과 먼 파도와 수평선이 이끌고 온

그 말을 다 받아 담은  편지를 전하고 싶다

애월은 달빛 가장자리. 사랑하는 바다

무장 서럽도록 뼈저린 이가 찾아와서

물결을 매만지는 일만 거듭하게 하고 있다

-이정환 <애월(涯月) 바다> 전문


② 

길이 새로 나면서 옛집도 길이 되었다


햇살 잘 들던 내 방으로 버스가 지나가고


채송화 붙어 피던 담 신호등이 기대 서 있다


옛집에 살던 나도 덩달아 길이 되었다


내 위로 아이들이 자전거를 끌며 가고


시간도 그 뒤를 따라 힘찬 페달을 돌린다

-강현덕 <길> 전문



①은 제주 애월바다를 지나며 시인의 시각에 포착된 심상과 풍경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냥 애월!하고 부르면 그 바다 위에 뜬 노을이 사랑을 아는 바다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시인이 그렇게 말하고 나니 읽는 이도 똑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은 자연스런 감정이입니다. 이 시는 섬세한 감정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애월, 한자 涯의 뜻풀이는 물가, 끝, 한계(限界), 근처(近處), 헤아리다, 가늠하다 등등인데, 이 글자 하나 만으로도 그냥 쓸쓸해지고, 두고 온 뭔가를 생각게 한다. 시인은 가슴에 묻어두고 무작정 바다 건너 왔지만 황혼은 붉은빛으로 이리 저리 구름을 휘감으며 할 말 못할 말들을 저리 쏟아내고 있다.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그저 “물결을 매만지는 일만 거듭” 한다. 그 무심함이 외려 아리다. 서정시의 한 표본처럼 읽힌다.


  ②는 곡진한 시간의 흔적이 묻어나는 시다. 바스러질 듯 섬세한 결을 만져보면 의외로 단단하다. 씨줄과 날줄이 고르게 직조되어 있고 물기마저 촉촉하게 머금었다. 그녀가 보여주는 시간의 속성을 한 마디로 말하긴 쉽지 않다. 초침에 단절되는 시간을 그려내기보다 벽에 걸어둔 낡고 잊혀 진 시계, 그래서 건전지도 다 닳아 속절없이 지나간 시간이 미안해서 문득 되돌아보게 하는 어느 오후 같은. 시가 곧 시인이라면 이즈음 그녀의 내면은 그런 분위기로 채워져 있다.

 

  두 편 다 지금의 나를 그리고 있지만 방식은 시간의 궤적을 따라간다. ①은 잊고 있었던 사랑을 이곳 이 시각에 우연히 만난다. 하지만 어쩌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잊자고 이곳에 왔던 길인지도 모른다. “무장 서럽도록 뼈저린 이”에겐 실은 구구절절 편지를 보내지 않은 것이 더 좋다. 그래서 그냥 “... 싶다”로 끝내고 있는 점에 눈길이 간다.  ②는 옛집이 길이 된 줄도 모르고 앞만 보며 살아 온 시인을 돌아본다. 무거워 보이는 의식을 시인은 가볍게 풀어낸다. 내 방 위로 버스가 지나가는 중압감을 “덩달아 길이 되었다”고 적는다. 서정성이 돋보이는 두 편의 시조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이런 여운이 있는 시가 좋다.


4. 인식의 문제

  


  시에서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어떤 영화처럼 거꾸로 물구나무서서 세상을 보여주기도 하고, 나이테 하나로 그 나무의 생장, 환경, 변화 등을 단면적으로 보여줄 수도 있다. 이런 표현들은 어떻게 세상을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천 실안바다를 돌아가는 해안의 놀은 멋지다. 연류교의 그림자와 어울린 죽방렴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이 죽방렴을 놓고 바라보는 인식 역시 천차만별일 수 있다. 아름답다, 낭만적이다 이런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생각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기실 그 속에 숨은 인간의 욕심을 찾아낼 때 비로소 새로운 인식에 닿을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죽방렴>이란 시에서 “고기들의 무덤”이라 표현했다.


봄비는 아편 묻은 하나씩의 실핀이다

일테면 또 그것은 실핀 끝의 전율이다

벙그는 꽃밭 언저리, 저 난만히 번지는 독성(毒性)

-박기섭 <꽃밭에서> 전문




꽃들이 영안실에 부동자세로 서 있다


목발에 의지한 덧없고 창백한 도열


언제나 벽을 등진 채 배경이 되고 만다


관계를 맺지 못한 死者와의 시든 동행


한번도 저를 위해 피고 지지 못했던


목 잘린 꽃들의 장례, 殉葬은 진행형이다 

-이달균 <근조화(謹弔花)>


  

①을 제대로 읽어내기란 다소 난해하다. 봄비와 실핀-실핀 끝의 전율-번지는 독성, 이런 등식으로만 읽기엔 한계가 있다. 여기 쓰인 시어들은 전부 비유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먼저 봄비의 속성을 이해 할 필요가 있다. 봄비는 기다림이다. 만물의 싹을 틔우기 위해 누구나 기다리는 임 같은 존재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환장할 기쁨’이 숨어있다. 그러나 ‘환장할 기쁨’이라고 표현하면 너무 직설적이므로 시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아편’이 등장한다. 하지만 봄비는 아편이다 이렇게 말할 순 없다. 아편 묻은 실핀이라 표현한다. 실핀은 내리면서 바로 흙 속에 박힌다. 여기서 시인이 본 봄비는 겨우 흙을 적실만큼의 여린 비다. 촉촉이 내리는 봄비는 개울물을 불릴 만큼의 강수량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말 가녀린 전율이다. 손끝의 촉수로만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미세한 떨림이다. 그 작은 환희로도 꽃들은 벙근다. 그게 바로 독성이다. 환장할 한 모금의 아편.


②는 영안실에 안치된 꽃들의 처참한 현실을 보여준다. 부동자세란 말이 을씨년스러움을 대변한다. 목발에 의지한 창백한 흰 국화들은 부동자세로 서 있다. 아름다움, 찬란함, 고운 떨림 등으로 생각되는 꽃의 본질과는 전혀 어긋난 형상이다. 비록 이름 없는 꽃일지라도 들녘에서 오롯이 피었다 지는 꽃이라면 한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죽음을 위해 벽을 등진 채 배경이 되어 묵묵히 서 있는 꽃이라면 차라리 꽃이 아니길 빌고 싶다. 바람을 견디고 스스로 핀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에 의해 재배되었다가 타인의 죽음을 위해 예정된 최후를 마감하는 꽃. 자신과는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죽음을 위해 목 잘린 꽃들은 결국 장례식을 위한 장식, 즉 현대판 순장에 불과하다. 바로 시인이 바라보는 인간과 꽃과의 상관관계를 낭만이란 커튼을 걷어내고 바라본다. 인간의 욕망 앞에선 꽃이건 또 다른 어떤 것이건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가혹한 인식을 드러낸다.


 이 시편들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봄비와 꽃을 조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감정도, 선인견도 배제하고 그저 시인의 눈에 보이는 이미지만으로 그려내고 있다. 과장도 영탄도 없다. 작법이라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사실성에 무게를 둘 뿐이다. 이처럼 새로운 인식은 낯설게 하기의 한 방편으로 알맞다.


  이상으로 현대시조 쓰기의 경향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였다. 이 네 경우는 서로 중복되기도 하므로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결국 한 편의 좋은 시조를 쓰기 위해서는 이들 조건이 서로 조화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좋은 시조는 결국 독자 입장에서 좋은 시의 요건을 갖춘 것을 말한다. 굳이 시조로 읽지 않더라도 충분히 감동이 있는 시라면 좋은 시조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짓기의 기본은 결국 읽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좋은 시조를 구해 많이 읽다보면 제대로 된 시조 한 편을 지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