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평론

김윤철 시집 『 너울가지 』해설..<결핍을 춤추는 생명의 제의祭儀 >-이달균

이달균 2012. 5. 25. 08:06

김윤철 시집 해설.


결핍을 춤추는 생명의 제의祭儀


이달균(시인)


1. 진정성의 시편들


 부귀와 은혜를 상징한다는 모란꽃이 벙그는 날 김윤철 시집 탈고본이 왔다. 5월의 나른한 오후, 80편에 가까운 그의 시조를 읽으며 모란과 그의 시조와의 미묘한 상관관계를 생각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모란과 선덕여왕의 이야기야 누구나 다 아는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어린 날 꽃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모란이 정말 향기 없는 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훗날 모란 역시 향기가 성한 꽃임을 알게 되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인지 나는 눈 감고도 모란의 향기를 구별할 줄 아는 정도가 되었다. 

  김윤철의 시조는 이름을 가리고 읽어도 단박 그의 작품임을 안다. 모두에게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그의 시들은 그렇게 읽힌다. 한 시인의 빛깔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된다면 그는 성공한 시인이다. 아니, 그 감정, 그 틀에 지나치게 충실하다면 일견 한계를 가진 시인으로 오인될 수도 있다. 사실주의 운동의 선구자 쿠르베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리지 않는다.”고 했다. 천사를 그려 달라고 했던 한 의뢰인에게 그는 “천사를 데려 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그의 사실주의적 경향을 알 수 있다. 김윤철의 작품이 후자가 갖는 한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분명 그는 자신의 빛깔을 가진 성공한 시인에 속한다고 믿고 싶다.

  시편 곳곳에 드러나는 참담함과 절망은 결코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다. 처절한 감정이든 극명한 이미지든 그의 작품 대부분은 삶이란 운명이 가져다 준 체험에 의해 일궈진 것들이다. 시인은 누구나 극적이거나 벼랑 위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한다. 그러나 대부분 시는 그렇게 쓰고 싶고 삶은 행복하길 원한다. 그런 아이러니는 상상력이란 무기를 만나 발현되는데 그때마다 진정성의 문제를 야기 시키곤 한다. 한 번도 헐벗어보지 않은 사람이 가난한 자의 고통을 얘기할 때 우리는 일단 의심의 눈초리를 겨누곤 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시집을 읽을 땐 그런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2. 고통의 체험에서 태어난 시.

                        

철책의 막사 밖엔 밤새워 눈이 내렸다                 

사금파리, 뼈 한 조각 허기로 움켜쥐고

쇠창에 목메어 우는 바람소릴 들었다


간밤에도 이름 모를 소녀 하나가 죽었다

들것에 눈을 털던 아카시아 잡목 숲

휘어진 눈꽃가지마다 노랑부리 새가 울었다


쇠 덫에 발목 묶인 아이 몇 뒤척이고

산 아래 민가에선 원생머리 하나에

밀가루 두 포대가 걸린 얘기들이 떠돌았다

-<영아원 일기>전문

 

     

합포만合浦灣 방파제 칸델라 붉은 밤에

눈먼 갯장어, 서툰 칼에 꽁지뿐인 놈을

참기름 막장에 찍어 허, 세상 이 맛이야


낮볕 한줌 들지 앉는 삼십 촉 처마 아래 

덜 자란 무릎 덮으며 도장이나 파는 목숨

한 세상 좇지 못해 우는 것이 너 하나뿐이더냐


너 떠난 가포 솔숲 올 봄도 푸르고

미늘 귀에 갯장어 지천으로 달려와

막장에 푹푹 장죽처럼 박힌다, 아우야!

-<아우에게>전문


 김윤철의 시조를 읽다보면 유난히 가족을 소재로 하는 것들이 많다. 대충 일별해 보아도, ‘수복이 누님’, ‘능소화’, ‘갈촌역’, ‘역마’, ‘경난이 고모’, ‘옛집’, ‘초상화’, ‘사주’, ‘젖어미’, ‘어머니와 잉어’등 시집 곳곳에 단절과 이별의 씨앗들이 뿌려져 있다. 그가 설정한 가족사의 정조는 슬프고도 애잔하다. 우리는 그로부터 어떤 정보도 듣지 못했으므로 오로지 시집 속의 시들을 통해 한 시인이 살았던 삶을 읽어낼 뿐이다.

 인용시 ①은 사회성 짙은 현실 고발시처럼 읽힐 수도 있으나 그의 상상력을 지나오면 고통스런 가족사의 한 페이지 혹은 흑백 사진첩 속 절망의 체험처럼 각인되곤 한다. 셋째 수 중․종장을 이룬 “산 아래 민가에선 원생머리 하나에/밀가루 두 포대가 걸린 얘기들이 떠돌았다” 에 이르면 최근 영아원의 현실을 고발하는 시는 분명 아니다. 이 구절은 단박에 폐허와 가난으로 인한 가족사로 점철된 50년대로 우릴 인도한다.  요즘에도 간혹 복지시설(영아원, 고아원, 요양원 등)이 비인도적 운영으로 사회면을 장식하기도 하지만 “쇠 덫에 발목 묶인 아이”란 표현에 눈길을 주면 현재의 것이 아님은 금방 알 수 있다. 그가 고아인지 그래서 영아원 생활을 했는지는 알 길 없으나 이 시집 전체를 흐르는 시인의 가족사는 화목과 희망은 강 건너 불빛처럼 요원해 보인다.

  인용시 ②는 그런 유년을 지나와 장년의 삶이 어떤 빛깔로 그려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시를 산문으로 풀어보면 마산 어느 곳에서 작은 가게를 얻어 삼십 촉 불을 밝히고 도장을 파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데, 가슴이 먹먹해지면 밤 방파제에 나와 갯장어와 한 잔 술에 취한다. 그리곤 떠나간 아우를 생각한다. 어떤 연유로 아우와 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멀리 칸델라 불빛을 보면서 기름장에 갯장어 찍어먹으며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허랑한 슬픔에 잠긴다.

 인용한 두 편의 시에 나타난 슬픈 가족사는 5․60년대를 지나오면서 부득이 짐질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이웃의 풍경화다. 그 고통은 잘 극복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으며 지금도 시인을 외롭게 하는 요인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슬픈 유년의 가족사는 얄팍한 언어의 유희에 매몰되지 않는 버팀목이며 시를 길어내는 동력이 되고 있다.


3. 시작詩作, 거듭남을 향한 제의祭儀


 위의 시들을 통해 유년에서 청년을 거쳐 장년으로 살아온 김윤철의 행로를 잠시 살펴보았다. 이제 시 속에 드러나는 그의 삶의 모습을 살펴볼 차례다.


  

음력 섣달 스무이레는 언양 설 대목장

첫새벽 채전머리 포장 없는 난전에 앉아

한 상에 이천 원하는 백반을 먹습니다

시래깃국 한 그릇에 채 나물무침 두 가지

갓 지은 흰 쌀밥을 고봉으로 퍼 담아주는

주름진 아낙의 손이 시리도록 유정합니다

이 없는 노파와 행상 노인이 비집고 앉은

남루한 밥상으로 고무함지 넘나들고

강냉이 튀기는 소리 먹먹한 그런 아침입니다

-<설 대목장>전문


더운 여름 냇가로 한 사내가 걸어왔다

흙먼지 투성이의, 먼 길을 걸어서 온

사내는 나뭇가지 위에 웃옷을 벗었다


백일홍 꽃잎 하나가 물위로 떨어졌다

사내가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는 동안

칼끝이 팔뚝 깊이 박힌 문신을 훔쳐보았다


넘어지면 밟고 가는 이승의 길모퉁이

등 돌린 세상을 향한 분노의 칼은 아닐까

그 마음 도려내고 푼 삭도削刀는 아닐까


발등을 간질이는 이 소리 없는 냇물도

저 계곡 어디쯤에선 큰 소리로 울었으리

물아래 어느 돌이건 상처 아닌 것이 없었다

-<단도短刀>전문


  내가 알기에 인용시 ①역시 상상력의 산물만은 아니다. 실제 그는 5일장을 따라 떠돌이 행상을 펼치기도 했고, 진주 개천예술제, 진해 군항제, 밀양 아랑제 등등 전국의 축제 마당을 찾아다니며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가 펼쳐내는 풍경은 감상적이거나 피상적이지 않다. 최고의 진실은 사실성을 바탕으로 할 때 잘 드러난다. 

  그가 바라본 언양 설대목장의 분위기 또한 그런 체험을 바탕으로 그려진다. 난전의 백반 한 그릇은 얼핏 보면 매우 인간적이다. 그러나 시인이 포착한 것은 그런 피상적인 따뜻함이 아니라 ‘시리도록 유정한’ 풍경일 뿐이다. 이는 김윤철이 아니면 읽어내기 힘든 심상이다. 일반적으로 설 대목장은 명절을 맞이하는 들뜬 마음들로 인해 파는 이와 사는 이가 부산스럽고, 카메라는 김이 나는 떡가래를 비추며 훈훈한 장면을 연출한다. 하지만 설날이래야 찾아볼 일가붙이도 없는 동병상련의 장사치들에겐 그런 훈훈함마저 마냥 즐거운 풍경이 아니라 알지 못할 먹먹한 아픔이 묻어나는 장날이기 때문이다. 

  ②에 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을 건너는 한 사내의 막연한 분노를 읽을 수 있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넘어지면 밟고 가는 이승”이며, 그 과정에서 “등 돌린 세상을 향한 분노의 칼”을 갖게 되었고, 필연적으로 “칼끝이 팔뚝 깊이 박힌 문신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흔적들은 씻어내어야 할 무엇이다. 오늘 이 씻음의 행위는 일종의 제의처럼 경건하다.

  유년과 청년기를 거치는 동안에도 그의 삶은 여유롭지 못했다. 가난의 굴레를 벗기 위해, 태생적으로 타고난 고독과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돌았지만 다시 그 것들에 의해 더욱 외로워지는 자신을 발견할 뿐이었다. 여수 앞바다 연도란 섬을 비롯한 국토 여러 곳을 몇 해째 옮겨 다니고 있고, 때로는 그런 운명을 온 몸으로 거부하기도 했고, 숙명이라며 체념하기도 했다. 이번 시집은 그런 운명을 고백하고 거듭나기 위한 것이다. 


 


4. 단아한 서정을 노래하다.


 위에서 살펴본 삶의 무게는 쉽게 내려놓기엔 너무 무거워 보인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외로움과 고독은 가장 김윤철 다운 빛깔이만 외려 이런 것들로 인해 독자들은 곤혹스럽기도 하다. 시란 이런 곤고함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유쾌한 언어의 놀이이며 사랑과 행복의 등가물이기도 한 까닭이다.

                        

삯바느질 노파가 며칠 전 죽었다네

                        

낯이 선 수양아들과 허청대는 술꾼도 몇

                        

북녘 땅 올려다 뵈는 질펀한 부두 난전

                        

늦가을 눈부신 옥양목 결을 따라

                        

바늘땀 하얗게 팬 재봉틀 소리로 가던

                        

바닷가 그 언덕 마을 차양도 낮은 집


-<아바이 마을에서> 전문


옷고름을 쥐고 잠든


오배자 잎이 하나


방 한 칸 마련되면


한걸음에 되 오마


재 넘다 뒤돌아보던


붉나무 등걸 하나

-<소한 소묘>전문


 인용시 ①은 김윤철 시조가 갖는 미학의 완결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직접적인 슬픔과 한을 조금 걷어내면 얼마든지 정제된 서정을 그려낼 수도 있다. 첫째 수는 특유의 음색으로 끝내 이산의 아픔을 해결하지 못하고 속울음을 울면서 이승을 하직한 삯바느질 노파를 얘기한다. 그러나 둘째 수에 이르면 한결 정제된 음성으로 노파와 작별한 어촌의 서경을 그려내는데, 안정되고 알맞은 운율은 한 편의 가작을 완성한다. 

  ②에선 거추장스러운 한을 벗고 시의 본령에 접근한다. 이 시 역시 비극적 정조를 바탕에 깔고 있지만 도처에서 드러나는 눈물과 고통의 빛깔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첫 시집은 대체로 축약보다는 군말과 사족이 많은데, 이는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은 까닭이다. 이 시집에서도 단수는 드문 편이다. 그러나 이 단아한 한 수를 대하고 나면 앞으로 얼마든지 잘 다듬어진 단수를 기대해도 되겠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5. 온 몸으로 쓰는 몸시詩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너 또한 내가 알던 마법의 네가 아니다

숙어진 갈볕으로나 무덤가로 번져갈 뿐 


나는 너를 모른다, 너도 나를 모른다 

파도를 잃고 누운 애옥한 바닷가    

나각螺角의 기억을 불면

너를 지나 왔다는 것

-<청춘>전문


  그에게도 질풍노도의 청춘이 있었다.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고 말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각을 부르며 옛 기억을 불러보아도 그저 그 시절을 지나왔을 뿐 극복하지는 못했는지도 모른다.

  남들처럼 함께하지 못한 가족사, 뿌리 없는 고향(인천 태생이라 했지만 그다지 추억할 것도 없는), 행복을 찾아 전전한 직업들, 무엇인가에 쫓기듯 이사를 다닌 역마살, 쉽게 정주고 정받지 못하는 외로움, 이런 여러 결핍의 요인들이 그를 시인이게 했다. 이 시인에게 시업은 또 하나의 이력이 아니라, 책망하고 위로받는 거울이며 동반자다.

김윤철의 시조집을 덮으면서 아직은 “충만한 사랑과 행복을 노래하라고 권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의 정체성은 바로 이런 결핍에서 오는 것이며, 그 결핍은 풍족함의 시대를 건너는 무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쓴 시인의 말은 80편의 시들보다 감동적이다.


  “ 일찍 부모를 잃는 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확신을 잃는다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하늘은 노랗다고 말한다면 나는 분명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버림받았다고 다 버려지는 것이 아니듯 불운하다고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팔다리가 없다면 몸으로 기어서라도 가는 것이 의지이다. 이 땅에 온몸으로 몸詩를 쓰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벗들에게 부족한 나의 글을 바친다.”


  그의 시는 온 몸으로 쓴 몸詩다. 때로는 둔탁하기도 하고, 눈물로 버무린 비빔밥 같기도 하다. 이 시집은 세상을 향한 외침이기보다는 세상 위에 발가벗은 채 자신을 드러내는 뜨거운 제의祭儀에 가깝다. 그러므로 메타포에 숨은 채 아름다워질 필요도 없는, 날 것 그대로의 노래이고 싶어 한다. 중요한 것은 한국시조단에 자신만의 개성을 한껏 드러낸 시조집 한 권이 추가되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그의 ‘더러운 그리움’까지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자가 세상에 어떻게 비춰지든 그건 그들의 몫일뿐이다. 그 이후의 노래는 다음에 듣기로 하자.

  김윤철의 제 2시집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