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문학 여행

또 다시 상처받는 용, 윤이상을 생각하며...

이달균 2011. 9. 1. 16:03

*통영 현대교회 방수열 목사는 "통영의 딸을 구하자"는 취지의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최근 주요 일간지에 호소문을 실어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방수열 목사는 통영 신숙자씨 모녀와 남편인 오길남의 입북에 윤이상 선생이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고 말한다.  "92년 윤이상은 요덕수용소에 갇힌 신씨와 두 딸의 사진과 녹음테이프를 들려주며 재입북 할 것을 다시 종용하고 듣지 않으면 처자식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신숙자씨의 남편인 오길남은 살아서 여러 말들을 하고 있고, 윤이상 선생은 고인이 되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통영예술인들은 서독의 ‘한인회보’에 보낸 “오길남 사건과 나”라는 윤이상 선생이 친필로 밝힌 글을 접하고 오길남의 말과 윤이상 선생의 말이 터무니 없이 다름을 알고, 어떤방식으로라도 이를 알려야 겠다는 생각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또 다시 상처받는 용, 윤이상을 생각하며...

 

오늘 우리 통영예술인들은 안타깝고 고통스러운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 선생에 대한 검증되지 않은 일방적인 주장으로 인해 고인이 된 한 예술가의 명예와 그의 고향인 예향 통영이 심대한 흠집을 입는 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어 이에 한 목소리로 진실을 알리고자 한다.

 

문제의 발단은 통영현대교회 방수열 담임목사가 조선일보 8월 12일자 26면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님께 드리는 호소문-통영의 딸을 구해주세요!”란 전면 광고를 실으면서부터 대중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여기서 말하는 ‘통영의 딸’은 북한수용소에 수감 중인 것으로 추정되는 오길남 씨의 부인과 딸을 말한다. 문제의 주인공인 오길남 씨는 자신의 말에 따르면 가족과 함께 월북하였다가 남한 출신 부부를 데려오라는 지령을 받고 독일로 가던 중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분단으로 인해 가족이 헤어지게 되었고, 그의 딸과 부인이 북한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는 사연은 많은 이들을 가슴 아프게 했고, 이들의 구출을 위한 서명운동에 나서게 했다. 그러나 이런 순수한 인간애 속에 감춰진 심각한 진실의 왜곡을 우리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길남은 “1992년 1월 작곡가 윤이상이 (나에게) 다시 월복하라고 회유하기 위해...”란 말과 “조국을 위해 경제학자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작곡가 윤이상의 제의를 믿고 아내 자녀와 함께 월북했다.”고 적고 있어 윤이상 선생의 월북권유가 사실인 양 오도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산자인 오길남의 말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지만 정작 윤이상 선생은 고인이 되어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만다행인 것은 당시 서독의 ‘한인회보’에 실은 “오길남 사건과 나”라는 윤이상 선생의 친필을 발견한 것이다. A4용지 3쪽 반 분량의 글에는 오길남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이 쓰여 있다.

 

“1986년 11월 어느 날 저녁에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 저는 오길남입니다. 이북에서 도망해 왔습니다.’ 하였다. 나는 그가 이북에 간지를 전혀 몰랐으며, 또 도망해 왔다는 사실도 보통 있는 일이 아니라 놀라서 물었다. 그럼 6개월 동안 어디에 있다가 지금 전화를 거느냐고 물으니 미국과 독일의 정보기관에 갇혀 조사를 받고 이제 나왔습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당황했다...선생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저 가족을 도와 주십시오 하고 탄원하면서 울었다. 그 후에 여러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수없이 걸려 왔으며 그 가족의 구출을 역설하였다...”

 

이후 선생은 그들을 데려오기 위해 무척 애썼다고 한다. 1990년 민족통일음악제를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24시간 의사와 간호사의 간병을 받으며 산소호흡기와 링거주사에 의지하며 잠깐씩 행사에 참석할 정도였지만 오길남 가족의 구출을 위해 백방 노력하였다.

 

그러나 북한에서 차관대우를 받은 오길남이었기에 구출은 쉽지 않았다. 결국 가족사진과 음성테이프를 구해왔는데, 가족의 애절한 목소리에도 태연히 히히득 거리며 ‘이제 가족 찾는 것을 단념하였습니다.’ 하길래 나는 호통 치면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며 쫓아내었다고 적고 있다.

 

우리는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오길남의 말에 심각한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드러난 몇 가지 문제점만으로도 진정성을 의심하게 된다.

 

그의 월북은 목적한 바를 실현하기 위한 의지의 결행이었다. 당시 그는 독일에서 유학하여 박사학위까지 받은 지성인이었으며 나이 마흔이 넘은 가장으로서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월북한 것이다. 이런 행위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 또한 86년 11월 탈북하라는 아내의 말에 따라 탈출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역시 가장의 책무를 소홀히 한 자신을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가족의 애절한 음성을 듣고도 태연했던 그가 이제 와서 선생의 꾐에 빠져 월북했다는 것은 수긍되지 않는다.

 

오길남 가족의 헤어짐은 그의 월북으로 인해 기인한 것이지 결코 윤이상 선생의 탓이 아니다. 선생의 월북권고에 대한 증거는 없으며 이는 일방적인 매도에 불과하다. 선생은 그 글에서 “나의 속임 없는 진실의 전부”라고 했다.

 

윤이상 선생 역시 분단이데올로기로 인해 비운의 생애를 살다 가셨다. 선생은 1967년 동베를린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고 독일로 귀화하여 끝내 조국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동베를린 사건은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에서 1967년 6월 8일 부정총선 규탄 시위를 잠재우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조국은 선생에게 슬픔을 주었지만 선생의 음악 속에는 절절한 조국애가 녹아있다.

 

우리는 이 일을 소모적인 진실게임으로 몰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역사 인물을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폄훼하고 재단하는 일을 종종 보아왔다. 그것도 선생의 고향 통영에서 발단된 것이 통탄할 일이다. 한낮의 태양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고 밤이 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선생이 작성한 ‘오길남 사건과 나’ 전문을 기꺼이 공개할 용의가 있다. 상처 입은 용 윤이상 선생에게 후대의 사람들이 또 다른 먹물로 덧칠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윤이상 선생을 생각하는 통영예술인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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