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업을 물려주지 못한 나는 죄인이요.
--빛나는 우리 전통공예 후대에 이어지기를...
이 달 균
전통공예전수관에 나전장(螺鈿匠) 송방웅(1995년 나전장 무형문화재 제10호 지정) 선생을 찾아갔을 때, 선생은 안경을 낮게 낀 채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엊그저께 통영홍보요원들이 이곳에 찾아와 직접 체험한 것들을 손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근래에 찾아온 손님 가운데서 가장 반가운 분들이란다.
“기왕이면 통영 공무원들이 이곳에 와서 통영을 대표하는 무형문화재인 나전칠기 체험도 하고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을 텐데...”하고 혼잣말을 하신다.
통영시에서는 지역 무형문화재의 특화산업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마침 중앙동과 문화동 일대 1만9천515㎡에 2013년 말까지 ‘통제영 거리’를 조성하고 있기도 하다. 통제영은 조선시대 경상ㆍ전라ㆍ충청 3도의 수군을 지휘하던 총사령부로 고종 32년(1895년) 폐영 될 때까지 292년간 존속됐으며 국보 305호 세병관을 제외하고는 일제 때 대부분 훼손됐다. 당시 통제영 앞에는 신발과 망건, 활, 화살촉, 갓, 가구, 금은제품 등 각종 군수품과 공예품을 통제영에 공급했던 12공방과 음식점 등이 들어서 있었다.
이 통제영거리조성과 통영문화재의 특화사업은 이름은 다르지만 목적은 하나다. 400년 전 삼도수군통제영이 이곳에 존재했었고, 그로인해 12공방의 나전장들이 생산한 나전칠기가 성행했다. 70년대만 해도 나전칠기의 관심이 고조되어 200여 군데의 공방에 2,000여 명의 나전장들이 있었다고 하니 과연 통영은 통제영 문화의 본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조교, 이수생, 장학생 등 맥을 잇는 전수자들이 거의 전무한 상태다. 이 통영을 대표하는 최고의 유무형문화재를 어떻게 계승하고 융성시키느냐는 비단 통영의 문제를 넘어 한국 전통공예의 과제다.
선생은 “결코 쉽지만은 않겠지요.”라고 말씀하신다. 그럴 것이다. 통제영 거리를 복원한다고 해서 역사의 복원이 어디 그리 쉬울 것이며, 이미 거의 명맥이 사라져 가는 12공방의 장인들이 대를 잇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데 어찌 수월할 것인가. 한 평생 이일을 해온 장인으로서 통영시의 행보에 누구보다 많은 생각을 갖고 계신다. 아마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자면 몇 날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다.
“만시지탄이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지요, 이 일에 관심 많은 현 시장이 있을 때 하지 않으면 그마저도 완전히 자취를 감출지도 모르니, 하긴 해야겠지요.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지. 대중이 즐길 수 있는 특화산업품은 그대로 발전시키고, 본래의 나전칠기들은 그대로 계승 발전시키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둘 다 죽고 말거요. 지혜가 필요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장인들과 시 공무원간에 긴밀한 교류가 있어야 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통영시민들의 전통공예에 대한 꺼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요.”
차라리 일제 때는 장인으로서의 예우를 받았단다. 당시의 나전장 개인에게 100엔의 임금이 주어졌고, 통영칠공주식회사(統營漆工株式會社)라는 회사도 설립되어 생산과 판매를 이루며 성업을 이뤘다고 한다. 1919년 설립된 통영칠공주식회사는 공장장 전성규에 의해 김봉룡, 송주안, 민종태 등을 배출한 중요한 회사였다.
1960년대에 와서 나전칠기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게 되는데, 여러 경로를 거치면서 명칭이 변경된다. 김봉룡은 전성규의 후예로 1966년 줄음질 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고, 1975년에는 신부길이 끊음질장(곡선) 무형문화재 제 54호로, 1979년에는 송주안이 끊음질장(직선) 제 54호로 지정받기에 이른다. 1995년 송방웅에 와서야 비로소 끊음질과 줄음질을 하나로 묶은 나전장 제 10호로 지정받게 된다. 송방웅은 송주안이 칠순에 얻은 아들이다.
선생은 남은 생애의 소원은 오직 한 가지, 통영의 자랑인 나전칠기의 융성을 보는 것, 아니 명맥을 계승할 후예들만이라도 끊기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라 한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찬탄한 우리 전통공예였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참담할 뿐이란다. 그 또한 우리가 진 짐이라고 스스로를 책망한다. 아파트 등으로 인해 서구식 가구가 주를 이루는 이유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기가 있던 70~80년대 많은 수요로 인해 기법의 완벽을 기하지 않고 대충 만들어 판 얼치기 장인들 탓도 크다고 한탄한다. 돈과 전통을 바꾼 벌을 받고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아버지의 대를 이었지만 불행히도 내 아들을 이 길로 인도하지 못하였소. 그 죄를 씻는 것은 이 빛나는 전통공예를 후대에 물려주는 것인데, 세상이 변하여 그 또한 그리 쉽지 않으니 늘 윗대에 빚지고 사는 기분이요. 우리 지역 특화산업도 잘 되고 전통공예도 훼손시키지 않는 묘안을 내어 꼭 성공시켜주소.”
맞잡은 손엔 굵은 힘줄이 돋아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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