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국립 3.15 묘지
이달균
국립 3.15묘지는 구암동 천주산 자락에 거대한 위용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민주화의 본산이며, 마산정신이 태동된 것이다. 현재의 모습으로 갖추어 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현재의 마산시 구암 1동 국립 3·15묘지는 2003년 3월에 준공되었다. 의거 7년이 지난 후 구암동 야산 3,960㎡(1,200평)에 12명의 희생자묘역이 생겨났다. 이후 1993년부터 시민의 뜻에 따라 본격적인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1998년 3월 총 부지면적 143,200㎡(43,390평)규모의 3·15성역공원 조성공사에 착공하게 된다. 2000년 12월에는 민주 열사들의 묘를 이장하여 묘역조성을 완공한다. 2002년 8월 1일 3·15성역공원에서 국립 3·15묘지로 승격되었으며, 2003년 3월 역사적인 준공식을 가졌다. 현재 안장된 묘비는 24기다.
먼저 애기봉에 오르면 넓은 주차장과 휴게소가 있다. 휴게소 맞은편 계단을 오르면‘민주의 문’이 보이고, 곧바로 참배단을 마주한다. 참배단 좌측엔 보훈청 사무실과 기념관이 있고, 우측엔 기념시비가 서 있다. 참배단 정면 위엔 유영봉안소와 3.15 영령 묘역이 있다.
유영봉안소는 3·15의거 정신을 함양하고 승화 계승시키는 공간으로, 3·15 의거 희생자들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명절과 3월14일에는 유족과 기관 단체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제를 올리는 곳이다.
또한 중요한 조형물 중 하나인 ‘정의의 벽’은 이 땅에 정의를 세운 그날의 애국· 희생정신과 저항· 투쟁의 현장을 부각시킨 역사의 장으로 민주의 횃불과 함께 3·15정신을 계승, 승화시키는 영원성의 공간을 상징한다.
기념 시비에 새겨진 시 한 편을 옮겨 본다.
「데모」도 끝났다.
등교한 날 아침 동무들은 풀이 죽어 있었다.
상학종이 울려도 자기는 그날 배를 앓아 누웠었노라 했다.
또 다른 아이는 시골에 있었다고 변명한다.
선생님은 흑판에 글만 쓰시는데,
군데군데 비인 책상과 걸상
딴 동무들은 머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에 붙어 앉은 나는
정원의 이파리와 그 이파리 위에 춤추는 바람을 보며
생각했다.
내 바로 옆자리의 눈이 큰 누이를 가졌던 동무를.
그리고
저 핏빛 장미꽃 위에 나부끼는 건 필시
「자유」일 거라고.
-조정남「피빛 장미꽃 위에 나부끼는 것」전문
이 시는 의거가 끝나고 등교한 교실의 분위기를 통해 당시를 보여준다. 거리에 나오지 못한 친구들은 부끄러워 누군 배를 앓았고 또 누군 시골에 가 있었다고 변명한다. 선생님도 마찬가지로 그저 흑판에 글만 쓰신다. 시인은 교정에 나부끼는 바람과 잎새 위에 빈자리의 친구 얼굴을 겹쳐본다. 장미는 왜 저리 붉을까. 붉은 장미 꽃잎과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떠나버린 그 친구가 외친 것은 ‘자유’란 한 마디가 아닐까 곰곰 생각한다.
이 시가 새겨진 우측 기념시비는 3.15의거를 시의 공간으로 조성한 조형물이다. 이 시비는 2001년 12월 27일 제막식을 가졌는데, 김춘수, 이석, 김세익, 정공채, 김용호, 김태홍, 이제하, 장하보, 정영태, 조정남 등 10인의 비분강개를 담은 시들로 조성되었다.
당시 실질적으로 시비 건립을 지휘한 변승기(3·15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역임) 시인은 “12면 중 10편을 새겨 2면을 남겨둔 이유는 3·15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유구한 것임을 의미하므로 나머지 2면은 미래의 시인들에 의해 채워질 것이다.”고 말한다.
그렇다. 진정 3·15는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감싸 안으면서 완성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진력하는 횃불이 되어야 한다.
'이달균의 문학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가을 전어 (0) | 2011.08.18 |
---|---|
마산 몽고정(夢古井) -이연현 (0) | 2011.08.18 |
공짜표 있습니까?-이 병 욱(서원대 교수. 작곡가) (0) | 2011.08.18 |
마산을 대표하는 서원 관해정(觀海亭) (0) | 2011.08.18 |
마산복국 거리에서 만나는 신비의 생선 - 복어 (0) | 2011.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