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벌레와 낙타의 시학
이정환(시인)
1
시가 너무 엄숙하거나, 난해하면 읽는 재미를 못 느끼게 된다. 읽고 또 읽고 싶은 시, 오래도록 뇌리에 새겨져서 그 이미지가 흐려지지 않는 시를 누구나 꿈꾼다.
이종문과 이달균은 그러한 시를 쓰고 있는 시인들이다. 뚜렷한 개성과 부단한 실험의식을 추동하는 점에서 늘 주목을 받아왔다. 무엇보다 이들의 장점은 새롭다는 것이다. 형식과 내용에서 기존의 어법을 뒤집는 시 세계를 탐색하고 육화한다. 또한 체험의 개성적인 형상화는 상상력과 결합하여 웅숭깊은 울림을 낳는다.
이제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서 살피자.
2
이종문의 시조는 독자로 하여금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일회성의 웃음이 아니다. 의미 있는 웃음이다. 그동안 우리 시조문단은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에 소홀 하였다. ‘상투적인 애국정신’과 ‘감동 없는 사랑 타령’, ‘깊이에 닿지 못한 내면의 문제’에 치중하다 보니 공감과 거리가 있었다. 시인 자신을 비롯하여 극히 일부분의 독자들에게만 한정되어 읽혀온 것이다.
그러나 이종문은 그것을 뛰어넘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재치와 기지, 풍자와 해학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한다. 족탈불급이다. 이것은 발상부터가 다른 데서 기인한다. 또한 생각에 말을 입히는 과정이 이채로운 것도 한몫을 보탠다. 이 역시 언어 운용의 묘미를 체득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봄날도 환한 봄날 자벌레 한 마리가 浩然亭 대청마루를 자질하며 건너간다
우주의 넓이가 문득, 궁금했던 모양이다
봄날도 환한 봄날 자벌레 한 마리가 浩然亭 대청마루를 자질하다 돌아온다
그런데, 왜 돌아오나
아마 다시 재나보다
-「봄날도 환한 봄날」
「봄날도 환한 봄날」이 보여주는 시 세계는 우주적이다. 어쩌면 이러한 시적 정황을 구성하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유발한다. 정교한 시적 장치로 말미암아 이 시편은 완결미를 보인다. 각 장의 종장이 보여주는 태연자약한 발언은 저절로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온몸으로 우주의 넓이를 되풀이 재는 과정을 눈여겨보면서 우리는 세계의 비의를 은연중 감지하게 된다.
‘봄날도 환한 봄날 자벌레 한 마리가 浩然亭 대청마루’를 자질하며 건너가는 정경은 참으로 평화롭다. 자신도 모르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게 된다. 그 순간 호연정 대청마루는 우주의 중심이 되고, 어느덧 자벌레가 된 우리 자신을 본다.
신축
공사장의
모닥불에 내리는 눈
그것이 불인 줄을 꿈에도 모른 채로,
무심코
내린다는 게
그만 거기
내리는
눈
신축
공사장의
모닥불에 내리는 눈
그것이 불인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어, 어, 어,
하는 사이에
피치 못해
내리는
눈
-「눈」
인생을 절묘하게 축약하여 보여주고 있다. 기막힌 설정이다. 반복의 묘미도 잘 살리고 있다. 이 시에 대해서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는 가운데 우리는 생의 의미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어떠해야 하는지를 진중하게 성찰하게 된다. ‘그것이 불인 줄을 꿈에도 모른 채’였거나, ‘그것이 불인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어, 어, 어,’ 하고 머뭇대는 사이에 ‘피치 못해’ 내리거나 간에 인생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흥남 철수 때다,
그 아비
그 규환 속
정원 쉰아홉에 만 사천을 태운 배가
사흘 뒤 거제 항구에
무사히 가 닿았다.
내릴 때 인원파악을
다시 해 보았더니
모두 만 사천다섯, 다섯이 더 많았다 한다.
그 사흘, 그 북새통 속
햇빛을 본
목숨
다섯!
-「그 배를 생각함」
「그 배를 생각함」은 흥남 철수 때의 급박한 정황을 간결하게 그리고 있다. 언뜻 보면 사실의 나열, 혹은 기사 같이 읽힌다. 그러나 눈여겨 읽으면 그렇지 않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개성적인 면모를 보인다. 몇 줄의 기사 같으면서 시가 되고 다시 보면 아주 오래 지난 일의 때늦은 보도기사 같다. 여기서 시인의 의중, 의도가 어렵지 않게 읽힌다.
아비규환의 피난길, ‘정원 쉰아홉에 만 사천을 태운 배’라니? 이것은 기적이다. 사흘 동안 침몰하지 않은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그 와중에 새 생명이 다섯이나 태어났다. 어머니 뱃속에 있던 목숨들이 ‘햇빛을 본’ 것이다. 얼마 전 이 때 태어난 사람들 중에 거제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이 특별 인터뷰한 것을 한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오랜 추적 끝에 아마 어렵사리 찾아낸 것이리라.
「그 배를 생각함」은 특별한 정황을 그리고 있지만, 사실의 진술에 그치지 않고 참으로 따뜻한 인간애를 그 배경으로 깔고 있어 눈물겹기까지 하다.
이종문 시조시학이 이룬 또 다른 한 경지이다.
味風寺
祖室 스님께
한 侍子가 물었지요.
스님요,
스님께선
바람 맛을 아시니껴?
알기는 내가 뭘 알어,
겨드랑이
털이
알지
-「겨드랑이 털이 알지」
또 한번의 절묘함을 구현하고 있는 시편이다. ‘바람 맛’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절은 무릎을 칠 ‘味風寺’이다. 시자가 조실 스님께 묻고 있다. 조실 스님은 바람 맛을 모른다고 한다. 천번 만번 맞는 말이다. ‘겨드랑이 털이 알지’가 보여주는 결구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소름끼칠 만한 발견이다.
이종문 시조시학은 이렇듯 개성적이다. 그 누구도 쉬이 범접 못할 한 경지를 열어 가고 있다. 앞으로 펼쳐질 세계를 느긋한 마음으로 지켜 볼 일이다.
3
이달균 시인은 지난해 사설시조집『말뚝이 가라사대』를 상재하여 화제의 중심에 선 바가 있다. 질펀한 늘어놓음의 미학은 민초들의 애환과 결집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고, 사설의 존재 의의를 크게 부각시켰다.
꽃들이 영안실에 부동자세로 서 있다
목발에 의지한 덧없고 창백한 도열
언제나 벽을 등진 채 배경이 되고 만다
관계를 맺지 못한 死者와의 시든 동행
한 번도 저를 위해 피고지지 못했던
목 잘린 꽃들의 장례, 殉葬은 진행형이다
-「근조화」
「근조화」는 예사로운 작품이 아니다. 참신한 착상과 더불어 치밀한 육화 과정이 두 수 안에서 유기적으로 직조되어 생과 사의 경계와 의미를 심화․확장시킨다. 영안실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는 꽃들을 두고 ‘목발에 의지한 덧없고 창백한 도열’이라고 규정한다. 화환의 나무다리를 두고 목발로 인지한 것은 인상적이다. ‘언제나 벽을 등진 채 배경이 되고’ 마는 ‘덧없고 창백한 도열’을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보아왔다. 중심이 되지 못하고 항시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근조화’의 모습에서 종내 시인은 ‘관계를 맺지 못한 死者와의 시든 동행’을 읽고, ‘한 번도 저를 위해 피고지지 못했던/ 목 잘린 꽃들의 장례’를 본다. 그리하여 언제나 ‘殉葬은 진행형’임을 깨닫게 된다.
이 시편을 거듭 읽으면서 시에서 ‘完璧’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곱씹게 된다.
전기가 나가자 빌딩이 깨어났다
우루루 비상구로 몰려나온 사람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비로소 이웃이 된다
누군 연속극에 한참 빠져 있었고
또 누군 컴퓨터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아무도 혼자가 아닌 홀로된 사람들
이윽고 전기가 오고 승강기가 움직이자
안도한 이웃들은 총총히 사라진다
적막의 커튼을 치고 우린 다시 타인이 된다.
-「뫼르소의 도시」
독신자 오피스텔이 보여주는 특이한 풍경이다. 시인은 둘째 수 종장에서 ‘아무도 혼자가 아닌 홀로된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뫼르소의 도시」에서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을 한 마디로 축약한 대목이다. 이러한 발견은 시인으로 하여금 부단히 시를 쓰게 하는 추동력이다. 아울러 이 구절은 현대인들의 삶을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이웃과 타인의 경계는 극히 미미하다.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정전이라는 상황 때문에 잠시 이웃이 된 이들이 그 상황이 종료되자 다시 타인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다. ‘안도한 이웃들’이 ‘총총히 사라진’쪽으로 ‘적막의 커튼’은 다시 쳐진다. 완벽한 타인으로 돌아간 것이다. 시인의 시각이 어떠하며, 얼마나 예민한 촉수로 그것을 집어내고 있는지 확연히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이 시편을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다.
등짐이 없어도 낙타는 걷는다
고색한 성채의 늙은 병사처럼
지워진 길 위의 생애 여정은 고단하다
생을 다 걸어가면 죽음이 시작될까
오래 걸은 사람들의 낯익은 몸내음
떠나온 것들은 모두 모래가 되어 스러진다
모래는 저 홀로 길을 내지 않는다
동방의 먼 별들이 서역에 와서 지면
바람의 여윈 입자들은 사막의 길을 만든다
낙타는 걸어서 죽음에 닿는다
삐걱이는 관절들 삭아서 모래가 되는
머나먼 지평의 나날 낙타는 걷는다
-「낙타」
「낙타」는 담담한 진술을 통하여 생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다. 끊임없이 걷고 걷는 낙타의 힘겨운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본다. ‘떠나온 것들은 모두 모래가 되어 스러’지고, ‘저 홀로 길을 내지 않는’ 모래는 ‘바람의 여윈 입자들’로 환치되어 ‘사막의 길을 만’들고 있다. 부지런한 보행 끝에 죽음에 닿는 낙타, ‘삐걱이는 관절들’마저도 삭아서 모래가 되는 소멸의 순간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렇기에 삶과 죽음 앞에 숙연해지면서 고단한 여정 길에 다시 옷깃을 여미게 된다.
또 하나 멸종생물로 네 이름을 기록한다
그 흔한 환경오염이나 지구온난화 탓이 아니라
자본의 이데올로기가 원인이라 적는다
쇠락한 농경사회의 밭이랑을 지키다
평생 옭죄던 코뚜레를 벗었지만
그것이 종말의 시작임을 어찌 알았으랴
내가 알던 의연한 이중섭의 뿔소나
얼룩백이 황소는 책속에만 존재할 뿐
난장의 싸움소들은 미친 광대가 되었다
이제 소는 없고 양질의 한우만 있다
도가니와, 양지머리, 우둔살과 차돌박이
거룩한 밥상의 보약, 꽃등심으로 피어난다
그 미각의 향연 속에서 작성한 멸종보고서
사라진 생명으로 너를 기록한 후
난 처음 과학자의 생애를 아프게 후회한다
-「멸종보고서」
「멸종보고서」에서 드러난 시인의 시각 역시 의미심장하다. 배면에 인류의 종언을 넌지시 깔고 있다. 투박한 어투로 이러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이럴 경우 언어 조탁은 시에서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시인은 소를 두고 ‘또 하나 멸종생물’로 규정한다. 원인은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탓이 아니라 ‘자본의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촌철살인의 발언이다. 아울러 ‘농경사회의 밭이랑’과 ‘평생 옭죄던 코뚜레’를 벗는 일이 ‘종말의 시작’임을 일깨우고 있다. ‘이중섭의 뿔소’, ‘얼룩백이 황소’의 기억은 간데없고, ‘미친 광대’가 된 싸움소로 전락한 현실이다.
그렇기에 ‘이제 소는 없고 양질의 한우만 있’는 것이다. 이 대목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쉽게 지나칠 말이 아니다. ‘거룩한 밥상의 보약’, ‘꽃등심으로 피어’나는 식욕의 첫 번째 대상인 된 것이다. 하여 마침내 ‘멸종보고서‘는 작성되고 사라진 생명으로 기록된다.
어찌하여 시인은 이러한 보고서를 다섯 수의 시조로 쓰게 된 것일까? 단순한 문명 폐해 고발로 볼 일이 아니다. 하나의 진지한 경종일 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상생의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라는 강력한 권고로 읽힌다.
이달균 시조시학의 면모는 이러하다. 우리 시조의 미래를 가늠하게 한다. 그 한 방향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다.
4
한 마리의 ‘자벌레’를 시의 전면에 등장시키는 일이나, ‘낙타’를 내세우는 일은 시인의 전략이다. 우리가 살핀 두 시인의 시편들은 그밖에도 ‘눈, 피난민, 바람’과 ‘근조화, 사람들, 소’를 주요 제재로 다룬다. 함께 면밀히 살펴보았듯이 여덟 편의 시편들은 각기 저마다의 특장을 지니면서 분명한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고, 미적 체화에 성공하고 있다.
그리하여 승화된 개성적인 시 세계는 불후를 담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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