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자 말뚝의 한마당 춤판
이정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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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시인의 입을 빌어 노래하고 있지만 <말뚝>은 예지자요 예언자적 인물이다. <말뚝>은 <천하고 못난 탈놀음의 어릿광대>로서 <청승 늘고 팔자 오그라든 벼룩> 같은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의 전면에 나섰다. 나서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그 어떤 밀어내지 못할 힘에 의해서 이 불구의 시대에 안으로 깊숙이 쌓아 오랜 날을 삭혀두었던 <할말>들을 작심하고 대명천지에 터뜨리게 된 것이 이달균 사설시조집『말뚝이 가라사대』이다. 약간은 고투적인 제목이지만 오히려 하고자 하는 말을 드러내기에 가장 적절하게 보인다. 서막 <광대들 납시오>에 이어 제1과장 <문둥북춤>, 제2과장 <오광대놀이>, 제3과장 <비비> 제4과장 <승무 과장>, 제5과장 <제밀주 과장>까지 다섯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탈 마당에서 <말뚝>은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막힌 가슴 뻥 뚫어줄> 어릿광대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야기 해보자. 시조문단에서 ‘말뚝’과 같은 존재가 시인 이달균이다. 재기가 넘치고, 좌중을 휘어잡는 언변과 활력이 강력한 자기장을 가지고 있다. 지난 90년대에 등장한 시인들 중에 그와 면모를 같이 할만한 인물로 이종문이 있고, 채천수가 있다. 90년대 초․중반에 이들이 등장함으로써 시조문단은 더욱 활기가 넘치게 되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조집 전편을 꿰뚫고 있는 <말뚝>의 이미지는 시인 이달균과 동일시되어 우리의 뇌리에 각인된다. 그가 이 어두운 시대에 진정 던지고 싶은 모든 생각과 할말이『말뚝이 가라사대』에 온축되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를 재담․풍자․조롱 등을 차용하여 10여년의 작업 끝에 <고성오광대>의 내용과 정신을 사설시조로 담아낸 것이다. 그러나 <고성오광대>의 연행 자체를 시조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이를 원용하여 <세상과 세태를 풍자하고 비판하면서 평화가 자리 잡는 대동세상을 꿈꾸는 시편>을 엮어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넌출대고 출렁거리는 사설시조 특유의 멋과 맛으로 신명나게 녹여내었다는 점에 문학적 가치와 의의가 있다.
이제 작품을 보자.
여보시오/ 소인놈/ 말뚝이 아뢰오// 들에 가면 나무말뚝, 옥에 가면 강철말뚝, 과수집엔 공이말뚝, 고런 말뚝이 아니오라, 언 가슴 녹이는 민심의 어사또 말뚝이라 불러 주오. 상전 잘 못 만나 분하고 억울하여 미치고 환장할 땐 지체 없이 기별하소. 내 이놈을 득달같이 쫓아가서 묵사발 만든 후에 자빠뜨리고 깔고 앉아 석 달 열흘 삭이고 썩힌 지독한 방귀 한 방을 콧구멍에 정조준하여 피시시식! 푸하아아…… 통쾌하고 고소하다// 갓끈도/ 풀어 버리고/ 반상 굴에 벗겨 놓고// 고쳐야 할 법 있거든/ 버꾸 들고 버꾸 치고/버꾸 치다 꼴리거든/벗고 치고 벗고 치고/냇강변/ 포강배미 허물 벗듯/ 활씬 벗고 놀아 보세
-「13. 나는 말뚝이로소이다」전문
입말의 미학이 펄펄 살아 움직인다. <말뚝>이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드러내 보인다. 용기 있는 <소인놈>인 까닭에 거침없이 할말을 풀어내고 있다. 세상에 아뢰는 <말뚝>의 말은 예사롭지가 않다. 이런 저런 <말뚝>이 아니라 <언 가슴 녹이는 민심의 어사또 말뚝>이다. 어려울 때 기별하기를 극구 요청한다. 부르면 득달같이 쫓아가서 해결하겠노라고 외친다. 갓끈이며 반상은 굴레일 뿐이다. 농악에 쓰이는 작은 북인 <버꾸> 들고 버꾸 쳐서 <고쳐야 할 법>을 손보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전이 있고, 신명이 있고,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렇듯 크게 한바탕 춤판을 벌이게 된 것은 바로 남다른 <신명> 때문이다.
망자여, 하직하고 이승을 넘어가자// 장가 못 가고 목메어 죽은 몽달귀신도 데려가고 ,죽으나 사나 측간에 사는 측간 귀신도 거두어 가자. 빡빡 얽어라 곰보딱지 마마귀신도 데불고 가면// 살아서/ 못 이룬 복록/ 저승에서 누리리라.
-「51. 진혼」전문
<작은어미> 발길질에 큰어미가 죽어가는 장면을 보며 읊조리는 노래로서 제5과장 <제밀주 과장> 끝부분에 나오는 레퀴엠이다. 이미 죽은 자는 이승에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한이 워낙 커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순례자의 인생길에 정말 통탄과 질고의 삶만 살다간 이들은 이 땅에서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들을 위한 진혼곡이기도 하다. 몽달귀신, 측간귀신, 마마귀신 그밖에도 많은 귀신들이 명부에서 영면을 하기 위해서는 <말뚝>의 레퀴엠을 들어야 한다. 아마 지금 듣고 있을 것이다. <살아서/ 못 이룬 복록/ 저승에서 누>릴 것을 희구하고 있다. 도무지 일생을 두고 풀리지 않던 일들을 다음 세상에 가서 마음껏 풀 것을, 풀어낼 것을 노래한다.
이 부박한 시대에 우리에게 기실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신명>이다. 신명 없이 어찌 이 거친 세파를 헤쳐 나갈 수 있겠는가? 지면 관계로「13. 나는 말뚝이로소이다」와「51. 진혼」두 편만 살폈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모든 것을 감지하게 된다.
2
우리나라는 연예인들의 세상, 연예인들의 천국이다. TV만 틀면 언제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특정 연예인들이 화면을 가득히 채운다. 웃음과 쉼을 주기도 하지만, 생산성보다 소비일변도인 것이 대부분이다. 한 마디로 진지함의 결핍, 그리고 허접스러운 잡담이나 오락만을 위한 오락이 태반이다. 진정 국민의 혈세를 이렇게 낭비해도 되는 일일까?
정부는 국민들의 정서적 순화와 풍요로움을 위한 교육에 매우 소홀하다. 정신적인 윤택함, 부유함을 위한 정책이 아주 미흡하다. 좋은 시조작품들을 초․중․고등학교 국어 교육과정에 크게 반영하고 창작의 실제를 수록하여 가르치고 향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가 경제 발전도 중요하지만, 그에 걸맞은 문화 정책이 세부적으로 세워져 함께 견인되는 사회가 되어야 실질적인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번 이달균의 사설시조집『말뚝이 가라사대』는 아주 의미심장한 작업이다. 질펀한 사설시조가 시조의 미학적 활로의 확장과 변주에 일정 부분 그 몫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효능을 내장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말뚝이 가라사대』를 통해서 여실히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왜 우리 가락인가, 왜 이 시대에도 시조인가?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말뚝>은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해내면서 아울러 세상을 향해 확신에 찬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이 신명나는 한 마당 탈 춤판에 뛰어들어 우리도 함께 어깨 들썩거리며 어우러져서 한 바탕 거방지게 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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