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을 읽다

생의 본질적 형식에 대한 응시와 참여 -유성호

이달균 2011. 8. 18. 10:34

생의 본질적 형식에 대한 응시와 참여

이달균의 신작시들


유성호(문학평론가․한국교원대 교수)



  1.


  우리의 시 형식 중 가장 외적 강제 규정을 많이 받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현대시조일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 민족 시형이 거의 사멸되거나 다른 장르로 흡수되어 버린 것에 비해, 시조는 여전히 우리 민족문학의 장자(長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도 변함없는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조에 가해지는 ‘정형’이라는 강제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조가 민족 고유의 정신을 담고 드러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양식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과거의 고시조들이 유교 이념의 계몽이나 소박한 자연 친화적 경향을 드러내는 데 골몰한 것에 비해, 현대시조는 시적 주체와 대상 사이에 나타나는 다양하고도 섬세한 무늬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성’과 ‘전통성’을 잘 결합시킬 수 있는 생산적인 장르로 고쳐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시조를 정형의 율격에 안정된 시상을 담는 전통적 시가 양식으로 인식하는 관행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조는 정격(正格)의 형식을 갖추는 것이 가장 안정되어 보이고, 전통적 정서로부터의 파격(破格)을 꾀하는 해체 지향의 언어들은 다소 불편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시조 미학은 그동안 사물과의 불화보다는 화해, 새로운 것의 발견보다는 익숙한 것의 재확인, 갈등의 지속보다는 통합과 치유 쪽으로 무게중심을 할애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처럼 단순성이 아닌 다양성의 시대, 서정의 일원성보다는 아이러니의 복합성이 미학적 주류로 기능하는 시대에 전통적 형식인 시조가 갖는 한계는 비교적 뚜렷한 편이다. 다시 말하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에 비추어 볼 때, 다양성과 복합성으로 상징되는 현대성의 징후들을 정형의 양식에 담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 한계를 노정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창작되는 현대시조들은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면서 적극적으로 정형의 양식을 확산하고 변형하는 동시에, 거기에 일원적 화해보다는 다양한 삶의 모순과 갈등과 고통을 담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이달균 시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때, 우리는 이 시인이 정형의 양식을 탄력있게 유지하고 변형하면서, 생의 본질적 형식에 대한 풍부한 탐색과 응시 그리고 참여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글은 이러한 관찰의 결과로 씌어진다.



  2.


  이번에 발표된 이달균 시인의 신작시편들은 시조문학의 본령인 정형의 형식을 충실하게 유지, 확산시키면서 우리의 생의 본질적 형식을 응시하고 그 안에서 삶의 종요로운 비의(秘意)를 발견하는 시인의 눈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달균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는, 객관적 풍경으로만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주체와 대상이 적극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관철하는 복합성의 세계이다. 다음 작품은 그의 자기 인식이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함을 알려주는 사례이다.


오늘도 한 사람과 등지고 왔습니다


슬픔을 나눠지라던 소명을 거역하고


냉정히 등만 보인 채 돌아온 내가 미워집니다


― 「등(背)」 전문


  대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등’을 내보이는 것은, 이별과 괴리 혹은 배신과 서운함을 내포한다. 그런데 시인은 어떤 한 사람과 “등지고 왔”다고 말한다. 시인으로 출발할 때 “슬픔을 나눠지라던 소명”까지 몸 안에 깊숙이 각인한 터에, “냉정히 등만 보인 채 돌아온” 사실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책감과 자기 혐오를 동시에 일으킨다. 그것은 곧 ‘등’을 보이며 대상과 냉정하게 헤어진 귀착 사유를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는 반성적 사유의 일단이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지극한 소품(小品)이지만, 시인의 섬세한 자기 인식을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러한 자기 성찰의 시선은, 언뜻 보면 인간들 사이에 개재하는 메마른 관계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기저에는 그러한 ‘관계’를 복원하여 인간들 사이에 화평한 관계가 이루어지기를 원망(願望)하는 시인의 마음 자세가 깔려 있다.

 

  그 점에서 같이 발표된 「자일리톨 껌」이라는 작품은 시인의 이 같은 관계 지향의 태도가 우화적으로 착색된 시편이다. 모두 네 연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시인은 인간들 사이에는 서로 ‘경계’하는 마음과 ‘공생’의 불가피성이 모순적으로 공존할 수밖에 없음을 노래한다. “인간을 경계하라고” 말씀해주신 어른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친구라고 믿었”다는 시인의 믿음은 사실 서로 배치되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 이것들이 우리의 생의 형식을 이루는 두 가지 가능성 곧 “악어와 악어새처럼 다정히 공생하는” 관계의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칫솔질”과 “음식”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갑자기 “먹어봐, 자일리톨이야, 새로 나온 식량이지”라는 음성이 들려온다. 이어서 그것은 “향그런 과즙향에 행복해 죽겠다고?/사실 이건 먹을수록 죽음에 다가가지/넌 지금 맛있게 굶어죽는 마술에 걸린 거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자일리톨을 권하는 목소리는 그 자일리톨이 ‘식량’이자 ‘굶어죽는 마술’이라는 것을 내비친다. 이처럼 ‘삶’의 유혹과 ‘죽음’의 가능성을 동시에 잉태한 ‘자일리톨 껌’을 두고 시인은 “그저 외로워서 의지하고 싶었는데....../잠이 와/고엽제 맞은 듯/하염없이 잠이 와”라면서 죽음과 삶, 적과 동지, ‘경계’와 ‘공생’이 모순적으로 얽혀 있는 우리 생의 형식을 우화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이고 우화적인 접근을 보여준 또 다른 작품은 다음에 이어진다.


개들은 짖지 않고 꽃 또한 지지 않는다.

견습의(見習醫)들은 책처럼 모로 서서 잠들고

잠깐씩 타인의 잠을 빌려 탈수된 꿈을 꾼다


실어증 앓고 있는 앙증스런 애견들과

플라스틱 장미향을 사랑하는 간호사들

병동은 평화로웠고 응급환자는 없었다


― 「뫼르소의 도시 2」 전문


  “개들은 짖지 않고 꽃 또한 지지 않는” 불모와 비정의 도시가 바로 “뫼르소의 도시”이다. 알베르 까뮈의 단편 「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는 그 자체로 인간의 욕망과 이성, 상황과 의지 사이의 모순을 잘 드러내준 고전적 사례에 속한다. 그 ‘뫼르소’의 도시에서 “견습의(見習醫)들은 책처럼 모로 서서 잠들고/잠깐씩 타인의 잠을 빌려 탈수된 꿈을” 꿀 뿐이다. 이 “탈수된 꿈”은 곧바로 야성의 개와 꽃 대신에 “실어증 앓고 있는 앙증스런 애견들과/플라스틱 장미향을 사랑하는 간호사들”을 불러오고 결국은 “평화”롭고 “응급환자”도 없는 역설적 평화의 도시를 이룬다. 그래서 시인의 시선은 생명이 사라진 자동화된 우리의 거짓 평화를 드러내면서, 참된 관계의 회복을 통해 생의 본질적 형식을 복원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달균 시인은 우리 안에서 왜곡된 ‘관계’를 다시 복원하면서, 그 복원된 ‘관계’가 우리 생의 형식을 온전히 이룰 것임을 말한다. 그 세계를 단단히 응시하면서 그 안으로 적극 참여해 들어가는 언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


  이어서 시인은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과 관찰을 통해 생의 또 다른 본질적 형식에 대해 탐구해 들어간다. 장형화된 작품들 속에 이는 잘 나타나는데, 특히 태풍의 내습과 그로 인한 막대한 피해 상황을 목도한 결과로 씌어진 「新 처용, 진혼굿 - 2003년 마산, 태풍 매미가 오다」가 그 예이다. 그 상황을 시인은 ‘예언자’가 떠나고 ‘의사’는 사망선고를 내리자 ‘바다’는 조롱받고 망각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인은 “유난히 비 내리고 매미들 울어쌓던/그해 그 여름밤, 매몰된 기억을 뚫고/바다는 그예 질풍노도 도시로 밀려왔다”고 그리고 “그리운 이름들의 안부가 궁금하여/밀물로 찾아온 옛집 마당을 차올라서/살아서 귀신이 되었다고 처용처럼 춤을 춘다”고 노래한다. 그 처용이 추는 춤이 굿의 현장감으로 이어지면서(시조 안에서는 운율의 율동감으로 살아나면서) 마지막 수의 절정을 불러온다.


어허야 어화넘자 바다 위로 황급히 길을 내고 집을 지어

기꺼워라 맛난 밥상 돛대로 세운 십자가 안녕한지 어디보자


뭍으로 지붕 위로 배들을 밀어올려 살아서 박제된

서럽고 시든 영혼 씻어라 어허야 달구 우릴 외려 진혼한다


― 「新 처용, 진혼굿 - 2003년 마산, 태풍 매미가 오다」 중에서


  이 장면은 올 여름 남해안을 덮친 태풍 피해에 대해 시적 언어로 진혼굿을 하고 있는 부분이다. 시인은 정형의 확대와 부분 파격의 도입을 통하여, 처용의 목소리처럼 “뭍으로 지붕 위로 배들을 밀어올려 살아서 박제된/서럽고 시든 영혼 씻어라 어허야 달구 우릴 외려 진혼한다”라고 노래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자들이 진혼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굿의 한복판에서 어느새 우리가 진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우릴 외려 진혼”하는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주객간의 호환(互換)적 관계를 중시한 시인의 태도가 깊이 반영된 결과라 할 것이다. 결국 시인은 자신이 최근 가장 구체적으로 겪은 체험과 관찰을 통해 생의 또 다른 본질적 형식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발 없는 바람이 와 절해고도에 갇혔노라고

끊어졌다 이어지는 교신음 탓하지 마라

한 며칠 파도가 높다고 떠나보낼 바다였더냐


몇 날을 섬 하나가 물안개에 덮이고

라면마저 떨어진 구판장 불빛 꺼져도

항구는 제 먼저 적막하여 닻을 놓지 않는다


먼저 온 물살들이 등 구부려 길을 내면

나중 온 뒷 물결이 무등타고 넘는다

그렇다 파도에게도 질러오는 길은 없다


초저녁 별이 어찌 새벽을 밝힐 것인가

그들도 길을 잃으면 별똥별이 되는 것을

바다는 낮술 젖은 이에게 기다림을 배워준다


― 「그 섬에서의 며칠」 전문


  이 작품에서도 시인이 행하는 생의 형식의 발견이 이어진다. 시인은 어느 ‘섬’에서 며칠 간을 보내면서 거기서 마주친 여러 풍경들을 채록한다. 물론 그 풍경은 일차적으로는 자연의 외관이겠지만, 곧바로 시인의 내면적 상관물이 되기도 한다.

 

  “발 없는 바람이 와 절해고도에” 갇힌 “몇 날을 섬 하나가 물안개에 덮이고/라면마저 떨어진 구판장 불빛 꺼”져버린 상황 속에 시인은 있었다. 그러나 “항구는 제 먼저 적막하여 닻을 놓지 않는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닻을 놓지 않는 ‘항구’나, 질러오지 않는 ‘파도’나, 새벽과는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초저녁 별’이나 모두 마찬가지로 관계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시인의 내면이 투사된 자연 사물들이 아닐 수 없다. 이때 시인은 그들을 통해 “먼저 온 물살들이 등 구부려 길을 내면/나중 온 뒷 물결이 무등타고 넘는다”는 이치, 그리고 “초저녁 별이 어찌 새벽을 밝힐 것인가/그들도 길을 잃으면 별똥별이 되는 것을” 같은 지혜에 도달한다. 그것은 야생적인 자연의 언어를 통해 지극한 깨달음에 이르는 곧 “바다는 낮술 젖은 이에게 기다림을 배워”주는 형식을 이룬다. 그래서 이달균 시인에게서는 “새로운 야생의 언어가 수혈”(이우걸)되고 있다는 지적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달균 시학을 이루는 커다란 기저는 사물과의 관계 형식을 통해 혹은 그 관계의 복원을 통해 생의 형식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선은 그동안 그가 보여온 시세계와 이어지면서 그의 시세계를 강렬한 희망보다는 생의 비극성에 눈뜨게 하고, 신생하는 것들의 역동성보다는 저물어가는 것들의 눈부심을 기록하는 시인적 태도를 불러왔다. 그가 대표시선으로 제시한 다음 작품!


그래도 나는 쓰네 손가락을 구부려

떠나는 노래들을 부르고 불러모아


저무는 가내공업 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


― 「저무는 가내공업 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 전문


  소멸되어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그것에 대해 동류의식을 느끼는 시인의 예지는 단순한 시재(詩材)를 넘어 생의 본질적 형식에 육박한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그래도 나는 쓰네 손가락을 구부려/떠나는 노래들을 부르고 불러모아//저무는 가내공업 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라는 짧은 고백 속에서, 시인으로서의 실존과 의지와 절망과 우수를 다 드러내고 있다. 이때 그는 요설과 파격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시의 언어가 아니라 장형의 형식으로 이 같은 고백을 단아하게 완성하고 있다. 여기서 “저무는 가내공업”이란 소멸과 사라짐의 운명을 응시하면서 시를 쓰는 자신의 남루하면서도 눈부신 영혼을 들여다본 이만이 가능한 언어가 아닐까 한다.

 

  이처럼 소멸되어가는 것들의 이미지를 통해 생의 본질적 형식에 가 닿으려는 시인의 의지는, 그의 다른 대표시에 나타나는 이미지 역시 소진과 퇴색의 흔적으로 채색하고 있다. “고색한 성채의 늙은 병사처럼/지워진 길 위의 생애 여정은 고단하다”(「낙타」)는 표현이나 “몸은 자꾸 바스라져 아래로 흘러내린다”(「모래늪」), “하얗게 녹슨 생각들이 부서져 쌓이는 밤/뜨거운 피를 흘리며 깊은 잠에 들고 싶다”(「북어」) 같은 표현 속에 그 일관된 속성이 깊이 드러나 있다. 이것은 일찍이 “나는 랩시를 쓰지 못한다”(「나는 랩시를 쓰지 못한다」, ������북행열차를 타고������, 태학사, 2001)라고 했던 시인의 고전주의적 자기 확인의 태도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4.


  그동안 우리의 교양 체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고시조들은 ‘자연’을 이상적 형식으로 추구하였고 성리학적 이념에 충실한 주제들을 형상화해온 경우들이 특히 많았다. 말하자면 고시조의 화자와 청자는 입장을 달리해 미적 균열을 일으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현대시조는 자연을 이상적으로 취급하지도 않고, 그 안에 주체와 대상에 겪는 오랜 불화와 갈등의 언어를 담아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회의 복합적 특성과 시조의 안정적이고 화해로운 양식적 특성을 고통스럽게 결합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시조의 언어를 우리가 견지하는 한, 율격적 정형은 섬세하게 지켜져야 한다. 시조를 쓰면서 시조 고유의 선험적 율격을 해체하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 모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 시조의 새로운 미학적 활로는, 말할 것도 없이, 이 같은 전통적 형식과 현대적 감각을 결합하여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다가서는 데 달려 있다.

  이 점에서 이달균 시인이 추구하고 있는 시세계는 매우 우리에게 시사적이다. 일단 그는 율격의 단단함을 버리지 않는다. 시조 율격을 유지, 확산하면서 시조가 아니면 안 되는 율격적 정체성을 잘 지켜가고 있다. 게다가 그는 시조 안에 현대인의 절망과 꿈, 우수와 비극성을 담고 있다. 소진되어가는 것들에 대한 한없는 애정으로 우리 생을 이루는 여러 비극적 형식들에 대해 응시하고 참여한다. 결코 국외자적 관찰로 머물지 않는 그의 적극적인 태도가 그의 시가 보여주는 비극성을 더 미덥게 하고 있다. 그 세계에 우리도 참여하여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