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여, 각을 세워라
이달균
둥글게 사는 일이 편안하다. 적당히 치켜세우고, 적당히 덕담 하고, 또 적당히 거리를 가지면 적이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단 한사람에게도 신뢰를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완전함이란 없다. 시란 더욱 그러하다. 아름다운 시어들만 버무려 삶의 관조, 성찰만 얘기한다면 과연 시일 수 있을까. 물론 시가 충(忠)을 말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때가 있었다. 반대로 벼슬도 파당도 싫다고 안빈낙도 하며 여생을 보낸 이들의 음풍농월도 그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충은 당대의 이념이었지만, 한양을 바라보지 않는 음풍농월은 일견 첨예한 재야적 발언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시는 무엇인가. 전 국민이 시인인 시대에 시는 어떻게 기능하는가. 웬만한 대학마다 문창과가 있고, 기관 혹은 문화단체마다 시창작교실이 있다. 경쟁적으로 문인이 되려한다. 저명 문인들은 신인을 뽑고 심사평을 써야 한다. 권력을 행사하기도 바빠졌다. 주례사 비평을 욕하면서도 자신도 버젓이 같은 행위를 한다.
시인들은 슬그머니 견고한 시의 틀 속에 자신을 가둬두려 한다. 그런 편안함에 익숙해진다. 편집자들의 청탁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잘못하면 열차에서 내려와야 한다. 잊힐지도 모른다. 그런 강박관념은 슬그머니 빵틀을 준비하게 한다. 관계 유지를 위한 적당한 타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연히 각이 생길 리 만무하다. 둥근 삶에 길들여지면 날카로운 각은 생겨나지 않는다. 문단의 레일에서 내려와 시인으로 돌아가야 한다. 더 외롭고 차가워지자.
시조에게 돋보기를 들이대 본다. 역시 아직도 다정(多情)이 병이다. 넘치는 서정이라면 사양하고 싶다.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넣고 뺄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시조는 없는가. 이럴 땐 꼭 ‘형식’ 탓을 한다. 권투는 룰과 링이 있기에 성립된다. 테크닉과 펀치의 강약에 따라 승부가 결정 난다. 결코 링 탓이 아니다. 지배할 것인가 지배당할 것인가는 준비된 시인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척도다.
신인에게 시선을 주어본다. 신인에겐 아직 얽힌 인연이 적고, 습작기 동안 펼쳐 보이고 싶은 욕망이 남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서정과 현실≫2005 하반기 호에는 올해 신춘문예로 등단한 두 시인의 신작이 실렸다. 신춘문예는 한해의 시작을 고고성으로 열어젖히는 신인들의 등용문이다. 아직 자신의 그릇을 빚을 정도는 아니지만 시인이 가진 빛깔, 진폭 등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먼저 동아일보로 나온 이석구 시인의 시조를 보기로 하자. “등 굽은 산골짜기/ 나무기둥에 걸린 나는/ 앉은 자리 무릎걸음/ 부리를 두드린다/ 관절염 시린 발가락/ 오기로 중심잡고”- ‘그 숲에 까막딱따구리’ 부분. 이 시는 우선 표현의 일관성이 지적된다. 나는 지금 나무기둥에 걸려 있는데 앉은 자리에서 무릎걸음으로 부리를 두드린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걸린’과 ‘앉은’은 중복된다. ‘나무기둥’은 ‘나뭇가지’의 오기로 보인다. 또한 가지에서 “무릎걸음으로 걷는다”고 하면 될 것을 “나무기둥에 걸려, 앉은 자리에서 무릎걸음으로 걷는다”고 표현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부자연한 표현은 바로 음보를 자연스럽게 조율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시어 선택의 치밀성이 간과된 탓이다.
함께 실린 정선주(중앙일보)의 시 ‘금산 가는 길’은 비교적 안정되게 읽힌다. ‘십 년 만에 연락 닿은 친구’를 만나는 일이 쉽지 않듯이 길도 헤맨다. 목적지를 찾지 못해도 햇살이 좋고 맘도 가볍다. 길이 어디 하나뿐이던가. “가슴에 길 만들어 가는” 동안 “꽃잎도 날 위한 그늘 흩뿌려 놓겠지”라며 짐짓 여유를 부린다. 생각을 끌고 와서 연시조로 풀어내는 힘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시에도 쉽게 문제점이 드러난다. “십 년 만에 연락 닿은 친구에게 가는 길/ 다 가서 헤매어 다른 길로 들어섰다/ 산내길 비포장 도로 플라타너스터널.” 첫 수 3장 가운데 ‘길’이란 말이 세 번 연속 나온다. 4수 전체와 제목과 부제를 포함하면 아홉 번이 중복된다. 시조의 묘미는 뭐니뭐니 해도 말 줄임이 아닌가. 언어의 홍수 속에서 시조의 존재 이유가 절제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신인들에게 오류는 늘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인다운 상상력과 패기의 부족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이석구 시인은 시가 발효되기 전에 먼저 깨침을 얻는다. 이런 식의 발상은 우리 시단에서 너무 익히 보아온 것들이다. “몸뚱이 꼿꼿하게/ 면벽하듯 매달리면/ 삼계의 마음에는/ 닫아도 들리는 귀/ 숨소리 순간에 터져/ 바람구멍 열린다.” 어쩌면 이 시조는 시로서는 존재하지만 감동을 얻기엔 역부족이 아닐까. 우리는 너무 쉽게 화엄을 말하고 적멸에 이른다. 시의 면벽을 통해 삼계를 체험하였다니. 치열한 자기반성의 몸짓도 없이 삼계를 말하고 통함을 얻는다면 시는 공허해진다. 닫아도 들리는 귀를 갖는 것은 얼마나 먼 수행 끝에 얻어지는 것인가. 거대한 언어는 자칫 함몰의 위험을 초래한다.
정선주 시인의 얘기도 너무 뻔하다. 조금만 시를 읽은 이라면 첫 수를 보고 바로 다음수를 짐작한다. 너무 쉽게 읽히는 결말은 이미 상상이 아니다. 신인이라면 다소 미흡하지만 바늘 끝으로 찔러오는 상상력 정도는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스쳐 지나기만해도 피가 나는 날카로움에 상처입고 싶다.
불두덩이 걸터앉아 세상을 뒤집는다
거북한 시선에도 이 악물고 참아내다
뻥이요!
놀란 가슴에
게워내는 흰 꽃들
-이원식 <어떤 해탈> 전문.『열린시학』2005 여름.
이 시조 역시 ‘해탈’을 노래한다. 하지만 제대로 짜여진 구도에 의해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다. 튀밥 기계 속에서 쌀알들이 하얀 꽃들로 튀어나오는 모습을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다. 굳이 튀밥이라 하지 않고 해탈이라 이름붙인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중장은 좀 아쉽다. “거북한 시선에도 이 악물고 참아내다”는 표현은 그저 진술에 불과하다. 기계 속에서 전혀 낯선 생명으로 환생하기 위한 쌀알들의 형상을 실감나게 그려주었어야 했다. 이어진 종장에 오면 그 아쉬움은 금방 해소된다. “뻥이오!”는 의성어이기도 하지만 ‘뻥’이라는 원래의 의미도 담고 있다. 불구덩이의 지옥을 견딘 것들은 초죽음의 형상을 하고 있어야 되는데 이것들은 오히려 싱싱하고 탐스러운 꽃잎으로 태어난다. 이런 배반을 시인은 “뻥이요!”하고 익살맞게 노래한다. 하지만 아직은 뭐라 말한 단계는 아니다. 세 편 다 너무 소품이고 재치에 기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책에 실린 시조 한 편을 더 보자.
저 배도 일곱시에 떠나네, 아득히
단 한 번도 귀항을 보여주지는 않았으나
그 어느 바다에선들 하선이 없었으랴
그것은 오래오래 물 위를 떠다니다
별이 된 사람에게서 닻을 내리는 것
맨발로 물을 삼고 가 별을 베고 눕는 것
할머니 말없이 저 배에서 내리셨지
일생을 기다려준 별 하나 다시 만나
산기슭 초롱꽃 같은 별자리로 앉으셨지
미리내 고이 담던 초롱꽃을 기억하네
그 물결 헤치면서 가는 건가, 저 배는
밤이면 꽃을 쪼아서 별을 만들며 아득히
-권영호 <귀항(歸航)> 전문.
이 시인의 등단작이다. 함께 실린 4편이 모두 미덥다. 충실한 습작기간을 보낸 흔적이 역력하다. 시인은 왜 등단작으로 할머니의 임종을 노래하였을까. 첫 장을 열면서 배의 출항을 노래한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영혼을 울리는 음악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에서의 여덟시가 아니라, 그를 차용한 신경숙의 일곱시에 떠나는 기차를 떠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배는 출항의 닻을 올렸지만 오래 그 배와 함께한 이는 바다에서 하선한다. 그리고 한동안 물위를 떠다니다가 별이 된 사람의 영혼에 깃든다. 그이를 잠시 내려두고 세월이란 배는 “꽃을 쪼아서 별을 만들며 아득히” 먼 바다를 향한다. 이제야 왜 여덟시를 말하지 않고 일곱시를 말하는지를 알 듯하다. 여덟시라면 반체제 음악가의 비장함까지 녹여내어야 하겠지만, 이 시에서의 작별은 이념이 배제된 순수한 할머니를 그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 할머니라는 한 여인과의 작별을 노래하는 쓸쓸한 연가로 다가온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흠집은 드러난다. 세 번째 수는 아쉽다. 굳이 은유로 처리된 할머니와 별자리를 직접적으로 언급했어야 할까. 위 시에서 지적하였듯이 시어의 중복은 독자를 힘겹게 한다. 4번이나 반복된 ‘별’의 사용을 절제하였더라면 시의 완성도는 한결 나았으리라 여겨진다.
1
저 끝없는 보행,
길은 사막 속이다
연신 무너지고 다시 곤두설 때
빛바랜 인화지 같은 한 순간이 찍혀 있다.
2
꽃이 진다는 건 제 멍을 지우는 일
장대비 서럽던 날의 행방을 묻지 않고
땡볕에 까무러쳐도 무릎 꿇고 견디는 일.
3
늪 속을 걸어나온,
맨발의 겨운 노동
푸석한 바람을 안고 모랫벌을 내달린다
저마다 시계가 된 우리, 흰 등뼈가 보인다.
-이승은 <시간> 전문. ≪정신과 표현≫ 9.10월호
사진 속에 시간이 찍혀 있다. 선명하지 않은, 빛바랜 인화지 같은. 이 시인에게 길은 사막처럼 척박하다. 그에겐 언제가 개화였고 만화방창이었을까. 이제 멍을 지우기 위해 꽃잎을 떨군다. 장대비도 땡볕도 어지간히 견딜 만한 모양이다. 겨우 늪을 걸어 나왔지만 여전히 걸음은 힘겹다. 모래바람을 안고 내달리다 보면 살아온 마디 선명한 등뼈가 보이기도 하리라. 함께 걷는 그대 얼굴에서 지난 세월을 걸어온 내가 보인다. 우리는 서로가 시계다.
이승은 시인은 벌써 시력이 20년이 넘었다. 그동안 녹슬고 닦고 또 녹슬면서 세월을 견뎌왔다. 그런 만큼 시는 곡진하다. 시조단에서 이런 안정감은 흔치 않다. 함께 실린 ‘벚꽃 앞에서’도 이런 장점은 잘 드러난다. 둘째 수에 눈이 간다. “가난한 시간일수록 외려 따스한 체온/ 서녘 비낀 볕발로도 윤이 나는 쪽마루에 처연히 손님마냥 앉은 꽃 그림자, 긴 속눈썹” 저녁볕살의 온기는 약간 서늘함도 함께 갖지 않는가. 미묘한 시간대의 포착은 역시 미묘한 느낌을 전해준다. 느슨한 듯하지만 별로 뺄 말이 없다. 가난한 시간과 따스한 체온, 서녘 햇살과 처연한 꽃 그림자. 이런 댓구는 반대의 것이면서도 절묘하게 어울린다. 그 이유는 곧바로 다가가지 않는 여유를 갖기 때문이다. ‘꽃 그림자, 긴 속눈썹’의 맺음처리는 압권이다. 꽃 그림자가 떨군 속눈썹 하나를 곧바로 다가가게하지 않고 멈칫 쉬어가게 한다. 쉼표 하나로 넓은 마당만한 여백을 가진다. 이런 장치는 의도된 것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체득된 호흡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시조로 감내해 온 세월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여준다.
신인들의 작품에서 시작하여 중견시인의 작품으로 이 글을 맺는다. 시조는 가볍게 보고 덤빌 만큼 쉬운 장르가 아니다. 정형의 그릇을 만들어야 하고, 그 그릇 속에 제대로 된 음식을 담아야 한다. 어느 것 한 가지도 만만치가 않다. 그러므로 음보에 지배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좋은 시조인은 그 정형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링을 벗어나면 벌써 권투가 아니다. 지배할 것인가 지배당할 것인가. 링을 박차고 오르는 날선 신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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