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문학의 반성과 전망
․ 참석자 : 박기섭(시인), 정수자(시인, 아주대 전임연구원), 이종문(시인, 계명대교수),
이달균(시인), 유성호(문학평론가, 한국교원대 교수), 이정환(사회)
․ 곳 : 대구 남대구 KT지점
․ 때 : 2005년 1월 13일 금요일 17시
․ 사진 : 권영오
․ 정리 : 이숙경, 이경임
이정환 : 겨울비 듣는 궂은 날씨임에도 먼 길을 와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만남의 자리를 연초에 갖게 되어 더욱 뜻이 크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시조문학의 반성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미리 준비하신 의견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정형시로서의 시조’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형식과 내용 양면을 함께 짚어나갔으면 합니다.
유성호 : 정형 양식으로서 시조가 본래 가지고 있는 선험적 규정을 충실히 지켜가야 한다고 봅니다. 최근의 실험 양식 중에는 단형시조 내의 율격을 확장해서 언뜻 보면 종장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데, 그러한 시도가 불가피하게 필요한 것인지 깊이 자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율격을 섬세하게 지키면서 다양한 삶의 양상을 반영하는 일 즉 사람살이의 구체적인 문제를 도입하여 근본적인 고민을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야 합니다.
시조의 양식에 내용면으로는 안정된 시상을 담고 소재로는 자연이나 풍경, 정신적 지향이 시 안에 많이 나타나고 있어도 사람살이의 구체적인 면이 취약합니다. 시조는 시조가 가지는 형식적 제약을 받으면서도 다양한 현실적 고민을 변화 있게 담아내야 합니다. 그 동안 보여준 시조 작품들이 균형 있게 그러한 것들을 보여 주었습니다만, 이런 면을 더욱 깊이 천착하여 작품에 적극 반영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달균 : 시조에서 형식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늘 형식이 거론되는 것을 보면 그만큼 형식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음을 반증한다고 봅니다. 시조에서 구는 음보로 제어되어야 하고, 장과 장은 의미의 독립된 기능을 가지면서 3장의 완결을 이루어야 합니다. 장의 매듭을 무시하고 다음 장으로 흘러가는 시조들이 많이 발표되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런 형식에 얽매인 나머지 구태의연한 댓구들을 들고 와서 시적 울림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시조들도 문제입니다.
형식과 관련해서 약간 성급한 문제 제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발표되어진 사설시조 역시 이와 무관치는 않은 듯합니다. 어떤 분들은 사설시조가 자유시와 변별성이 약하기 때문에 시조의 발전을 위해서 걸림돌이 된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사설시조는 계승 발전시켜할 소중한 유산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런 논란은 산문시를 써놓고 사설시조라고 발표하는 형식적 오류에서 연류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박기섭 : 시조가 정형시로서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거론해 보겠습니다. 일반론적인 입장에서 시조의 형식을 무시하면 시조로서의 존립 가치가 없으므로 시조성은 위험하게 됩니다. 막연하게 3장 구조를 가졌다고 해서 제대로 된 시조인가 하는 점은 숙고할 문제입니다. 3장 6구 12음보는 우리의 정서와 한반도의 지형적, 문화적 습성이 녹아 우리의 성정에 아주 잘 맞습니다. 형식을 제대로 익히면 자연스럽게 형식을 부릴 수 있게 되고 개성이 담긴 작품을 쓸 수 있습니다. 특히 신인들에게는 바둑의 관점에서 ‘정석을 익혀라 그리고 정석을 버려라’ 하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시나 한문학이 우세했는데, 그들이 남긴 시조는 무척 자연스럽습니다. 이는 시조 형식의 육화 즉 자기화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연단의 과정이 오늘날 시조시인들에게는 많이 부족합니다. 우리 선조들처럼 즉흥시나 문답시 형식으로 시조를 풀어내고 읊는 능력을 갖추며, 생활 가운데에서 체질화된 시조가 나올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관건은 음보를 망각하기까지 자연스러움을 체득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아울러 記寫法 즉 표기법이 유형화된 것에서 의도적 탈피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지나 의미 단위로 볼 때한 작품은 저마다 가장 적절한 연행갈이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까닭에 조형미 창출에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정수자 : 세 분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시조의 형식을 자기화해서 자유롭게 부리는 경지로 나가야 합니다. 시조 3장의 심층구조에서 초․중․종장을 독립적으로 구사한 후 유기적인 체계를 이루어야 시조로서 구실을 다할 수 있습니다. 각 장의 구조적 특성을 살리지 못하면 자유시와 변별성이 약해집니다.
記寫를 시조로 했지만 시조로 인정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입부인 초장과 전개부인 중장 그리고 전환과 결말이 되는 종장까지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종장의 미학을 제대로 살릴 수 있을 때 참다운 시조가 될 것입니다. 지금은 시조의 형식이 많이 해체가 되고 있는데, 형태시나 형태 실험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시조는 형식 실험에 제약이 늘 따를 수밖에 없기에 시류를 좇기보다 자신만의 독특한 시조미학 구현에 힘써야할 것입니다.
이정환 : 이번에는 시조의 미학적 활로 개척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앞서도 잠깐 거론되었지만 먼저 사설시조 문제를 짚어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사설시조라고 발표된 작품들을 보면 세 수 정도로 고쳐 쓸 수 있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상당히 많은 이들이 사설시조를 즐겨 쓰고 있으나 사설로서의 당위성을 확보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유성호 : 사설시조와 자유시는 다릅니다. 특히 시조의 중장에서 의미를 확장하고 종장에서 결론을 내야합니다. 사설의 양식은 일정 부분 필요한 것이기는 하나 시조의 본류일 수는 없다고 봅니다. 즉 양식의 보수성을 지키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방법일 것입니다.
이달균 : 사설시조는 앞말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뒤엣말을 가져와서 풀고 당기는 특유의 사설적 가락이 있습니다. 이런 말의 넌출거림은 현대시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것들입니다. 사설시조나 단형시조 공히 제대로 된 육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작품으로서 성공하기 힘듭니다.
정수자 : 형식 때문에 시 자체가 육화라고 봅니다. 시인 스스로가 단련된 상태에서 개성적인 시가 나와야 시조의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달균 : 신인들의 경우에도 너무 쉽게 사설에 접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능하면 단형시조로 쓰는 게 좋고 사설은 꼭 필요할 때만 쓰는 자세가 바람직합니다. 지나친 형식 실험인 경우 비평적 관점에서 채찍질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박기섭 : 시조 한 수가 독립적인 역할을 하면서 3장의 구조 속에 서로 유기적인 관련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연시조에도 적용 되어야 하는데 이 점에 대한 이해가 전반적으로 많이 부족하다고 봅니다. 사설시조의 경우 양식의 보수성을 체화해서 스스로 이루어야 하는데 수필 한 단락을 삽입해 놓고서는 사설시조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설시조는 의미단락이 분명하게 전해져서 상호간에 받쳐주고 되넘겨 쳐서 종장은 평시조의 종장과 같이 마무리하는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성호 : 그러므로 양식의 무한 확장보다는 미학적 견고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이정환 : 정형시로서의 시조에 대한 이야기여서 오늘 좌담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할애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조의 종장 문제를 다시금 짚어봐야 하겠습니다. 시조는 초장 첫마디 ‘3’에서 시작해서 종장 끝마디 ‘3’으로 끝나는 것이 정석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정형률을 충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거둘 것 없는 이 가을 마음만이 허허롭다’라는 종장을 의미단락으로 보면 ‘5/3/ 4/4’ 구조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가 적잖습니다. 이럴 경우 의미 단위로 읽을 것이 아니라 律讀 단위로 읽어야 바람직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박기섭 : 어차피 시조는 정형시인데 종장 前句에서 율독 단위로 인정하게 되면 시조의 공백이 너무 크게 됩니다. 정격 논리를 준수해야 합니다. 종장 1, 2음보 즉 첫 음보 ‘3’과 둘째 음보 ‘5’이상은 자수율로 규제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경우엔 엄격한 형식 논리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종장 첫 마디가 자수율로 ‘2’나 ‘4’가 될 때 시조 고유의 미학은 훼손되고 맙니다. 단순히 음보율만 가지고 정격 논리를 따질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정수자 : 그 말씀에 공감합니다. 율독은 심리적 율독입니다. 구가 음보율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는데 구의 역할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구의 개념을 좀 더 살려가면서 3음절, 5음절의 정형성을 철저히 지키도록 하는 노력할 때 종장의 미학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달균 : 파격이라는 말은 시조 안에서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음보율에 의존하다보면 자칫 정형을 잃을 위험이 있습니다. 종장 첫째 둘째 음절의 기능이 강력한 구속력을 가질 때 정격 논리 안에서 완결의 미학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정수자 : 1920년대에 이미 조운은 정격 논리를 주창한 바가 있었고 잘 준수한 작품을 정격시조라 명명했습니다.
유성호 : 현대시조에서는 음보율이 보편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걸음걸이는 다릅니다. 창작자의 심리적 호흡을 독자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언어적 특성상 자수율 혹은 음수율의 규정이 제1의 원칙즉 근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 위에 음보율이 기능해야 할 것입니다.
이정환 : 박기섭 시인이 오래 전에 시조는 ‘인간율’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시조에 관한 글을 쓰면서 시조의 종장을 ‘창의적 공간’이라고 규정한 적이 있습니다. 종장의 구조적 특성 즉 고유의 정형 미학을 잘 살리는 일이 관건이라고 봅니다. 이제 시조의 본질 문제에 관한 논의는 이 정도로 매듭짓겠습니다. 한국문학 속에서 시조의 기능과 왜 필요한가 하는 당위성을 거론해 보겠습니다. 첨단과학문명시대인 오늘날에도 과연 시조가 매력 있는 문학의 한 갈래로 존립할 수 있겠는지요?
유성호 : 역사적 장르로는 소멸되었지만 양식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계승되고 있는 것이지요. 필요성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창작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조는 독자의 입장에서 시조라고 생각하고 읽을 때 기대지평이 있는 것입니다. 근대시가 율격을 등한시한 부분에서 문제가 되었고, 현대시는 열린 구조가 되는 등 많이 변모되고 있습니다. 자유시가 놓치고 지워버린 것을 시조가 회복해야 합니다. 시조가 다시 주류로 오를 수는 없지만, 자유 이데올로기에 반항하는 것을 시조가 보완하여 시조만의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현대인의 삶을 내용으로 하되 완결성과 율격성을 지키면서 문학성을 고양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달균 : 부연하자면 시적 언어들이 무한 질주의 시대에 놓여 있습니다. 시적인 자정 능력이 필요합니다. 시조는 그런 의미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의 경계에 놓여 있습니다. 끝없이 일탈하고자 하는 욕구와 되돌아오고자 두 욕구의 갈등이 바로 대칭적 균형을 담보하는 것입니다. 이런 선상에서 시조 존립의 당위성이 있다고 믿어집니다.
정수자 : 시조에서 찾아야 하는 부분은 현대시가 놓친 부분입니다. 시조가 가진 균제미, 정제미, 절제미, 단순미를 현대의 삶 속에서 끌어내야 합니다. 미학적 고민을 거듭함으로써 양식은 오래 됐으나 내용은 새로운 지평을 열고, 고전적 미의식을 현대적으로 재현해서 현대시와 다른 미학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지고지난한 길이지만 시인들에게 짐 지워진 과제입니다. 시조가 가진 절제력은 현대시의 무한 질주에 제동을 걸 수 있습니다.
박기섭 : 우리 민족에게 생래적인 민족의 가락은 시조 안에서도 살릴 수 있습니다. 이는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나 가락이 조합돼서 정신적 창작욕구가 양식화된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시적인 표현 욕구가 지속되는 한 가장 정제된 방식인 시조는 21세기 초정보화 사회 속에서도 면면히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정환 : 그 밖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유성호 : 시조가 교과서에 실릴 때 자유시는 편수도 많고 최근의 시인들까지 포함이 되고 있는데 비해 시조는 아직도 고전적인(?) 시인들의 작품이 교과서에 수록 되어 있습니다. 시와 시조의 균형을 놓고도 여러 가지 지적이 있는데 비록 교과서 수록 편수가 적더라도 더 중요한 것은 시조가 오늘날에도 왜 필요한가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중요하다고 봅니다. 매체적 조건이나 현실을 체험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야 하고, 현실을 따라갈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시조 비평을 적극적으로 유도할 좋은 시조 텍스트들을 생산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시조시인의 내부 소통구조도 문제가 됩니다. 비평가들이 꺼리는 경우도 있고 폐쇄구조도 심합니다. 비평가들에게 심포지엄이나 토론회, 세미나 등에서 시조 비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다수 제공하고 시조를 읽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매체에서 저변 확대를 해야 합니다. 현재 10종 이상의 전문지에 시조가 실리고 있는데 시조 비평이 부족하므로 대등하게 논의될 수 있는 기회마련이 필요할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전문 평론가들은 시조 비평을 꺼립니다. 시조 비평서를 내기도 힘들고 인정받기도 힘든데다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회의도 따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독자들에게 잘 읽히지도 않습니다. 월간지나 계간지에 시와 시조를 섞어서 비평하는 경우에는 또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난점도 따릅니다. 시조를 지속적으로 비평 받게 하려면 비평 욕구를 자극하는 시조꺼리가 나와야 합니다. 좋은 작품으로 넉넉한 꺼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냉정히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정환 :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교육과 비평 양면에서 적극적인 대처와 더불어 좋은 작품 쓰기에 진력해야 함을 절감합니다. 번역에 대해서도 잠깐 이야기해 주시지요.
유성호 : 시조의 양식적 고유성을 살리기가 쉽지 않으므로 번역이 힘듭니다. 영어는 어휘적 자질이 강한 언어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비해 시조는 독특한 율격을 가지고 있기에 영어로 시조의 율격을 살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의미나 이미지를 최대한 강조해서 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하이쿠 같은 경우는 이미지를 병치해서 세계 문화 속에 심어주는 테크닉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정수자 : 하이쿠는 미국 어린이들에게 쓰이고 있습니다. 세계의 문화 속에 시조도 그러한 역할을 할 날이 오리라 봅니다.
이달균 : 역사에 있어 가정은 성립되지 않지만 고호가 일본의 ‘우키요에’ 대신에 여백이 많은 우리의 묵화를 보았다면, 혹은 에즈라 파운드가 하이쿠 대신에 시조를 읽었다면 하는 상상을 해 보기도 합니다. 오늘 여러 논의를 하는 중에 제 자신 시조인으로서 많은 반성과 각성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제부터 시조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기섭 : 뜻있는 시인들이 자주 모여서 서로 자극과 충돌의 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더 활성화된 동인활동이 지역마다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정수자 : 시조시인이 자존을 지키며 우수한 작품으로 자신의 위상을 스스로 세워나가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유성호 : 문예진흥원 <힘내라 한국문학> 프로젝트 8명의 선정위원 중에서 시조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시조를 빼자는 의견을 사람도 있었습니다. 시조를 독립 영역으로 설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화예술위원회나 문광부에서 하는 사업에서 배분은 적더라도 시조를 따로 독립시켜서 대상자를 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정수자 : 문예창작지원금 예심 때에도 시나 평론 희곡은 작품이 넘치는데 시조 작품을 선정하는 데는 시간이 남았습니다. 양과 질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보였습니다.
유성호 : 양보다는 질적인 문제의 심각성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시조시인들이 시조의 질적인 고양에 전력을 쏟아야 합니다.
정수자 : 시조시인의 정예화도 중요한 관건입니다.
이달균 : 시조단에도 쟁점이 필요합니다. 700년을 지켜온 유일한 민족시가라지만 독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소멸하고 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조 전문지도 좀 더 읽히는 책으로의 변화가 필요하고, 타 장르의 전문지와 비교하여 장정과 편집 방향에도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발표하는 작품은 더 말할 것도 없겠죠.
박기섭 : 시를 쓰는 인구에 비례하는 문제인데, 시를 쓰는 인구는 많으나 시조 쓰는 인구는 적고 역량 있는 시인이 제한되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시조시인들의 자성이 필요합니다.
이정환 : 긴 시간 고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적잖은 고언이 오고간 이 모든 논의들이 우리 시조의 내일을 밝게 열어나가는데 꼭 필요한 밑거름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끝으로 귀한 지면을 마련해 주신 격월간 종합문예지《정신과 표현》송명진 주간께 감사드립니다. 여러 선생님들, 노고가 정말 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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