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평론

현대시조에 대한 몇 가지 오해

이달균 2011. 8. 16. 23:09

현대시조에 대한 몇 가지 오해

 

                                                                                                 이달균

 

2005년 1월 15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유성호 교수의 칼럼이 눈길을 끈다. 그는 이 글에서, 한 시대의 풍속과 이념, 그리고 보편적 정서를 드러내고 표상해 온 민족문학의 정수인 시조가 문학세계화에 첨병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물론 그 역시 복합적이고 다양한 현대적 징후들을 담아내기엔 제한된 3장 6구로선 부적합하다고 지적하는 일부의 목소리를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오랜 양식의 틀 속에서 다양하게 표현되는 현대시조의 내용적 탐색에 대해 애써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듯한 태도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간 시조단에는 독자와 평단에 좀 더 효율적으로 다가가기 위해 시와 시조를 함께 싣는 계간지들을 꾸준히 발간해 왔고, 100권의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태학사)>을 펴내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시도들은 시조 600년을 계승하고, 현재에 이르는 100년 동안의 모색과 탐색, 변화하는 시대에 기능하는 모습을 가늠해 보는 동시에 자생력을 얻기위한 노력의 일환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시조단의 이런 움직임에 비해 학계나 평론가들의 관심은 매우 부족해 보인다. 일본 하이쿠나 서구의 소네트는 거론 가치가 있는 정형시로 인정하면서 유독 시조에 대해서만은 별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국문학 교수들과 평론가, 문학잡지 편집위원들에게 시조에 관한 원고를 청탁해보면 견해를 밝힐 만큼 아는 게 없다는 말을 쉽게 한다. 이런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면서 엄연히 문단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현대시조에 대해 무견해로 일관하는 것은 직무유기나 마찬가지다. 남의 집 곳간을 열어보지 않고는 살림의 내막을 알 수 없다. 이런 비학구적 태도가 바로 무견해와 무지를 낳는다. 최소한 현대시조 백년 간 저술된 대표시조집 100권 정도는 읽어야 수용과 비판의 잣대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이번 호에는 시조를 둘러싼 이런 내외의 환경을 반성해보면서 최근 발표된 작품들을 살펴보려 한다.

 

눈보라 말 달리고

기차는 어둠 가른다

서서 잠든 검은 나무가

수음하듯 소릴 지른다

차창에

음각으로 박힌 치사량의 먼 기억

-김영재 <겨울 태백행 밤기차>

 

그는 나의 반면교사 조금은 모자란 사람

아내를 자랑하고 자식을 치켜세우고

그러나 충분히 정직한 속임수를 모르는 이

내가 만난 그 사람 충분히 정직한 사람

발이 닳도록 찾아봐도 어디서 만날 수 있으랴

청진동 막소주 집에서 낙지처럼 몸 비트는

가문을 거들먹대고 허세를 부리면서

술친구에게 빈축 사는 참으로 선량한 가장

왕따로 살고 있지만 왕소금으로 녹고 있는

-김영재 <충분히 정직한 사람>

 

지난 겨울호 『시조세계』가 기획한 김영재 시인의 신작 소시집에 주목했다. 74년 『현대시학』으로 데뷔했으니 벌써 시력 30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이 시인은 요즘 누구보다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 시조단의 조로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원로는 원로대로 중견은 중견대로 자신의 틀을 유지하다가 그만 범작에 머물고 만다. 이런 지리멸렬함 속에서 김영재 시인의 존재는 단연 빛난다. 이 기획에서도 12편의 적지 않은 시조를 선보인다.

 

<겨울 태백행 밤기차>는 섣부른 관조나 관념을 철저히 배제한다. 시어의 간극은 촘촘하고 단단하다. ‘눈보라 치고’ 혹은 ‘폭설 내리고’가 아니라 ‘눈보라 말달리고’라고 표현한다. 일견 그냥 지나칠 수 있겠지만 이런 역동성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폭주하는 시인의 심상이 기차의 시속을 앞설 때에야 얻어지는 표현이다. 이 시는 열차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사실은 막막한 겨울을 달리는 시인의 허무와 절망을 노래하고 있다. ‘검은 나무의 수음하는 소리’의 폐성같은 둔중함은 종장의 ‘차창에 /음각으로 박힌 치사량의 먼 기억’과 탄력적으로 어울려 단번에 애조 띤 분위기로 치환시킨다.

 

이에 비해 <충분히 정직한 사람>은 한결 안정되게 읽힌다.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약간 덜 떨어진 친구는 우리의 반면교사다. 너무 철없이 드러내므로 외려 정직해 보인다. 이 시는 거꾸로 뱀 같은 처세를 가진 사람에 대한 비판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안정된 보법을 지닌 이런 시가 경계해야 할 점이 있다. 여기서도 그런 오류는 드러난다. 둘째 수의 초중장 ‘내가 만난 그 사람 충분히 정직한 사람/ 발이 닳도록 찾아봐도 어디서 만날 수 있으랴’는 구절은 진술에 가깝다. 더구나 ‘충분히 정직한 속임수를 모르는 이’와 ‘내가 만난 그 사람 충분히 정직한 사람’을 겹쳐 표현할 이유가 있었을까. 시조에서 반복은 급박한 보법을 추스르거나, 풀어놓은 구절을 마감할 때 사용하면 효율적이다. 차라리 둘째 수를 없애고 첫 수와 셋째수를 곧바로 연결 지었다면 군더더기도 줄고 시조다운 가락도 살릴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셋째 수 초장의 ‘가문을 거들먹대고’는 ‘가문을 들먹이고’의 오기인 듯하다. 그러나 이런 흠결에도 불구하고 시인 특유의 결구 처리로 인해 분명한 생명력을 얻고 있다. 마지막 수 종장 ‘왕따로 살고 있지만 왕소금으로 녹고 있는’ 은 역시 시조의 묘미를 제대로 보여준다. ‘왕따’와 ‘왕소금’은 전혀 다른 사물이지만 동음의 반복으로 이질화를 줄이면서 무미건조함 위에 짭조름한 간을 맞춰준다. 전혀 특별하지 않은 얘기를 특별하게 들려주는 능력이야 말로 시인의 덕목이다.

 

『2004. 대구시조』에는 전년도에 등단한 네 신인들의 작품이 실려 있다. 자연스레 70년대 시인에서 2000년대의 시인으로 옮겨오는 셈이다. 연대기적 구분이 중요하지 않지만 30년이란 시차를 통해 시조가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신인에겐 문청시절 묻어두었던 심상들을 각혈하듯 쏟아내는 격렬함이 있기 마련이다. 독자들보다는 자신이 더 절실하여 농울치는 감정과 사변을 드러내기도 한다. 주체하지 못할 에너지는 새로운 실험을 도모케 하고, 그 실험이 객관성을 얻으면 시의 지평은 물론 자신의 지명도도 동반 상승하는 것이다. 반면에 기존의 질서에 안주하려 하면 시적 성취는 요원해진다. 이런 관점에서 그 중 두 편의 시조를 살펴보려 한다.

 

기다림은 한가로이 그 깊이를 더해간다

숨소리도 변함없는 갈대며 수양버들

헤아려 밟아 가려나 한 순간 흔들어 놓고

 

한 떼의 쇠기러기 먼 길 떠날 마지막 식사

부산한 움직임이 저리도 엄숙함을

바람에 실려 온 낮달 넌지시 일러준다

 

낡아 헤진 지도 한 장 은밀히 건네주는 봄

날마다 돌아오는 길 원경으로 남겨두고

한 폭의 수초로 서서 제 그림자 바로 세운다

-김미정 <주남저수지 所見>

 

이른 봄 박해의 회오리가 불었다

겁에 질린 눈망울로 산 속에 숨어들어

열다섯 어린 나이에 물레를 돌렸다

 

잘려진 꿈들은 원망조차 끌어안고

천삼백 도 장작불에 사흘밤을 다 태워져

푸레독, 무념의 결정체로 생명의 눈을 뜨는

 

납옹기 파동으로 상처가 된 매운 눈빛, 

먹물보다 진했던 시름의 강을 건너

불가마 순례의 길로 항해의 돛을 올렸다

 

신이 준 삶의 굴레 고뇌를 빚던 외로운 길

투박한 항아리 가득 화안한 달빛을 담아

고향의 장맛을 내는 소망을 이루었다

-조금숙 <푸레독, 옹기장이>

 

<주남저수지 所見>은 안정되게 읽힌다. 근경에서 원경으로 옮겨가는 시선이 유연하다. 반면 신인다운 개성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다. 생동감 대신에 안정감을 택한 때문이다. 장과 장, 연과 연의 연결이 팽팽한 긴장감을 가질 때 독자는 한눈을 팔지 않는다. 철새도래지 겨울 주남을 찾았다가 멀리 봄의 기운을 느끼고는 살풍경한 원경 뒤로하고 다시 몸을 추스려 자신으로 돌아오는 얘기다. 이 점, 셋째 수에서 상을 맺었다면 차라리 연시조 보다 단수가 낫지 않았을까. 같은 소재를 다룬 다른 시를 빌려와 비교해 보자.

 

우포늪은 낡고 오래된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

서지포, 목포, 쪽지벌로 찢겨져 나가

더러는 제 가슴 열어 그 이름을 다짐 받지만

늦여름 우포에서 쇠물닭의 이야기는

광활한 세렝게티의 기억을 끌어안고

건조한 사막을 건너 우포늪에 오기까지

때로는 한해살이 자라풀로 살아가고

무시로 오래살아 냄새나는 습지로

죽어도 영원히 살고 있는 빗방울 무늬 화석으로

누우떼와 얼룩말의 대이동을 기다리며

내버들의 종아리 살점이 녹아나는

소장된 쪽지벌 숨소리는 경전보다 신실하다

-옥영숙 <쪽지벌에 산다는 것은>

 

이 시의 소재도 늪이다. 우포를 찾아오는 철새 쇠물닭은 지구 최고의 생태공원 세렝게티와도 연결된다. 한 종의 동물을 매개로 하여 우포와 세렝게티 평원을 한 공간 속에 배치한다. 그리고 빗방울 무늬 화석으로 현재에서 중생대 이전으로 시공을 초월한다. 물론 이 시 역시 장과 장, 종장 결구 처리에 불만이 없지 않지만, 생태적 관심이 상상력의 확장을 가져오는 좋은 예라 여겨져 옮겨보았다.

 

조금숙의 <푸레독, 옹기장이>는 전형적인 기승전결의 구도 속에 옹기장이의 생애를 그리려 했다. 첫 수는 옹기장이가 산사람이 된 내막을, 둘째 수는 장인정신을, 셋째 수는 시련과 극복을, 넷째 수는 숙명에 대한 순응을 그려낸다. 비교적 짜임새 있게 구성되었지만 시적 완성도 측면에선 아쉬움이 남는다. ‘박해의 회오리’, ‘납옹기 파동’ 등의 표현은 역사적 서술에 가깝고, ‘겁에 질린 눈망울’, ‘잘려진 꿈들’, ‘원망조차 끌어안고’, ‘시름의 강’, ‘순례의 길’, ‘삶의 굴레’ 등은 너무 낡았거나 관념적이다.

 

등단과 발표보다 충실한 습작과 내적 탐구가 절실히 요구된다. 문단은 늘 신인을 주목한다. 왜인가? 참신함과 실험성을 수혈받기 위해서다. 언급한 두 편 모두 이 부분이 아쉽다.

 

이틀 전 선물 받은 스킨답서스는 죽었다

시나리오를 막 탈고한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푸석한 생활의 발견!

말라죽은 언어들

그녀의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김광석의 노래보다 시바타 산키치를 이야기했다

생활을 조율하는 일은 침묵할 때만 가능했다

그녀를 위해 낭송된 Your birthday의 첫구절은

스킨답서스만이 기억한 생활의 오랜 장벽-.

태양을 거부한 생활이란!

오만과 편견이었다

예측 가능한 결말처럼 또 하루가 저물었고

지층 101호의 방구석에서 어둠은 더욱 향기로웠다

그녀의 유폐된 생활은 박제된 채 발견되었다

-장수현 <생활의 발견-서른 번째 생일> 『시조 21』2004. 하반기호

 

희망과 절망 사이

잡았던 줄을 놓고

벼랑 위 꽃을 꺾어

내 잠에 흩뿌릴까

드높은 아름다움이 참 위험한 거리에 있다

집게는 함부로 길을 믿지 않는다

가만히 옆길 내어 제 뻘을 다스릴 뿐

새 집이 새 감옥이란 걸 모른 척 갈아입는다

수많은 네게서 나는

다소곳한 습관으로

진부한 하루해를

파먹는다, 핏빛 노을

다 저녁 치명적 상처 속에 핀 너를 처음 보았다

-문희숙 <헌화가> 『나래시조』 2004 겨울

 

시조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이라면 위의 두 작품이 과연 시조인가 하고 물을 것이다. 시조평자들 중에도 고시조의 관점에서 현대시조의 실험성을 폄하하기도 한다. 이는 매우 편협한 생각이다. 시조에서 강조되는 종장의 첫 구 3과 5음절도 고시조에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는 대개가 그러하다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시조가 아니다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시조에서 이 점이 강조되는 이유는 나름의 정형을 기본적으로 지키기 위한 암묵적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형식이 그러할진대 그 속에 담기는 내용물은 첨단이든 뭐든 담아내지 못할 게 없다. 시조는 당대의 것들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수현의 시조는 다소 난해해 보인다. 난해함은 현대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시 속의 주인공 ‘그녀’가 누군지는 몰라도 좋다. 이틀 만에 관상식물 스킨답서스가 죽은, 공기마저 유폐된 그곳은, 그녀가 오래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해 있던 공간이다. 여기저기 정리되지 않은 원고들과 부스스한 일상들이 널부러져 있을 뿐이다. 그날 그녀의 서른 번째 생일을 기억하는 이들은 시바타 산키치를 얘기한다. 산키치의 시 <Your birthday>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환희를 노래했지만, 그녀의 삶은 늘 장벽 속에 있다. 그녀를 둘러싼 그들은 휴머니티를 가진 지성인처럼 보인다. 시인은 왜곡된 지성의 커튼을 살짝 열어 보여준다. 태양을 거부한 그녀의 최후를 보면서 표백된 희망을 말하는 이들의 이율배반을 들춰낸다. 이런 아이러니를 읽어내는 것 또한 시 읽기의 묘미다.

 

장수현의 시만큼이나 문희숙의 시도 드라이하고 슬프다. 꽃을 얘기하면서도 꽃다운 향기는 어디에도 없다. 죽음처럼 아득한 잠 위에 꽃잎을 뿌리기 위해 안간힘으로 잡았던 줄을 놓는다. 참으로 위험하고 허무한 헌화의식이다. 새집이 감옥임을 알면서 거부하지 못하는 습관은 두렵다. 하물며 진부한 하루해를 파먹는 습관이라니! 게도 꽃도 나날도 권태롭다. 이 시의 키워드는 ‘다소곳한 습관’이다. 시나브로 젖어드는 습관의 주사약은 심장을 파먹는다. 하지만 어디에도 돌을 던지거나 악다구니를 하며 저항할 자세는 없다. ‘치명적 상처 속에 핀 너’의 발견은 이미 때가 늦었다. 시인은 왜 독자를 마취약처럼 나른하게 이끄는가. 이 시 역시 단절된 도시인의 삶을 그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분명 장과 구의 정형은 지켜진다. 형식의 제한 속에서 현대적 징후들을 그려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시조에 대한 몇 가지 오해는 바로 이런 것이다. 형식의 제한이 상상력을 제어하지 않을까, 그 형식 속에 현대적 징후와 다양한 삶의 양태를 어떻게 표현해 내느냐 등등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몇 편의 작품만으로도 그런 선입견은 어렵지 않게 풀린다. 수백 편씩 쏟아져 나오는 시조들 중에 읽을 만한 작품이 그리 많지 않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양적 팽창에 비해 질적 향상이 부족하다고 해서 폄하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시조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는 빨리 타파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조인들은 뼈를 깎는 반성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할 것은 좋은 시조의 창작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민족문학 혹은 문학의 세계화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