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형식과내용은 하나다.
이달균
좋은 시조를 쓸 것인가, 새로운 시조를 쓸 것인가. 너무나 원론적인 말을 굳이 하는 까닭은 시의 기본인 이 둘이 공존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보기 때문이다. 좋은 시조와 새로운 시조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란 늘 이전의 것을 허물어뜨리며 변해 왔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이어받되 구속당하지 않아야하고, 새로워지되 룰을 벗어나는 파격은 지양되어야 한다. 시조란 형식을 벗어나면 원래의 장르를 잃는다. 사유는 자유롭되 제한된 형식 속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그런 새로움은 그냥 얻어지지는 않는다. 인식의 변화가 먼저 따라야 하고, 그 다음 시조의 형식 속에 언어를 담아내는 기교를 가져야 한다. 그런 면에서는 운동경기와 비슷하다. 이런 식의 창조는 곧 자신만의 독특한 시작법을 갖게 한다. 이름을 가려놓아도 어법이 드러나는 시인이 된다면 크게 이름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름의 성취를 이룬 것이라 보여진다.
지난 계절 『경남문학』에 실린 시조들도 변화의 몸짓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대체로 새로운 것 보다는 전통 지향적인 시조들이 더 많아 보였다.
1.
춘삼월 끝자락에
매달렸던 미련도
식구들 여윈 눈빛 다 떨구지 못하고
아비는
지지리 못나게도 핏빛 한숨 절였다.
수리도랑 둑길에
고개 숙인 벼 이삭
훑어 넣은 볼록한 윗도리 호주머니
엄마는
노을 비낀 죽을 한숨 섞어 얹었다.
2.
긴 봄날 시린 물소리 허기진 눈동자
그늘진 허리에 서러움 덩이 매달고
먼 먼길
뒤돌아보며 고개 넘는 저승길.
-이숙자. <아버지>전문
이 시조는 아버지께 바치는 헌사다. 그런 만큼 형식과 내용, 전개 방식 또한 전통서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시인의 아버지 역시 농경시대 배고팠던 과거를 가진 분이다. 자연 어머니도 벼이삭을 훑어 밥과 죽을 끓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험은 평범해 보인다. 보릿고개를 겪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기 때문이다. 이런 아버지가 어느 봄날 저승 가셨다. 둘째 수의 저승길 풍경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연 이 장례의 시점이 ‘시린 물소리 허기진 눈동자’와 ‘그늘진 허리에 서러움 덩이 매달고’ 가는 때였을까? 그렇다면 아버지를 여윈 시점이 보릿고개 시절이어야 한다. 장례일이 그런 가난을 벗어난 후라면 고인은 다른 이유로 한숨 쉬며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이 시는 아버지와 가족의 가난했던 유년에 지나치게 기대어있으므로 정작 얻어내야 할 사실성을 간과한 점이 아쉬워 보인다.
짙다.
여자의 속눈썹이 짙을까
꽃대궁을 기어오르며
남자는 뛰어든다
아-생명
임신한 여자의 배 속
나 아닌 내가 꿈틀댄다.
붉다.
선홍빛 면경 속이 훤히 내려다 뵈는
달천동 흐르는 물도
활활 타는 사월은
열병에 몸서리치는
천주산이 더 붉다.
-임성구. <천주산 진달래꽃>전문
이 시조는 분명 새로워지고자 하는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 붉은 진달래 꽃빛을 정분난 남녀 간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붉은 바다에 뛰어든 발정난 사내는 잉태를 시키고, 여자는 달천동 흐르는 물 곁에서 몸서리치며 하혈을 한다. 한국시단 전체를 놓고 보면 결코 새롭다거나 신선한 시는 아니다. 그러나 이 시인이 보여주었던 그동안 시들과 비교해보면 자연스레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는 우리에게 몇 가지 우려를 느끼게 한다. 변화는 존중하지만 틀을 깨는 일은 없어야 한다. 먼저 형식을 눈여겨보자. 첫째 수 초장, ‘짙다./ 여자의 속눈썹이 짙을까’를 보자. ‘짙다’란 결구는 여자의 속눈썹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짙다. 속눈썹이’ 이렇게 배치되어야 어법이 맞다. 결코 ‘짙다. 여자의/ 속눈썹이 짙을까’로 읽혀지지 않는다. 초장의 첫 구부터 오류를 일으키면 벌써 시조 형식의 틀은 깨어진다. 이런 오류는 둘째 수 초장에서도 똑 같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다. 이 시의 중심 시 행인 ‘아-생명/ 임신한 여자의 배 속/ 나 아닌 내가 꿈틀댄다.’에서 ‘나 아닌 나’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이 끝난다. 화자와 또 다른 자아는 분명 하나이면서 배치되는 둘이다. 그렇다면 이 꽃바다에 빠진 나와 또 다른 나와의 갈등구조가 뒤따라 이어져야 한다. 바로 시적 장치의 미흡이 아쉬운 부분이다.
비단 이 시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제법 이름 있는 시조인 중에도 이런 오류는 종종 있다. 중장에서도 신주하지 못한 표현이 눈에 뛴다. ‘꽃대궁을 기어오르며/ 남자는 뛰어든다’에서 기어오르며 뛰어드는 행동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시조 작법은 쉽지 않다. 많은 제약이 따른다. 이런 제약은 시인이라면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 운율이 맞아야 하고 운율에 앞서 어법에 맞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자신이 의도하는 의미를 제대로 제시하여야 하고, 또 남달라야 한다.
웃고 있는 사진 속엔 환했던 어제가 있다
지쳐버린 공간
이제 시간은 멎고
닳아진 모서리만큼
더 우울한 신경세포.
무심코 바라보는 그 이름 석자가
부도난 수표처럼
영혼의 환부처럼
타버린 그리움 속에
팽이꽃으로 엉켜 있다.
-서일옥. <미아찾기 전단지를 보며>전문
서일옥 시인의 <미아 찾기 전단지를 보며>는 세태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전단지는 전령사의 메모처럼 살풍경한 시대의 한 단면이다. 잃어버린 지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아이에게 시간은 정지되어 있다. 물론 공간도 제한되어 있다. 사진의 모서리도 닳아있는 우울한 날들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객관성을 얻는다. 두 수를 정독해 보면 이 시조 역시 살풍경한 세태의 구체적 접근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둘째 수에서 너무 힘이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다소 안일하게 처리한 결과가 아쉽다. 어쩌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경이 엉켜있는 팽이꽃을 닮았다는 자조적인 표현은 제재에 비해 너무 낭만적인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나눠가졌지만 이 시조는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까 쉽다.
그리고 분명 한 가지 밝혀둘 것은 여기 언급한 시조들이 태작이어서 거론한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시조단의 문제점에 접근하기 위해 이들 작품을 채택한 것뿐이다.
지금도 시조는 끊임없이 실험되고 있다. 엇시조와 사설시조를 말하지 않더라도 평시조의 지평도 무한 확장을 가져오고 있다. 물론 제약된 형식 속에서의 변화는 말할 것도 없다. 하나의 그릇 속에 담을 수 있는 것들은 얼마든지 많다. 어제까지 곡식을 담았다면 물이나 설탕을 담는 일도 자연스럽다. 그릇에다 가마니나 절구를 담는 일은 좋아보이지도 안거니와 맞지도 않는 일이다. 시조단에는 늘 눈길을 끄는 시인을 기다리고 있다. 누구도 대상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그가 경남에서 나온다면 더 할 나위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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