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 칼럼

알쏭달쏭한 교통표지판

이달균 2011. 7. 29. 14:16

함께 모인 사람들에게 물었다. “계근불응”. “통로암거”란 말의 뜻을 아시는지요?

“계근불응”은 전부가 모른다는 대답이었고. ‘통로암거’는 한 사람이 대략 알 것도 같다고 답했다. 국어 독해 시간이 아니다. 한자숙어 풀이는 더더욱 아니다. 만약 시속 80㎞로 달리다 이런 표지판에 따라 순간 행동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소한 말들이 버젓이 일반 운전자들을 대상으로 도로변에 서 있다면 그 이유는 뭘까?

 

부산지방국토관리청 도로교통표지판 담당자에게 물었다. 그는 그 정도의 말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리고 표지판 등은 함부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규정집에 의거한 것이므로 문제될 게 없다고 말했다. 담당자에게는 물론 쉬울 수가 있겠지만 문제는 일반 운전자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운전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도 덧붙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운전자에게 필요 없는 표지판을 세웠을리 만무하다.

 

한자를 들고 와 억지 조합을 해 보면 “계근불응(計斤不應)”. “통로암거(通路暗去)”라고 표기할 수 있겠다. 즉 전자는 ‘무게를 달지 않고 가는 차량’이란 뜻이고. 후자는 입체도로이므로 ‘이 길 아래 통하는 길이 있음’이란 뜻이리라. 그렇다면 “통로암거(×)”는 “길 아래 통로 없음”으로. “계근불응 차량”은 “무게 달지 않은 차량”이라고 표기하면 된다. 굳이 한자에 익숙지 않은 일반 운전자들에게 어려운 말을 들고 와 교통안내를 할 필요가 있을까. 이는 안전운전은커녕 사고를 불러일으킬 위험표지판 구실을 한다. 잘 뻗은 길을 달리는 운전자가 국도를 빠져나와 낯선 마을길로 접어들어야 할 때 갑자기 “통로암거(○)”라는 표지판을 보았다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아찔하다.

 

이것들은 김해시 진영읍에서 밀양시로 가는 신도로에 세워져 있는 도로교통표지판이다. 교통표지판 하나를 제작하고 세우는데 얼마의 돈이 드는지 우린 잘 모른다. 그러나 이 돈이 국민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임은 누구나 안다. 그들의 급료 또한 마찬가지다. 도로는 계속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이런 표지판들 역시 계속 세워질 것이다. 이 표지판을 제작한 부서원들도 잘 모르는 말들을 국민들로부터 거둬들인 예산을 써가며 세운다면 이는 분명 국고낭비가 아닌가.

 

필자는 이런 사실을 경남신문의 “우리말 바로 쓰기는 생활 속에서(2005.12.23)”란 칼럼을 통해 거론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직 아무런 변화는 없다. 이런 지적에 무관심한 것인지 아니면. 몰라도 상관없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운전하다 보면 이런 이상한 신조어들은 얼마든지 만난다. “매표소 통과 회차로 이용”. “노견 없음”, 이런 말들 역시 알쏭달쏭하기엔 마찬가지다. 한참을 생각해보면 앞의 말은 ‘유턴 차량은 매표 후에 하라’는 뜻인 듯하고. 뒤의 말은 ‘갓길 없으니 위험하다’는 뜻으로 해석해 본다. 정확한지 자신은 없다.

 

초정 김상옥 선생은 “제기(祭器)”란 시(詩)에서 “시(詩)도 받들면 문자(文字)에 매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문자에 매이지 않는 시는 바로 마음을 받들어 쓴 시다. 마음을 받들어 쓰면 읽는 이들의 영혼은 절로 맑아진다. 그렇다면 굳이 문자에 매일 필요는 없다.

 

이런 용어들을 개발한 부서원들이 운전자들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마음이 앞섰다면 굳이 어려운 문자 조합에 매일 이유가 없지 않을까. 용어를 짓는데 나름대로 지켜야 할 규칙이 있겠지만 공공의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 이상은 없다. 이용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결론짓는 신중함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말을 쓰고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조언도 깊이 새겨가며 일을 진행한다면 이런 시행착오는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 사회는 한글전용이 주를 이루고 있으므로 한자 독해력은 현저히 떨어져 있다. 또한 갈수록 연령이 낮은 면허취득자들이 늘고 있다. 이들에게 어렵고 이상한 한자어의 조합으로 표지판을 만든다는 것은 그들만의 의무사항에 불과할 뿐이다. 문제가 있다면 고치면 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시정의 필요성이 있는데도 고치지 않고 수수방관하는데 있다.

 

이달균 (시인) - 기사작성: 2006-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