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을 읽다

이달균 늙은 사자 - 김바사의 시 읽기

이달균 2017. 4. 6. 10:39

이달균의 "늙은 사자"


그제 중앙일보에 이달균 시인의 "늙은 사자"가 실려있었습니다. 멋있네요.
       
                             늙은 사자

             죽음 곁에 몸을 누이고 주위를 돌아본다.
             평원은 한 마리 야수를 키웠지만
             먼 하늘 마른번개처럼 눈빛은 덧없다.
             어깨를 짓누르던 제왕을 버리고 나니
             노여운 생애가 한낮의 꿈만 같다.
            
             길가에 나비가 노는 이 평화의 낯설음
             태양의 주위를 도는 독수리 한 마리
             이제 나를 드릴 고귀한 시간이 왔다
             짓무른 발톱사이로 벌써 개미가 찾아왔다.
 
이 시로 중앙일보 시조대상을 받은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자를 통하여 공포와 평화의 시간을 같이 생각해 봤어요. 사자는 힘을 잃어가고 쓸쓸해지지만 그것이 초원의 평화를 상징하기도 하죠.
나비 한 마리가 갈기에 와 앉는 평화요. 사자는 죽어가면서 초원을 살찌우는 거름되 되고, 윤회의 모습도 담았죠"
 
글쎄요. 하나의 짧은 멘트에 "평화" 라는 말이 두 번이나 들어가는군요.
시(詩)도 일단 세상에 내보내면 시인의 것만이 아닙니다. 이 시를 읽는 나는 벌써 시인과는 다른 느낌으로 이 시를 받아들이니 말입니다.
나는 사자를 "공포"로 보지않으며 나비를 "평화" 로 보지도 않습니다. 공포와 평화의 시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죠.
그것은  "바라보는 자" 의 분별심일 뿐입니다.
 
생명을 존중한다며 살생을 멀리하고 고기를 먹지않는 사람의 마음에는 강한 분별심이 있습니다.
대상을 나와 같은 존엄을 가진 "독립체"로 인정하는 겁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이 오직 한 덩어리 생명의 시스템이라고 본다면 잡아먹는 "나" 와 먹히는 "너"는 하나일 뿐입니다.
 
내가 이 시를 마음에 들어함은 시인이 지금 여기,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느끼며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세계를 은근슬적 끼워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사자의 "영혼" 에 대하여는 이야기하지 않죠. 그의 윤회는 이승에서의 윤회에 국한됩니다.
자신의 죽음을 "돌아가는 것"으로 간주하여 피안의 세계에 기반을 두려는 <천상병> 이나 "바위"로 변용하여 인식을 이어가려는 <유치환>에 비하여 매우 겸손한 것입니다.  독수리와 개미에게 뜯어먹혀 완벽한 소멸로 돌아가는 것,
 
"이제 나를 드릴 고귀한 시간이 왔다"..... 글세요. 이 귀절은 약간 마음에 걸립니다. "고귀한" 이라는 단어에는 사자의 "자아"가 스며있습니다.
임어당이 "인생의 한 편의 시"의 말을 인용하여 그 사자는 "사자로서 살고 그리고 죽었다" 라는 말을 온 마음을 다하여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고귀한" 이라는 말은 사족일 뿐이지요.
 
내가 시의 관점을 떠나 매우 유물론적인 기술자의 본성으로 말한다면 사자의 죽음은 초원을 살찌우지 않습니다.
초원의 생명들이 넘쳐나지 않게 통제하는 것이 사자의 역할이죠. 죽어 유기체로 돌아가는 것은 초원에 뿌려주는 밑밥이며 다음의 사자를 위한 배려일 뿐입니다. 
생명과 유기물의 총량은 언제나 같다.... 이것이 나의 바라봄 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시(詩)에 대한 소감에 삽입한다는 것은 불경이겠지요.
 
죽음을, 그것이 사람이던 동물이던간에,
바라옵건대,
저 너머의 관념을 끌어들이지 않고,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으면서 다음 차례인 나에게 평안을 주는 메세지로 전달되는 그러한 시(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