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평론

이달균 시집 『남해행』-세계의 어두움과 비극적 낭만의 서정

이달균 2015. 7. 14. 20:30

세계의 어두움과 비극적 낭만의 서정

이달균 시집 『남해행』해설

정복여(시인)

 

우리가 시를 읽는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시를 통하여 한 개인의 내면 세계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세계를 보는 시인의 지각∙사상∙감정이 결합되어 구현되는 창작행위의 소산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역사적 사건이나 사물, 혹은 자연현상 등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미적 경험을 통하여 재구성된 세계이다. 그러므로 한 권의 시집에는 한 시인의 개별적인 정서와 함께 당대의 보편적 정서가 함께 내포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달균 시인의 첫 시집인 『남해행(南海行)이 보여주고 있는 세계인식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한 마디로 부정적 세계인식 속에서 싹튼 비극적 낭만의 서정 세계라 할 수 있다.

이달균 시의 시간적 배경은 대부분?겨울?이다. 겨울의 음산한 풍경은 현실의 어두움을 암시한다. 시집 전편을 통하여 제시되는 남쪽의 어느 바닷가 소읍이라는 공간적 배경 또한 암울하다. 이러한 배경들은 낭만적 시어들을 불러내기에 매우 적절한 시간과 공간이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저녁??바닷가??안개??눈?등의 시어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이 드러내고 있는 낭만적 정서는 겨울로 상징되는 현실에 대한 절망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의 절망은 어디서 온 것일까.

 

지상의 마지막 마을에 닿았다.

 

...중략...

 

우리는 신(神)을 찾아 떠돈 날을 헤아렸고

주막거리 예수를 닮은 주인은 야윈 웃음으로

조용히 동방의 별을 얘기했다.

 

...중략...

 

보라. 친구여

명정한 눈물과 폐허로 유다의 세상이 열리고 있다.

바로 하늘이 용서한 모습인 채 그의 세상이

-「지상의 마지막 마을에서」에서

 

70, 80년대의 격변기를 거쳐 온 도시와 농촌은 어느 곳이든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시인이 처한 어촌 (시인은 경남 마산에서 성장하여 생활하고 있다.) 역시 도시화의 물결에 의하여 기존 질서의 붕괴와 가치관의 상실이라는 변화를 겪는다. 이에 따른 실향의식과 현실에 대한 괴리감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지면서 시인에게 절망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시인은 ?지상의 마지막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이제?신을 찾아 떠돈 날?도 끝이 났다.?눈물과 폐허?위에 세워지는 새로운 세계는 어떤 희망도 갖지 못하는 현실이라고 시인은 절망한다. 기존의 질서를 만든 창조자마저도 이제는 거부할 수 없는 낯선?세상이 열린?것이다.

 

단군 할아버지를 만나러 아사달(阿斯達)엘 갔습니다.

할아버지는 허물어진 성터 한 모퉁이에서

저녁 노을에 기와를 굽고 계셨습니다.

 

...중략...

 

성긴 수염에 하관이 빠른 할아버지는

소문처럼,

하늘에서 툭! 하며 떨어진, 천도복숭아 같은

거룩한 지체와는 도무지 이가 맞지 않는,

그저 흙으로 기와나 구워서 바람비나 막아주는

그래서 막걸리나 한 사발 나누고 싶은

따숩고 행복한 노인으로 살아계셨습니다.

-「단군(檀君) 할아버지」에서

 

?아사달?은 단군의 도읍지로 신화 속의 지명이다. 이곳은 시원적 자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이며 원초적 낙원이다. 절망하는 시인이 찾아간 곳은 어떤 문명도 배제된 역사의 시발점, 즉 인간 삶의 근원처이다. 그러나 시인이 절대적 존재로 믿고 있던 신(단군)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소시민이 되어 있다. (「겨울선창의 ?무학산 신령?도 같은 모습이다.) 그는 기와를 굽는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하늘에서 툭! 하며 떨어진, 천도복숭아 같은 거룩한 지체와는 도무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신은 신성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 그러나 정작 그런 신은 별반 불만이 없다. 신성한 신화 공간마저도 현실 공간으로 바뀌어 버린 곳에서, 신은 삶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없이?행복한 노인?으로 살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신은 어떤 구원도 기대할 수 없는 대상이 된 것이다. 그것은 시인 자신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다.

이 시집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겨울 이미지들은 춥고 배고픔으로 결핍된 삶의 현장을 제시한다. (다수의 가을도 겨울과 같은 이미지로 쓰이고 있으며, 시집 전체를 통하여 봄 이미지는 단 한편도 없다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삶에 대한 시인의 저항은 다분히 소극적이다. 그러나 그다지 크지 않은 시인의 목소리는 일상적, 경험적 사실인식으로 표현되는 이미지들로 깊고도 진솔하다. 시인의 절망적 탄식은 시인의 감수성이라는 토양에서 자라난 나무처럼 조용하고 섬세하다.

 

포기하자 갯가에서 다량의 수면제에 취한 나무들. 점액질의 엉킨 바닷풀 혹은 문 닫은 말미잘의 꿈. 몇 마리 털 뽑힌 새들이 날아갔다. 가을과 함께 낙엽을 떨어뜨리고 낙엽처럼 우리도 최후의 고개를 떨구고 돌아오는 길엔 바다로 향한 목책 팻말이 하나 서 있었다./ -이곳에서 해수욕 및 어패류의 채취를 금함.-

-「K시(市)의 바다에서

 

어부들은 저마다 헐거워진 마음에 나사를 조이고

일상(日常)의 닻을 당겨 올리면

허공에 던진 그물에 핀

꽃바람 한 송이 입에 문 노인의 도포자락 속에서

터덜터덜 무학산 신령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마수걸이 선장의 해장술 냄새와

백발에 묻은 눈을 훌훌 털어 내리며

-「겨울선창에서

 

두어 평 남짓한 방과 부엌,

남기고 가는 것이라곤

허리를 조이던 나일론 끈과

지나온 길들의 돌부리에 닳는 신발 한 짝

우리가 밤이면 꿈속처럼 바라보던

먼 산 위의 불빛이 고운 마을로

나의 중략만큼 깨어서 흔들리는 봇짐을 지고

하염없이 신작로를 따라

산복도로행 버스를 기다렸다

-「오뉘들의 사글세방에 피는 꽃불에서

 

「K시(市)의 바다는 제목에서 드러나 있듯 바다라는 자연적 환경이 시(市)라는 행정 구역으로 도시화 된 곳이다. 시인은 자본주의적 질서로 세워지고 있는 낯선 도시를 불안하게 보고 있다. 그러나 그 불안을 상황으로부터 분리하여 인간의 존재조건으로 설정하려는 시인의 의도가 보인다.?일상의 닻을 당겨 올리?고 나서는?산복도로?는 시인이 스스로 가려는 길이다. 이는 거부할 수 없는?불빛이 고운 마을?이 있는 곳이다. 위의 세 편의 시를 통하여 점차적으로 나타나듯, 절망의 근본적인 원인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태도는 곧 격렬한 저항이 아닌 수용이라는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이제?이름 없는 별이 되어??길 떠날 채비를 하?(「하구)?지나온 몇 뙈기의 과거를 잊기로 한다?. (「보리를 베며)

 

지나온 몇 뙈기의 과거를 잊기로 한다

 

이랑이다 다발로 선 뙤약볕, 맹복의

풀여치 울음을 베어버리고

갈수록 허황한 삶의 뿌리

그 베이지 않는 흙살도 베어낸다

수천 년 찍혀온 낫날, 저 등등한 맥박 아래 오늘은

순종하라. 부릅뜬 대장장이 눈알도, 낙동강 싱싱한 강

줄기도, 대산(代山) 벌 억센 사투리도, 무시로 자라는

무성한 죽순들도 무수히 순종하라.

 

...중략...

 

딛고 온 우리 역사의 밭이랑

그 기행의 흔적은 보이지 않으리

-「보리를 베며에서

 

자조적 삶은 새로운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삶의 뿌리?인 ?흙살도 베어낸?시인에게?역사의 밭이랑/그 기행의 흔적?은 사라진다. 이제 시인은 과거와 단절된 채 세계에 대한 어떠한 발언권도 빼앗긴 ?실업자?(「실업자)이며 ?개미?(「개미사냥)이기도 하고 ?세일즈 맨?(「남해행)이거나,?시대의 사랑받는 재수생?(「그해 가을 우리는) 또는?허수아비?(「허수아비)인 것이다.

 

햇살은 오후의 뼈다귀를 건져 올리고

 

몇 방울의 땀을 훔치던 꽃게

 

파르르 팔뚝의 혈관이 떨고 있었지

 

언제까지나 무심히 손금사이로 기어다녔지.

-「남해바다의 기억」에서

 

코린트풍의 온실엔 화초처럼 아이들이 자라나고

체온계를 문 칸나 같은 소녀들이

열대어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향료를 뿌릴 때마다

오렌지를 닮아 가는 여인이 양변기에 앉아

가늘고 긴 손톱을 세공하는 모양을

나는 차츰 앙증스런 악세서리 마냥 바라보았다.

-「사육∙1에서

 

손위에 놓인?꽃게?는 시인 자신이다. 시인은 누군가의 손에 잡혀 자유의 몸짓을 구하지만 어떠한 힘도 발휘할 수 없이 무력하다. 꽃게의 일상을 묘사하는 시인의 감성은 산업화의 주범을 손으로 암시하면서 도시의 통제체제를 ?손금?으로 비유하는 섬세한 감각을 보여준다. 꽃게를 잡고 있는 손이나 ?여인?은 거대한 자본의 상징이다. 시인은 아예 새로운 질서에 의해 잘 다듬어진 욕망의 도시에 살고 있으며?온실??화초??체온계??열대어??향료??세공??오렌지??양변기?등은 시인에게 최음제와도 같은 도시화의 소도구들이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구조 속에서 시인의 삶은 사육되고 있는 한 마리 애완용이라는 설정이 섬뜩하다.

그 동안 도시화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시인들의 감수성은 절규나 분노 등의 적극적 항변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또는 좌절과 절망이라는 소극적 침묵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이달균 시인은 후자의 경우로 어떠한 역사적 전망도 제시하지 못한 채 상실감과 무력감이라는 다분히 소극적 부정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시인은 현실 대응에 따른 울분이나 의지의 토로보다는 현실 관망을 통한 수용의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이 같은 수용의 자세는 시 세계의 내용 뿐 아니라 시 쓰기의 형식에서도 드러난다. 시인은 향토적 감수성(예를 들면 「남해바다의 기억등)을 바탕으로 시 쓰기를 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도시적 감수성(「사육∙1등)을 함께 보여주기도 한다. 산문시 형태를 취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데 이는 시인의 의식 자체가 도시화 되어가고 있는 데서 오는 시작 방법의 변화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세는 움직임의 자세라기보다는 오히려 멈춤의 자세를 지향한다. 자본주의적 일상과 농경적 사유가 공존하는 틈에서 시인의 의식은 정지되었으며?부동의세상?(「겨울풍경)을 보고 있다. 그러므로 사진의 한 컷처럼 풍경의 어떤 순간을 그려내는 몇 편의 시들은 우연한 것이 아닌 것이다. 이는 이달균 시의 또 다른 모습으로 섬세한 묘사와 이미지로 형상화된 시편 「K화집(畵集)에서-1.원근법」,「밀물등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시인의 몸부림은 비극적 실존의 주관성에 집착하면서 내면의 심리를 드러내는 내적 독백의 형태로 나아간다. 이것은 비극적 낭만주의의 길로 향하는 길이다. ?공원이나 도서관?이 있는 도시의 한 가운데서 어린 시절 띄워 보낸 ?종이배?를 기다리는 시인의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종이배를 접어 띄우고는 언젠가 나의 배가

다시 내가 앉은 곳으로 오리라 믿으면서 집으로 갔다

 

...중략...

 

이젠 차라리 꿈을 갖지 않으리란 꿈 하나를

오래 오래 지니게 되었다.

-「종이배」에서

 

내일도 모레도 그저 누가 떠나고

나완 상관없는 누가 또 돌아오고

그래서 행복한 나는

내 몫의 절망을 안고

공원이나 도서관 근처를 헤매이다가

주린 바람처럼 사납게 울고 싶었다.

-「권태」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지금?은 어떤 독립된 순간이 아니다. 과거와 미래가 밀접하게 연결된 시간이다. 안이면서 밖으로 연결된 뫼비우스 띠처럼?어제의 문을 열면 내일?(「벼랑에서) 이 보이는 현재는 계속되고 있는 과거이며 미래이기도 하다. 이 시집에서 보여주는?겨울?이라는 개념 또한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사계절 중 한 계절이 아니라 시인의 의식 속에 자리한 봄ㆍ여름ㆍ가을의 어느 곳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결핍의 시간 모두를 일컫는 것이다. 시인은 이 결핍의 시간들을 채워 줄 구원의 방법을 찾게 되는데 이는 자연현상으로 제시되는 초월적 사랑이다. 이것은 시집 곳곳에서 흰색으로 상징되면서?눈?으로 나타나는데, 시인은 사랑을 발견하기도 하고 스스로 사랑이 되고자 하기도 한다.

 

한밤에 내리는 눈은 사랑이다.

기적은 지나버리고 그래도 눈 내리는 레일을 따라

지상(地上)의 못내 잠들지 못한 심장의 고동을 들으며

 

...중략...

 

새들의 비상(飛翔)을 예언하여라. 눈이여, 이 고장에 돌아와

묻히는 눈이여, 스스로 수억의 허무(虛無)를 떨쳐버리고

여기 아리따운 사랑 하나를 마련하나니

 

...중략...

 

나의 등을 따사로이 밟아 줄 눈을 밟으며

지금 내가 가는데

-「눈을 밟으며에서

 

눈이 내린다

...중략...

스스로 내리는 눈발에 녹은

내 눈물 더욱 뜨거이 녹이며

우리 부질없는 발자국 덮으며

 

...중략...

 

난 이제 가슴으로 져 내릴

고운 한 송이 눈이 되겠네.

약하고 약한 한 송이 눈으로 내려

어둠의 길 함께 걷는

그대들의 어깨 위에

추억처럼 포근히 내려 주겠네.

-「눈에서

 

누군가 어제의 문을 열고 있다.

내일의 기가 보이는 어귀에서 낡은 얘기들은 삼삼오오 떼지어 달아난다.

 

...중략...

 

아. 눈물과 함께 하늘에선 더욱 차가운 것들을 녹이며 눈이 내리고 있다.

-「벼랑에서에서

 

신화적 공간마저 사라진 도시의 골목에 눈이 내린다. 지금까지의 모든 고통과 절망을 덮어줄 대자연의?눈?은 ?이 고장에 돌아와 묻히는 눈?(「낯선 도시)이다. 눈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겹다. 눈은 겨울에 내리는 것이지만 겨울을 덮는 따뜻함으로 시인이 끝까지 버릴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애정이다. 이는 곧 봄을 예견하는 몸짓이 아닌가. 이것은 절망 속에서 싹튼 시인의 서정으로 어떤 ?기다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달균 시는 한 시기를 거쳐 간 개인적 정서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당대의 사회적 감수성을 유려한 문체로 구사하고 있다. 이는 문학이 갖고 있어야 할 미학성과 사회적 반영이라는 역사성을 함께 함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낯선 세계를 보여주거나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한때 우리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다시 기억케 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절망은 낮은 목소리로 심연에 닿아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던 과거를 다녀오게 한다. 이것은 어떠한 역사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직하고 절실하게 진실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집에서 만나는 이달균의 겨울 바닷가는 쓸쓸하다. 아니, 오히려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