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평론

2015 유심시조 월평(7월호)-시조를 위한 엉뚱한 상상 - 이달균

이달균 2015. 6. 30. 14:15

2015 유심 7월호 월평

시조를 위한 엉뚱한 상상.

 

이 달 균

1.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될 것인가.

 

청춘FC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축구 선수이고 싶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희망이 좌절된 선수들에게 희망을 주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서류 지원에만 2,300여 명이 몰렸고, 서류 심사를 통과해 1차 오디션에 참가한 선수들만 해도 5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일반인에겐 흥미로운 관심 정도로 비춰지겠지만 참가 선수들에겐 마지막 희망을 거는 절박한 무대일 것이다. 축구선수라면 프로가 되어 돈과 이름을 얻고, 더 나아가 국가를 대표하여 명예를 드날리는 꿈을 이뤄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그 꿈은 헛발질에 날아간 신발이 되어 무대 뒤편으로 쓸쓸히 사라지고 만다면 그 절망이 오죽할까. 그들에게 멍석을 펴 재기의 기회를 준다니 앞 다투어 참가할밖에.

이달 월평을 쓰면서 실질적인 고민에 직면하였다. 시조 발표지면은 대부분 계간지이므로 월평 대상 작품이 많지 않다. 그 두어 달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 고통스럽다. 시 전문지에조차 시조가 실리지 않는다. 왜일까? 독자가 있으면 반드시 청탁이 있을 것이다. 필자를 포함한 시조인 모두의 통렬한 반성이 요구된다. 우리끼리 돌려 읽는 시조가 아닌 국민 모두에게 사랑받는 시조가 되어야 한다. 그 책임은 시조인 모두가 져야 한다.

청춘FC는 루저들의 경연장이다. 그들도 루저를 벗어나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몰려들고 있다. 700년의 역사를 가진 시조는 결코 루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일본의 하이쿠는 최고의 문학으로 존대 받고 있지 않은가. 꽃방석은 아니라도 초대받지 못한 손님을 되지 말아야 한다. 그 알맞은 처방은 무엇일까? 좋은 작품을 쓰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2. 예각의 날을 세워라.

 

 

초점 모아 바라보면 결이 삭은 세월 뜬다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라 하신 날도

 

지상엔 마른 혼들이 개펄처럼 주름졌지

 

 

물결 따라 흔들리며 닿지 못한 사랑이여

 

푸른 밤을 떠받치던 흰 뼈의 시간들이

 

귀 닫은 시대를 향해 각을 세운 절 결정結晶

 

 

이 가을 식탁에 놓인 미완의 국물에다

 

반 숟갈 숨결 풀자 간이 오른 그날 말씀

 

한 그릇 완성을 위해 오래 참은 맛을 본다

                              -정해송,「소금」(《정형시학》2015년 6월호)

 

 

묵계,

라고 쓰는데 손가락이 아리다

 

느낌 같은 산새 울음

적막으로 돌아오는 매서움

눈발도 벌벌 떨다가 벼랑을 기어오른다

 

수백 척 암두에서 관절을 꺾고 뛰어내리는

 

서슬 푸른 침묵의 뼈 얼어터지는 꽃잎들

 

잠자던 멧노랑나비 속눈 떴다 감는다

 

-강경주,「묵계黙契」(시집『묵계黙契』)

 

정해송 시인에게 소금은 무엇인가. 진리의 성전이라 한 성경 속의 결정인가 아니면 설탕의 대척점에 선 돌올한 뼈대인가. 시인은 국 한 그릇의 미감을 위해 소금을 치면서도 많은 상상을 한다. 첫수 초장을 여는 ‘결이 삭은 세월’은 한 줌 소금이 식탁에 오르기까지 거쳐야 할 시간을 곱씹게 한다. 소금의 말씀 한 마디로 세상의 메마른 혼은 갯벌로 흘러 깨달음에 이르게 하고, 부패로의 시간을 제어 한다. 물이 끓고 소금간이 필요한 때에 이르면 ‘푸른 밤을 떠받치던 흰 뼈의 시간들’을 생각하며 이 작은 결정結晶보다 못한 ‘귀 닫은 시대’의 사람들을 일깨우고 싶다. 일용할 한 끼 식사를 위해 국 한 그릇을 준비하면서 이런 저런 상념에 잠긴다. 아내가 외출한 날 혼자 식사를 준비하는 허전한 남자의 모습을 노래하기보다 소금 한 숟갈을 치면서 부패한 세상을 향해 굳건한 뼈대를 세우고 싶어 한다.

강경주 시인의 시에서도 그런 상상력을 본다. 이 시는 올해 펴낸 시집의 표제시다. 84년 등단 이후 8권의 시조집을 상재하였으니 부단히 시조의 이랑을 일구었다. 이 시인의 시들은 묵중한 물음으로 다가온다. 위 시 역시 떠나보낼 것 다 떠나보내고 뼈대만 남은 겨울을 그려낸다. 그런데도 처연하거나 앙상한 모양은 아니다. ‘묵계’는 침묵의 계곡을 말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암묵적으로 공감하는 의미의 묵계로 읽히기도 한다. 그냥 얼어붙은 겨울 계곡을 지나면서 ‘손가락이 아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얼붙은 폭포 앞에서 시인은 눈발의 역류를 본다. 산새울음은 적막을 넘어 매섭기까지 하고 거꾸로 ‘벼랑을 기어오’르는 눈의 안간힘을 바라본다. 그 지난함 속에서도 언 폭포의 무릎을 뚫고 봄을 향한 물의 역주는 계속된다.

두 시인은 공히 강건한 의지를 드러낸다. 정해송 시인은 한 줌 소금으로, 강경주 시인은 얼어버린 폭포를 뚫고 나오는 물의 의지를 보면서 시대 앞에서 눈감은 이들을 향해 예각의 날을 세운다. 공교롭게도 두 시인은 고독 속에서 ‘푸른 밤을 떠받치던 흰 뼈의 시간’(소금)과 ‘서슬 푸른 침묵의 뼈’(묵계)라는 강건한 이미지를 얻는다.

 

3. 나무와 꽃을 바라보는 두 관점.

 

임종의 당신께서 이토록 마르시길

 

내 안에 불려주신 영육靈肉의 그루갈이,

 

간추려 다 물려주신 그 가난이 늡늡하다

 

 

숲에는 단풍이 진 뒤 뼈와 살이 정갈하다

 

털어서 털어내서 나눠서 되물려서

 

바람도 느껴 읽느니 문자文字로 선 나무들

 

아담의 갈비뼈 하나 나눠 얻은 이브처럼

 

겨울 숲 삭정가지는 아궁이의 군불을 대고

 

그 재를 물에 타 마신 숲에서는 꽃이 버네

 

-유종인,「간자체間子體」(《정형시학》2015. 봄호)

 

유종인이 읽은 간자체는 잎 다 떨궈 낸 겨울나무숲이거나 ‘영육의 그루갈이’ 를 마치고 최후와 마주한 어떤 대상이다. ‘불려주신 영육은’ 두 벌 갈이를 하였고, 뼈만 간추려 ‘물려준 가난은’ ‘늡늡하기만 하다’. 여기서 ‘가난’과 ‘늡늡’함은 대척점에 선 시어이므로 한 문장 속에 녹여내는데 문제가 있기에 유의해 읽어야 한다. 즉, 마르고 간추려진 유산은 가난한 것이지만 불려준 영육은 쏠쏠하고 늡늡한 그 무엇이다.

간자체는 알기 쉽게 변형한 표의문자表意文字이므로 문자의 모습만으로도 뜻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문자文字로 선 나무들’을 ‘바람도 느껴 읽’을 수 있다. ‘겨울 숲 삭정가지’는 땔감이 되고, 다시 그 재를 마신 숲은 꽃을 낳는다. 이 구절은 한용운이 ‘알 수 없어요’에서 노래한 인연법처럼 읽힌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라고 물으며 결구를 짓는 시처럼 아담의 갈비뼈는 아궁이의 군불이 되는 삭정이로, 다시 재가 되어 봄에 벙그는 꽃잎으로 나아간다. 깡마른 당신은 영과 육으로 분리되어 육은 숲을 살찌우는 거름이 되며, 영은 문자의 향기를 통해 꽃으로 피어나기를 바라는 염원을 노래한다.

 

 

어쩌자고 그냥 그런 꽃이 되자 했던가요

 

한 사날 그뿐인 봄 그토록 달이다가

 

사무쳐 자홍紫紅에 사무쳐 딸꾹질로 지는 꽃

 

우조든 계면조든 그 나름의 봄이라고

 

삼백 리 먼 물길을 넌지시 당겨놓고

 

달려와 이냥 달려와 명치끝에 꽂히는 말

 

떠날 즈음해서는 하 그리 치근대더니

 

어제 오늘 아니라도 하제면 고대 지고 말

 

그런 꽃, 그냥 그런 꽃, 그런 꽃이 되자고요

 

-한분옥,「그냥 그런 꽃」(《문학청춘》2015년 봄호)

 

유종인이 간자체로 피어나는 영육의 봄꽃을 노래했다면 한분옥은 우면조나 계면조로 치근대는 봄을 맞는다. 뭉클한 서정으로 갈무리한 작품이지만 체취는 강렬하다. 메시지를 담지 않은 시처럼 읽히지만 내재된 아픔은 어떤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렇게 읽는 것 또한 섣부른 생각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 꽃은 채 다 피지 못한 미완의 꽃이다. 그러므로 그 꽃은 사무쳐 자홍紫紅에 사무쳐 딸꾹질로 지는 꽃’이며, 달려와 이냥 달려와 명치끝에 꽂히는 말’처럼 폐부를 찔러오는 꽃이다. 가장 복된 꽃은 ‘그냥 그런’ 예사로운 꽃으로 천수를 다하고 지는 들꽃이 아닐까. 시인은 감정 죽이고 그저 그런 예사로운 꽃이고 싶지만 여기서 지는 꽃은 ‘한 사날’ 달이고 달인 붉은 약처럼 아리고 쓴 꽃이다.

시조 창작이 어려운 것은 종장에서 결구를 맺어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충 얼버무리며 장을 맺는 오류를 범하는 시들이 많다. 그에 비해 이 시는 구와 장을 제대로 맺는 미덕을 보여준다. 마디를 이어가는 솜씨는 제대로 가락을 살아 있게 한다. 이 시인 또한 나이에 비해 늦게 문단에 나왔으나 작품을 빚는 능력은 믿음을 준다. 시조는 촌철살인의 묘미도 좋지만 쟁이고 갈무리하여 빚어낼 때 더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다.

 

4. 균형을 가진 시인.

 

 

가만히 귀 대 보면 나처럼 울고 있다

 

닿으려면 멀어지는 저 물길 파장波長 따라

 

징-지징 무쇠소리로 아버지가 울고 있다

 

 

밤무대 여가수처럼 목이 쉰 어머니가 밤마다 부두에 나와 노래를 하시는지

 

버텨 온 아랫도리가

 

흠뻑 다 젖었다

-황영숙,「등대」(《서정과현실》2015년 상반기호)

 

수용성 알약이다 눈 감고 꼴깍, 그렇지

하루치 권장량은 1000 밀리그램이다

고단위 처방일수록 사랑의 농도는 짙다

작업은 끝이 없고 언제나 시작만 있다

은밀히 부드럽게 영원히 침묵하라

원죄는 뇌물이지만 쌍방이 더 치명적이다

사과엔 비타민이 많아 사과상자가 원조다

준 놈도 먹은 놈도 누이 매부 다 좋아야 한다

영원한 약발은 없다 날마다 복용하시라

지문도 주인도 없어 배달사고는 가끔 있다

꿩 먹고 알 먹어놓고 오리발 내밀 때 있다

내 잠시 치매가 왔나, 박스 얘길 한다는 게           

-최영효,「비타 500」(《시조21》2015년 여름호)

 

황영숙의 ‘등대’는 근래 드물게 보는 가작이다. 등대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빛으로 길을 여는 등대를 소리로 느끼는 시인의 감각이 돋보인다. 그렇다고 등대가 큰 소리로 우는 것은 아니다. 미세한 누군가의 설움을 가진 울림으로 들린다. 물길이 그렇듯 다가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가늘게 떨리는 울음은 우리 아버지의 것이다. 자식 앞에서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우리 아버지의 울음은 목쉰 무쇠소리를 닮았다. 둘째 수에 오면 아버지의 울음은 어머니의 울음으로 치환된다. 그 울음은 ‘밤무대 여가수’의 노래를 닮아 있다. 앞앞이 다 말 못한 사연은 묻어두고 세월을 ‘버텨 온 아랫도리가//흠뻑 다’ 젖은 채로.

이 작품을 대하면서 둘째 수에서 어머니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첫수의 아버지 이미지 하나로 끝을 맺었으면 더 간명한 작품이 되었으리라. 또한 둘째 수 초 중장에 관한 부분도 지적하고 싶다. 첫수에선 아버지를 말하면서 초·중장을 구분했는데, 여기서는 구분하지 않고 붙여 놓았다. 첫수와 둘째 수는 아버지와 어머니 두 이미지의 대등한 등가를 이루는데 굳이 이런 식으로 장을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이런 변형이 필요할 때는 꼭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 시에서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점은 유의해야할 부분이다.

최영효 시인은 늦게(2000년) 등단했지만 가장 괄목할 성장을 보여준 시인이다. 짧은 기간 동안 열심히 시조의 밭을 일구었고, 2014년에 펴낸 두 번 째 시집『노다지라예』는 땀 흘린 만큼의 평가를 얻고 있다. 하나의 주제를 끝까지 밀고 가는 힘이 좋고, 나이에 비해 젊고 역동적이다. 거기에다 역사성과 시대성을 노래하면서도 풍자와 위트를 잊지 않는 미덕이 돋보인다. 이 작품 역시 그런 특징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 사과박스 속의 뇌물은 무거울수록 결과는 크게 보장받는다. 마지막 행에선 할 말 다해 놓고 짐짓 아직 할 말이 남은 것처럼 ‘내 잠시 치매가 왔나, 박스 얘길 한다는 게’하면서 눙치는 재미도 있다. 세상을 뒤흔드는 사건이 생길 때마다 그와 관련된 시들은 넘쳐난다. 세월호 침몰사고가 났을 때 그 주제의 시들이 많았던 것처럼 성완종 사건이 대한민국을 뿌리째 흔들면서 이런 시가 생산되는 것은 당연하다.

앞서 말했듯이 그동안 최영효 시인은 시조의 이랑을 착실히 일구어 오면서 자신만의 영역을 얻었다. 여성성에 매몰되지 않은 건강한 남성성, 시대의 거울이 되는 풍자성, 이미지에 함몰되지 않는 역동성 등 그만의 장점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이번 시는 너무 뻔하다. 전혀 다른 끝맺음으로 콩트처럼 절묘한 뒤통수를 치는 한수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 시인에게 한 마디 더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그런 장점 못지않게 섬세하고 내밀한 시적 완성도, 즉 심미안이 두드러지는 작품도 함께 선보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예술의 궁극은 결국 아름다움에 닿는 것이 아닌가. 이 두 균형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5. 복면가왕처럼.

 

시는 시력으로 빛나지 않는다. 그 시력이란 또한 문단 등단과는 별개다. 등단이 늦어도 습작 기간이 긴 시인이 있고, 시력이 길어도 관록에 상상력이 갇혀버리는 시인도 많다. 위에 거론한 몇 몇 시인들은 등단 연도와 관계없이 향기로운 작품을 빚어내는 시인들이다.

복면가왕이란 TV프로그램이 생각난다. 기성과 신인 누구라도 복면만 쓰면 경연에 참가할 수 있다. 관록으로 노래하는 기성가수는 신인의 초심으로 돌아가고, 한때 무대의 주인공이었다가 지금은 추억을 먹고사는 가수에겐 재기의 기회가 된다. 거기에다 떼 지어 춤추고 노래하는 걸 그룹의 한 일원은 솔로로 노래하는 갈증을 채울 수 있고, 노래에 소질 있는 배우는 노래솜씨를 뽐낼 수도 있어 무대는 진지해진다. 연예인 평가단의 점수에다 일반인 평가단의 점수가 더해지므로 객관적인 검증을 받을 수도 있다.

이를 문단의 입장으로 옮겨보면 이름 가리고 데뷔지도 묻지 않고 맞짱 한번 떠보면 어떨까? 수많은 문예지에서 신인을 배출하고 있지만 그들이 눈길을 받기란 쉽지 않다. 어쩌다 운이 좋아 신인을 주목하는 난을 가져도 그 또한 잠시 뿐, 금방 잊히고 만다. 그래서 싹수있는 이들은 문단을 외면하며 떠나버리고 늘 보던 얼굴들의 잔치가 되어간다.

필자는 이런 상상을 해본다. 문단에도 복면가왕의 경연장을 펼쳐보면 어떨까.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상償이다. 시조단의 상금은 최고권위를 가져도 1,000만원을 넘지 않는다. 그러니 그보다 더 많은 상금을 걸고 한번쯤 경연을 벌여보는 것이다. 심사위원은 평론가와 시조인 한 그룹과 대학 문창과 학생들 100명 정도를 꾸려 무기명 투표를 하여 시조왕을 뽑는 상상, 흥미롭지 않은가?

시조를 걱정하면서 단수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이들이 많다. 그렇다면 이 경연엔 단수만 20여 수를 내어 펼친다면 시조의 변별성도 얻고 대중화도 이루는 두 가지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 새로운 관심은 변화 없인 이뤄지지 않는다. 획기적인 변화를 통해 시조 700년의 위의를 되살리고 전국적인 이목도 꾀할 수 있다면 한번쯤 시도해 봐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스타가 탄생되고 그로인해 장르의 중요성이 부각된다면 진정한 시조의 축제가 되지 않을까?

 

 

 

이달균

moon1509@korea.kr

1987년 시집《남해행(南海行》과 무크지《지평》으로 문단활동 시작. 시집《문자의 파편》외 4권, 영화에세이집《영화, 포장마차에서의 즐거운 수다》가 있음. 중앙시조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