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문학 여행

창녕-문화재처럼 찬연한 문인들의 태묘-6

이달균 2011. 9. 2. 14:46

6.

 

    들녘 저 편 귀동마을에도

    영락없이 비가 오고

    소나기에 젖어 달려가는 신작로 읍내버스

    목이 쉬어 울지 못하는 청개구리들은

    무학소주에 취해 돌아오는 중대본부 예비군이 되어

    무질서로 흩어진다.

    우리 마을 몇 안 되는 젊은 남편들이

    돌아오는 농로에서 날리는 기침소리를

    도무지 듣지 못하는 젊은 아내들이

    발목을 끌며 물 고인 농로 이리저리

    통고무신 발자국 어지럽게 찍는 초저녁

    청개구리 동원예비군들이

    술에 취해 일제히 항복하는

    맥산에서 석동까지

    막무가내로 쏟아지는 칠월 소나기.

        

           - 성기각「맥산에서 석동까지」전문


 창녕 출신의 또 한 사람의 젊은 시인 성기각을 생각했다. 양파가 주 생산품인 창녕. 양파 파동이 나면 추수기의 양파들을 그대로 갈아엎는 농부들의 분노가 TV화면에 비치곤 한다.

 성기각은 농촌 정서 가득한 시를 쓴다. 비료창고 앞에서 경운기 세워놓고 조합 김주임 기다리는 청신 아재며 술 취한 석동예비군들, 논두렁에 쑥부쟁이 깔고 앉아 노을 바라보는 팔순의 아버지 등등. 그가 찾아가는 사람들은 지금도 창녕에 뿌리 박고 사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다.


유어면에서 다시 이방으로 나와 우포늪으로 향했다. 늪은 지구의 숨구멍이다. 늪의 정화작용으로 인해 대지는 새 숨을 쉴 수 있는 것이다. 이 늪은 국내에서 제일 크고 자연 생태계 모니터링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1,655,000㎡의 면적에 온갖 희귀식물들이 산다. 우포늪에 사는 가시연꽃은 잎의 직경이 1m가 넘는다.

 

우포 사람들은

늪과 함께 하루를 연다

물안개 자욱한 새벽

쪽배를 타고

마름과 생이가래, 개구리밥이 만든 초록의 비단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 고기를 잡고

늪바닥이나 수초 줄기에 붙은 고둥을 건져 올린다

그들에게 늪은

모든 것을 내주고

그들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아침이 오고, 사방 곳곳

타악 탁, 탁 습지식물들의 씨방 터지는 소리

장대로 배를 밀며 귀가하는

등 뒤, 은전銀錢처럼 빛나는 햇살 더미가

삶의 무게 터트려 주는 것인가

기우뚱, 한쪽으로 기운

낡은 쪽배의

저 중심

늪은, 우포 사람들의 일생을 안다


   -배한봉「우포 사람들」전문


    지금은 우포 지킴이나 환경단체, 문인들에 의해 너무나 많이 알려진 명소가 되었지만, 내가 처음 우포를 찾아갔을 때는 그야말로 버려져 숨 쉬는 경이로운 늪이었다. “나중에 쇠벌에 가서 미꾸라지라도 잡아와야지 저녁거리가 없어서...”그랬다. 그들에겐 우포가 아니라 쇠벌이었다.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들어온 이름, 거기서 고동이나 민물고기들을 잡아 찬거리로 내다팔기도 했으리라. 이방면사무소에서 들은 쇠벌을 찾아 그곳으로 갔다. 

  

  양복을 입고 가방을 든 채 버스를 타고 걸어서 우포늪으로 갔다. 경운기 한 대가 겨우 다니는 논두렁을 따라 걸으면 냇버들 잎새들이 물에 닿는 늪의 초입이 보인다. 지금은 둑의 풀들이 다 없어졌지만, 이때는 내 키의 한 질이 되는 풀들이 자라 있었다. 서녘 햇살에 빛나는 억새들을 헤치고 바라본 가을 우포늪은 장관이었다. 그곳에서 오래도록 황혼에 파묻혀 서 있었다.

 

  나는 이때의 감동이 너무 커 아직 한 편의 우포시도 쓰지 못했다. 너무 벅차면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이. 갑자기 내가 두고 온, 그래서 영영 사라져 버린 내 유년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늪이 현실로 살아있던 것이었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 고향을 생각했다. 늪에는 먹을 것이 더러 있었다. 연뿌리와 물밤은 훌륭한 간식이었다. 마름모꼴로 생긴 물밤은 가시가 있긴 했지만, 삶으면 달큰한 맛이 났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연밭에서 캐낸 연뿌리에 비할 것인가? 끼니 대용으로 먹기도 했지만, 사카린과 소다를 뿌려 삶아 먹으면 흰 줄이 술술 늘어나는 그 부드러운 맛이라니!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찾아간 고향의 늪들은 이미 경지정리로 인해 논으로 변해 있었다. 어른들이야 소출 좋은 논으로 변한 들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왔겠지만, 나는 왠지 허전하여 가만히 둑 위에 서 있었다.

  

   우포늪에서 다시 영산으로 내려와 만년교를 만났다. 1780년 조성된 다리로 선암사 돌다리에 버금갈 만큼 잘 축조되었다고 한다. 영산 사람들은 이웃의 개업이나 좋은 날에는 이 돌다리의 사진을 선물하여 축하해준다고 하는데 지역 문화를 사랑하는 창녕인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서 듣는 이도 흐뭇하다.

 

  창녕은 돌아볼 곳도 많고 짚어내야 할 문인도 많다. 하지만 내 하루의 여정이 끝남을 알리듯 노을이 붉다. 저 붉은 노을이 발원한 곳을 향해 차를 몰아야 한다. 옥천 골짜기 위 할머니 보리밥집에서 허기를 채우고 생활이 기다리는 도시로 가야한다.

 

  창녕 출신 성윤석 시인의 시집을 뽑아들었다. 그는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낡아가는 나’ 혹은 ‘삭아가는 나’를 저만치 거리를 두고 비춰보게 한다. 우리를 조롱했던 구름들은 너무 붉어서 이미 구름이 아닌듯했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상인은 눈빛을 거둬가는 구름떼를 고려해야

    했다. 낯선 이들에겐 동네조차 몸을 감춘다.

    오후의 도시를 통과하는 트럭 위의 화환들

    꽃을 말리는 것은 우리가 하찮아졌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서 우리는 활자가

    꿈틀거려 보이는 증상을 얻었지. 아마.

    저녘이 가게 불빛들은 무엇으로도

    살 수 없다. 나는 괜찮았지만

    상인商人은 의자를 바꿔 내준다. 누가 있다.

    사라진 자리는 늘 간지럽다. 녹슬어가는

    소리 속삭이는 의자.

 

           - 성윤석「아무 일도 하지 않기 위한 산책」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