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목에서 도래재를 본다. -이재금 시비(詩碑)를 찾아
이 달 균
이재금 시비 찾아간다.
멀리 긴늪에서 빠져나온 솔밭이 보이고 조금 가까이엔 수시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KTX가 지나는 철길이 보인다. 더 가까이엔 용두목을 돌아가는 남천강이 한가롭다. 뒤쪽으로는 아파트 숲이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강을 에둘러 싼 둑에 가려 제법 호젓한 경치를 연출한다.
처음 이곳에 시비를 세울 땐 너무 강이 가까워 범람을 걱정하기도 했고, 사람들의 왕래가 적어 외따로 서 있지나 않을까 저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이미 기우였음이 확인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간 날은 어린이들의 물장구소리가 꽤 소란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시비 앞 낮은 남천강엔 물놀이터를 만들어 두었으므로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간간이 여우비가 뿌리는 날씨였음에도 동심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둑과 연결된 이 솔밭은 건강을 위해 걷는 이들의 안성맞춤의 장소이므로 시비 주변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편이다.
시인을 생각한다. 빗돌에 새겨진 시는 조금 있다가 읽기로 하자. 곧바로 다가가면 음미하며 즐길 시간이 줄어든다. 밥도 뜸을 들이는 시간과 약간의 허기가 버무려 졌을 때 가장 맛있으니까.
이재금 시인은 시력에 비해 비교적 뒤늦게 알려진 시인이다. 일찍 문단활동을 하지 않은 탓이다. 서라벌 예대를 졸업하고 향리에 와 농사를 짓는 한편 오래 교편생활을 하였다. 느긋함이라기보다는 겸손한 성격 탓이리라. 시란 쉽게 다가갈 수도, 쉽게 이룰 수도 없는 것임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뒤늦은 활동이었지만 역시 서울이 아니라 밀양에서였다. 문학에 있어 변방이야 없다고들 하지만 서울을 아직도 중앙문단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솔직히 부인하긴 어렵다. 불혹이 훨씬 넘은 47세(1988년)에 첫 시집 『부끄러움을 팝니다』를 펴내었으니 지명도 면에서는 한참 뒤져 보인다.
그런 까닭으로 이재금 기념사업회가 꾸려지고 시비를 세울 때 인근의 혹자들은 과장되지 않았느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구설들은 이재금 시인이 지역사회와 후학들에게 끼친 영향을 몰라도 한참 몰랐기 때문에 나온 말들이다.
누가 뭐래도 이재금 시인은 밀양문학을 올곧게 지켜내고 뿌리를 뻗게 한 주역이다. 50년대 후반, 밀양엔 이운성, 예종숙, 박재호, 유종관 등이 주축이 된 ‘석화’ 동인이 있었다. 석화는 밀양에서 나는 꽃모양을 한 돌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이처럼 밀양을 표방하였지만 지역과 연관된 문학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박재호를 제외한 문인들은 개인 창작에도 그리 열정을 쏟지 못했다. 거기다가 대부분 이곳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게 되면서 밀양문학은 오랜 침체기에 빠져든다.
80년대 후반, 이재금 시인은 뜻있는 젊은 후학들을 이끌고 ‘밀양문학회’를 결성하여 이끌어 왔다. 밀양문학의 지킴이로서 문학적 토양을 조성한 것은 분명하다. 지역이 지역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문화적 전통이 있어야 하고 그 장점을 수용하고 계승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밀양이란 지역을 문학적 공간에 수용하게 한 선생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해 보인다.
탈, 탈, 탈
경운기가 간다.
탈도 없이 경운기가 간다.
앞니 빠진 손주놈이 몰고
어금니 빠진 할애비가 앉고
쌀 한 말과 바꿔 산
운동화 한 켤레 달고
흙먼지 흩날리며
경운기가 간다.
탈, 탈, 탈
탈도 없이
경운기가 간다.
-<경운기(1)> 전문
시는 영락없이 사람을 닮는다. 소탈하고 재미있다.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세상 속으로 탈탈거리며 경운기가 간다. 흙먼지 날리지만 아무도 시비 걸지 않는다. 동어 반복을 통해 손자와 할아버지의 부조화 속의 조화를 해학적으로 표현한다. 올바른 지역문화운동을 위한 굳은 의지와 대칭을 이루는 순수함은 선생의 또 다른 매력이었다. 수더분한 옷매무새와 머리칼, 금니가 슬쩍 보일 듯 웃는 미소, 잊혀지지 않는 그윽한 눈빛은 이 시 속에도 쉽게 드러난다.
이재금 시의 특징은 대부분 밀양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춤판’, ‘대추를 심으며’, ‘밀양백중놀이’, ‘아랑의 말’, ‘쑥국새 타령’, ‘농공지구’, ‘농촌소식’, ‘강변에서’, ‘영남루’, ‘하보경옹의 양반춤’ 등등 무작위로 도출해본 것들인데, 이들 거의 전부가 자신이 발 딛고 사는 지역에 관한 시들이다. 밀양을 연구하려면 이재금 시집 3권을 정독하면 알 수도 있을 듯하다. 이들 시집은 밀양의 역사, 인물, 현재와 미래 등등 묶으면 하나의 서사가 된다. 이는 바로 선생의 지역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우리 동네 삼바우는
진짜 촌놈이다.
벗고 죽으면 알귀신 될
알짜배기 촌놈이다.
논두렁 밭두렁 50년 세월
엉겅퀴 같이 눌러붙어
흙 파먹다 흙으로 간
쑥덤불 같은 촌놈이다.
.....<중략>.....
우리 동네 삼바우는
뒷북치는 촌놈이다.
논도 밭도 소도 팔자
깨춤 추는 촌놈이다.
부엉새 뜬 눈으로
새벽같이 술 처먹고
바람 앞에 숨을 거둔
원귀로 죽은 촌놈이다.
-이재금 <촌놈 삼바우> 부분
각 고을마다 이런 사람 하나쯤 있다. 고성 권덕수, 함안 문칠래, 창녕 남지 삼중이, 마산 바우 등등. 군수나 시장 이름은 몰라도 이들은 안다. 어쩌다 5일장 버스를 타도 그들은 돈을 내지 않는다. 밀양 촌놈 삼바우. 가진 것 없어 자다가 죽으면 바로 알귀신이다. 하지만 10연의 긴 시를 정독해 보면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삼바우는 촌놈 무지랭이지만 마산 바우처럼 모자라거나 고성 권덕수처럼 정신 나간 사람은 아니다. 그저 이곳에서 나서 이곳 땅 파먹고 살다가 죽은 보통사람을 말한다. 삼동에도 곳불 한 번 않고 난리나면 훈장 없어도 전장에 나가고 도리깨질에 밥 한 덩이면 흥이 나는 돌쇠 같은 사람이다. 한 마디로 촌놈 삼바우는 모자란 놈의 대명사가 아니라 우리가 흔히 보았던 대책없이 순진하고 흙을 닮은 농투산이의 대명사로 읽힌다.
법 없이도 잘 사는 우리네 이웃의 모습, 삼바우. 그래서 친근하다. 일부러 깍쟁이처럼 언어를 절제하지도 않았다. 메타포에 의존하지 않고 4.4조의 리듬을 살리면서 노동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촌놈 삼바우를 노래하면서 시인 스스로 촌 시인임을 천명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농촌 서정하면 젊은 농군의 처절한 절망, 혹은 시대와의 소통 불능에 의한 아득함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이재금의 시들은 밝고 건강하다. 농촌을 팔아서 자신을 포장하지도, 미디어를 동원하여 잇속을 계산하지도 않는다. 그저 밀양 땅의 한 시인일 뿐이었다.
시인을 생각하면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햇살에 몸을 뒤채는 강비늘에 눈길을 주거나 솔밭을 걸었다. 함께 간 고증식 시인이 이제 시비 앞에서 사진이라도 찍어야 되지 않느냐고 채근한다.
언양 땅 넘어가면 석남 고개
밀양 땅 넘어오면 도래재 고개
일흔일곱 굽이굽이
소쩍새 울어
실안개 피는 자락
눈물 맺힌다
돌아서서 가신님
돌아오는 고개
-<도래재> 전문
빗돌에 새겨진 시 ‘도래재’는 낯익고 정겹다. 김소월의 가락을 닮았는가 하면 시원을 따라가면 아리랑도 생각난다. 밀양아리랑이 생겨난 곳이므로 더욱 의미심장하다. 언양과 밀양에 걸쳐 있는 고갠가 보다. 흔히 영남알프스라고 불리는 산은 굽이가 많다. 가지산, 능동산, 천황산, 재약산, 영취산, 신불산, 간월산이 잇닿아 있는 밀양의 동쪽은 이별 고개이기도 했다. 언양, 울산, 양산에서 온 님은 어느 해 훌쩍 도래재 넘어 단봇짐을 싸기도 했으리라. 그래도 시인은 “돌아서서 가신님/돌아오는 고개”이기를 염원한다. “날 버리고 가시는 임 발병이나 나라.”고 노래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그래서 이 시는 밀양의 노래일 수 있는 것이다.
시를 고르면서 많은 고민이 있었는데 민영 선생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이 시를 추천하여 새기기로 하였다고 한다. 글자는 소설가 김춘복 선생께서 쓰셨는데, 평소 너무 가까운 후배였으므로 정성을 다했단다. 몇 번이나 먹을 갈고 붓을 다듬으며 화선지 30여장을 버려가며 완성한 글이란다. 설계는 선생의 세종고교 제자인 조각가 이정형씨가, 시공은 세흥건설이 담당했다.
김춘복 선생과 마주앉은 고증식 시인은 필자의 부탁에 따라 당시를 술회해 주었다. 시비 건립을 위한 부지와 석물은 밀양시가 제공키로 했다. 돈이 충분했다면 큰 문제가 없었겠지만 애초부터 자치단체가 주관하는 사업이 아니었으므로 부족한 경비에 맞추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유족 출연금 일부와 회원들의 모금으로 충당한 1000만원이 전부였다. 이는 설계비와 부지 경비를 뺀 순수공사비만으로 산출한 것이다. 하지만 가족과 고인을 사랑하는 문인 독자들의 정성에 의해 모아진 돈으로 건립하였으므로 그 의미는 훨씬 크다.
고증식 시인은 꿈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었다. 석물은 시에서 기증키로 했지만 외부에서 돈을 들여 사지 않고 수자원공사의 협조를 얻어 밀양의 것을 사용키로 하였다. 마침 조각가 김동환의 강변 조각공원 조성을 위해 쓸만한 돌들은 거의 다 빠져나간 후였다. 김춘복, 이광남, 이응인, 고증식 등은 틈틈이 짬을 내어 한마음으로 강변을 뒤졌지만 여의치 않았다. 간절한 열망 때문이었을까. 고증식 시인은 꿈에 둑방길에 누워있는 돌을 보았다. 그길로 찾아가 보니 둑방에 무성한 찔레무덤 속에 얼굴을 내민 돌을 발견하게 된다. 그 돌이 바로 시비의 빗돌이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97년 5월 23일 시비 제막이 있었다. 이곳은 시인이 생전에 좋아하던 장소로 손님이 오면 곧잘 술잔을 기울이던 곳이라 했다. 전적으로 관의 힘을 빌리지도 않았고, 독지가의 출연금도 없이 십시일반의 뜻으로 한 시인을 기린 것은 정말 뜻 깊은 일이다.
곶감 두어 줄 깎아 매달아놓고
시래기 주워다 두어 줄 걸고
나무도 소복이 처마 밑에 달았다
초여름에 담근 매실주 있는데
올 겨울 그리운 친구 오는 날
눈 장설로 내렸으면 좋겠다
-<山中日記3-겨울준비>전문
유고시집 『나는 어디 있는가』한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이 시집 역시 작고한 이듬해 후배들이 펴낸 책이다. 처연하다. 아직 죽음을 예감할 때는 아닌 듯한데 그 다감한 서정이 쓸쓸하다. 겨울 준비를 위해 곶감도 깎고, 시래기도 주워 걸고, 장작도 쟁여 놓았다. 매실주 담아 놓고 친구 기다린다.
몸이 아파 시내 집을 떠나 옛집 부북면 생가에서 조리하실 때다. 친구는 누구일까. 소설가 이문구, 혹은 한승원 선생일까. 평소 이문구 선생은 열차타고 밀양을 자주 내려오셨다. 한승원 선생은 “재금이 처남이 불러서/ 내 사랑 아랑한테 간다/ 대나무숲 속에서 옷고름 만지작거리며 강물에 뜬 달 보고 있을/천년의 대나무 숲에/ 천 년의 향 맑은 바람이/ 천년의 강물에 뜬 그 사랑을 출렁거리게 하는 영남루”라고 <밀양 가는 길>이란 시에서 노래하였다. 그런 만큼 그분들의 우정은 자별한 데가 있었다.
내게도 이 시는 특별하게 다가온다. 평소 좀처럼 전화를 하지 않는 시인께서 전화를 하시어 “이형, 매실주 다 익었는데....” 하시며 뒷말을 줄이셨다. 그 말씀은 선생님 방식대로의 간곡한 초대였다. 선생님은 나이도 한참 차이 나는 내게 늘 “이형!”하고 부르셨다. 하지만 그해 겨울, 난 난생 처음 조그만 가게를 내어 장사를 하고 있었으므로 좀체 시간을 내지 못했다. 그리고 덜커덕 병을 얻으셨고 금주령이 내려버린 것이다. 운명의 시계는 신이 정한 로드맵을 향해 쉼 없이 걸었고 결국 이듬해 이승을 하직하고 만 것이다.
시인은 시집을 남겨 인연의 끈을 다시 묶어두셨다. 하지만 세월은 덧없다. 선생의 무덤엔 올해도 풀이 무성히 자라 있을 것이고, 이승에서 만난 친구 이문구 선생도 벌써 저승에 계신다. 다만 시비를 휘둘러가는 용두목의 여울물만이 계절의 빛깔을 닮아간다.
춘삼월 도래재
바람 차더라
잡은 손 차마 놓고
넘는 고갯길
돌아설까
돌아설까
굽이 도는데
진달래 젖은 꽃잎
바람에 떤다
-<도래재 2>전문
다시 쓴 ‘도래재’는 먼저 쓴 시보다 조금 빛깔이 짙다. 앞의 시는 소쩍새 우는 늦은 봄이거나 여름 초입이었지만 이 시는 바람 찬 춘삼월이며 일찍 핀 진달래가 추워 떠는 날이다. 잡은 손 놓고 결국 돌아서지 못하고 가는 사람이 무정하다. 하기야 우리네 인생도 언제나 도래재 위에 서 있지 않은가.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새기고 망각한다. 어떤 이는 말끔한 포장도로를 걷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굽이가 긴 능선을 걷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이는 한심한 직벽의 벼랑을 걷기도 한다. 이 모두가 우리가 힘겹게 넘어야 할 인생의 재가 아닌가.
내 모든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머님 무덤 언저리에 울던 꾀꼬리에게도
작별의 인사를 보냅니다
약간은 허전하게
약간은 쓸쓸하게
오늘밤 자고 나면
내 돌아올 기약이 없네
고향집 뒤란에 뿌린 호박모종들아
뒷동산 망울지는 매실들아
-<작별>전문
‘생의 허허로움’이라고 말하고 싶다. 병마가 전신을 덮쳐와 꺼져가는 자신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쓴 시이므로 느낌은 유별나다. 인연이 있었던 모든 사람은 물론이요 한낱 어머니 무덤가의 꾀꼬리에게도 작별을 고한다. “잘 있거라!”하고 말하고 싶지만 행간에 묻어두고 ‘호박모종들아’, ‘매실들아’ 하고 이름을 불러볼 뿐이다.
1999년 일주기 행사를 위해 제작한 영상물 ‘이재금 시인의 잠들지 않는 노래’ 나레이션을 위해 이응인, 고증식 시인과 함께 찾아간 부북면 선생의 집 뜰이 생각난다. 풀은 자라있었고, 과실수들은 배틀어진 채 익어가고 있었다. 주인은 떠나고, 돌보지 못한 과일들은 초라해보였다. 열매들에 대한 연민은 선생을 더 그립게 했다.
편찮았을 때 찾아뵈러 갔다가 차바퀴가 고랑에 빠져 마을 경운기를 불러 빼내던 일, 회사 일이 잘 안 풀려 상심했을 때 위로해 주시며 찾았던 시장통 막걸리 집, 뱃다리께를 걸으며 나직나직 시를 얘기하시던 일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추억들은 시간에서 저만치 작별한 것이다. 하긴 작별했다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재금 시인은 사라지지 않고 그를 기억하는 이들 곁에 있다. 얼음골 사과밭에도 있고, 재약산 사자평 폐교된 고사리분교에도 있다.
이제 나도 “약간은 허전하게/약간은 쓸쓸하게” 돌아가야 한다. 밀양을 떠나오면서 시비 제막식 때 고증식 시인이 한 말이 떠오른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오늘 이 시비를 세우면서 부활을 보았다.”
멋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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