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문학 여행

통영바다를 향한 애닯은 노스탤지어-詩碑 ‘깃발’과 ‘봉선화’

이달균 2011. 8. 19. 09:47

 통영바다를 향한 애닯은 노스탤지어-詩碑 ‘깃발’과 ‘봉선화’

 

 


이 달 균


   ‘통영’을 옛사람들은 ‘퇴영’이라 부른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함양산청을 해맹산청으로 부르는 대책 없는 경상도 발음 때문이다. 오늘날의 통영시는 충무시와 통영군이 합쳐져 된 이름이다.

 

  누가 묻는다.

  “충무는 예향인데 와 군대식 이름인데예? 통영도 그렇고요.”

  맞다. 맞는 물음이다. 충무공과 충무는 결코 뗄 수 없는 이름임은 누구나 안다. 통영 또한 마찬가지다. 이곳이 삼도수군 통제영이 있었던 곳이 아닌가. 그 처녀의 물음은 바로 여기서 연유한다. 예향과 군항이 어떻게 상관지어질 수 있는가. 언뜻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연관이 많다.

 

  이를테면 나전칠기 같은 전통공예도 이와 무관치 않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한산도에 있던 통제영이 현재의 통영으로 옮겨오자 통제사가 병참 기지 구실을 하는 열두 공방을 두고 갖가지 군수물자를 만들도록 했다. 이러한 연유로 전통공예가 발달하게 되었는데, '통영 갓', '통영 자개', '통영 장', '통영 소반', '통영 장석' 등으로 반드시 제품의 이름 앞에 '통영'이란 이름을 붙였다. 또한 남해안별신굿 같은 무속신앙은 분주한 항구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

 

샤머니즘의 역사야 더 오랜 것이지만 통제영이 있을 때 더 제도화될 수 있었다.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 속에 세병관의 병장기 씻는 소리를 비롯한 통영의 얼들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이렇게 보면 예악(禮樂)과 무(武)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손바닥의 안과 밖처럼 하나일 수도 있다.

 

저승은 남망산(南望山) 저쪽

한려수도(閑麗水道) 저쪽에 있다.

해 저무는 까치 소리를 낸다.

올 해 여름은

북신리(北新里) 어귀에서

노을이 제 이마에 분꽃 하나를 받들고 있다.

후 후 입으로 불면

西쪽으로 쏠리는

분꽃도 저승도 어쩌면

해 저무는 西쪽 하늘에 있다.

-김춘수 <靑馬 가시고, 忠武에서>


  바람이 불어 시내에 들어와 있는 바다가 푸르다. 항구는 크고 작은 배들을 거느리고 출항을 준비한다. 조금은 분주해 보이는 이유는 출렁이는 물결 때문인가 펄럭이는 배의 깃발들 때문인가.

 

  남망산을 오른다. 동호동 오월의 남망산은 초록으로 푸르다. 앞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오른편으로 중앙시장과 문화마당이 있다. 시내에 위치해 있으므로 공원은 시민이 찾기에 수월하다. 몇 해 전 작은 도서관을 허물고 이곳에 시민회관이 들어섰다. 나만의 생각인지 몰라도 아담하고 예쁜 남망산에 거대한 위용의 시민회관이 들어선 것은 가분수처럼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어쨌거나 이만한 도심 공원은 드문 편이다.

 

  남망산을 걸으며 위 시를 생각했다. 불현듯 저승 간 청마를 위해 지은 시. 청마가 떠난 곳은 한려수도 저쪽이다. 매일 매일 해가 지고 무엇이 슬픈지 놀이 지고 분꽃 이파리도 후후 불면 그곳으로 날아간다. 청마는 저승 간 것이 아니라 한려수도 저쪽, 바다 너머에 살고 있다. 그 바다는 배로도 건널 수 없고, 소매물도나 연화도에서 보아도 그냥 서쪽 놀 지는 바다일 따름이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 <깃발>

 

 

시민회관 맞은 편 쪽에 <깃발> 시비가 있다. 남망산을 걷다보면 눈길을 주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앞으로 바다를 보는 길가에 <旗 ㅅ 발>이란 문패를 달고 서 있다. 소박해서 좋고 홀로 외로워서 더 좋다. 시는 좀 외로워야 한다. 비바람에 지친 모습 그대로 조금은 세월에 상처 입은 듯 다소곳한 모습이 정겹다. 한꺼번에 여러 시비가 있는 곳은 왠지 정이 가지 않는다. 시 한 편을 읽고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시비에 닿으면 방금 읽었던 시의 느낌이 사라지고 만다.

 

  누군가 저 푸른 해원을 향해 손수건을 흔든다. 어느 이국에 온 것처럼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이는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인가 보다. 그의 이념은 순정처럼 맑고 곧다. 이념의 노예가 아니라 휴머니티 가득한 사람다운 사람이 매단 애수의 깃발. 깃발은 왜 슬픈가. 상처받았기 때문인가. 그렇다. 통영은 상처받은 용들이 사는 곳이다.



비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보고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은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김상옥 <봉선화>


  초정(초정 김상옥의 시비는 조금 더 위에 있다. 언덕을 깎아 만든 곳에 세워졌는데 보기에 따라 어느 쪽이 앞뒤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는다. 바다를 향한 곳은 뒤에 해당하는데 언덕 위에서 보아야 하고, 바다를 등진 채 앞면을 보려면 마당이 너무 좁아 사진 한 장 찍기에도 불편하다.

 

  본체에 새긴 위 시조 ‘봉선화’는 어김없이 올해도 핀 꽃을 보면서 손톱에 꽃물 들이던 시집간 누나를 생각하며 쓴 글이다. 1939년 10 이병기의 추천으로 <문장>지에 실린 작품이다. 시인의 육필을 강릉대 김창규 교수가 조각하였다. 시, 시조, 산문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작품들은 세련된 조탁의 극치라 할 만하다.


  마루가 햇빛에 쪼여 찌익찍 소리를 낸다. 책상과 걸상과 화병, 그밖에 다른 세간들도 다 숨을 쉰다. 그리고 주인은 혼자 궤짝처럼 따로 떨어져 앉아 있다.

 -김상옥 <빈 궤짝>


  초정의 시들은 군더더기가 없다.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묘사할 뿐이다. 이 시는 그런 작법에 퍽 충실하다. 주인은 혼자 버려진 듯이 저만치 앉아 있다. 궤짝과 책걸상은 모두가 따로 떨어져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들은 서로에게 무심하지만 가만 귀 기울여 보면 들숨과 날숨을 쉬고 있다.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람과 물건은 저마다 지난한 ‘생명의 영위’라는 측면에선 공통점을 가진다. 이런 설명을 굳이 시 속에서 할 필요는 없다. 문장지 추천 작가는 그런 생각을 후학들에게 보여준다.

 

  선생은 시(詩)뿐만 아니라 서(書)·화(畵)에 두루 능하였다. 어쩌면 우리 시대 마지막 예인이 아닌가 싶다. 도자기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지녔고, 전각(篆刻) 분야에서도 일가를 이루었으니 범인으로선 재능의 끝간데를 알기 어려운 분이다. 이런 식견들은 어디에서 연유하였을까. 물론 본인의 천부적 재능이 있었겠지만 열두공방이 있었던 통영의 전통과 무관치는 않았을 것이다. 선생은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른 후 일주일 동안 금식하여 따라가셨다. 이런 결기는 평소 인간관계에서 오해를 낳곤 했는데, 깊은 속정을 아는 이는 알고 모르는 이는 모를 뿐이다.

 

  남망산에서 내려와 문화마당 앞에서 충무김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어느 집이나 원조임을 자처하지만 기실 민속음식은 원조가 없다. 민속음식이란 그곳에서 가장 흔히 먹었던 서민 음식이기 때문이다. 새벽같이 뱃일 나가는 사람들이 뱃전에서 먹을 음식이 뭐 별게 있었겠는가. 그저 시든 주먹밥을 펴서 김에 싸고, 묵은 무김치와 흔한 쭈꾸미나 오징어 묵힌 것을 따로 싸서 들고 나가면 그게 한 끼 점심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김밥은 잘 쉬지만 충무김밥은 잘 쉬지 않는다. 싸기도 간편하고 하여 배편으로 마산 부산 여수 순청 등지로 길을 여는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뱃머리음식으로도 많이 팔았다고 한다.

 

  다시 거제 둔덕 간다. 썩 내키지 않는 걸음이다. 

  동행한 전 통영문협회장 정해룡 시인은 감회에 젖는다. 몇 해에 걸쳐 청마의 명예회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온 그다. 민족정기를 바로잡는다는 명목 하에 분별없이 친일잣대를 들이대는 이들에 의해 많은 예술인들이 상처 입었다. 청마 역시 이렇다 할 친일 전력이 없는데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친일 인사로 오인되게 되었다.

 

  털어서 먼지 내려는 이들에겐 시어 하나도 트집의 요소가 된다. 또한 유치환은 이보다 먼저 거제와 통영의 출생지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이야 말로 한낱 우스개 짓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작가의 고향은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가장 많이 준 곳을 말한다. 유치환은 평생을 통영이 자신의 고향이라 말하곤 했는데 후대 사람들은 거제를 고향이라 우기며 재판정으로 몰고 갔다. 추모는 고인의 명예를 아름답고 빛나게 하기위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고인을 추모하면서 이름을 욕보이는 행위를 하고 말았다. 윤이상은 산청에서 출생하였지만 통영에서 자랐고 음악세계의 출발도 이곳이다. 그러므로 그의 고향은 통영인 것이다.

 

  이렇듯 경쟁적으로 자치단체에서 추모 사업을 하려는 청마는 행복한 시인일까. 자문하면서 거제 둔덕으로 향했다. 어떤 이는 주장한다. 거제시 둔덕면 빙하리 507-5번지에서 나서 3세 때 통영으로 이주하였다고. 그리고는 아래의 시가 이를 잘 나타내 준다고 말한다.


거제도 둔덕골은

팔대(八代)로 내려 나의 부친(父親)의 살으신 곳

적은 골안 다가 솟은 산방(山芳)산 비탈 알로

몇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

마을은 언제나 생겨난 그 외로운 앉음새로 할아버지 살던 집에 손주가 살고

아버지 갈던 밭을 아들네 갈고

베 짜서 옷 입고

조약 써서 병 고치고

그리하여 세상은

허구한 세월과 세대가 바뀌고 흘렀갔건만

사시장천 벗고 섰는 뒷산 산비탈모양

두고두고 행복된 바람이 한 번이나 불어왔던가

시방도 신농(神農) 적 베틀에 질쌈 하고

바가지에 밥 먹고

갓난 것 데불고 톡톡 털며 사는 팔대 조카 젊은 과수 며느리며

비록 갓망건은 벗었을망정

활연(活然)한 기풍 속에 새끼 꼬며

시서(詩書)와 천하를 논하는 왕고못댁 왕고모부며

가난뱅이 살림살이 견디다가 뿌리치고

만주로 일본으로 뛰었던 큰집 종손이며


그러나 끝내 이들은 손발이 장기처럼 닳도록 여기 살아

마지막에 누에가 고치되듯 애석도 모르고

살아 생전 날새고 다니던 밭머리

부친(父親)의 묏가에 부친(父親)처럼 한결같이 묻히리니


아아 나도 나이 불혹(不惑)에 가까웠거늘

슬픈 줄도 모르는 이 골짜기 부친(父親)의 하늘로 돌아와

일출이경(日出而耕)하고 어질게 살다 죽으리


 -유치환 <거제도 둔덕(巨濟島 屯德)골>


  거제시 둔덕면에 이 시를 새긴 시비가 있다. 어디까지나 청마의 고향은 이곳이므로 이 시비를 세운다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어느 자치단체나 한 시인을 추모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이 시가 출생지를 의미하므로 청마가 거제 사람이라는 것은 좀 억지다. 청마의 아버지는 통영의 한 한약방의 데릴사위가 되어 거제에서 이주하였다. 이름 있는 한약방을 하는 친정에서 청마가 태어났는데 굳이 바다 건너 벽촌의 시가에서 산후조리를 할 이유가 있었을까.    더구나 이 시를 잘 읽어보면  “거제도 둔덕골은/팔대(八代)로 내려 나의 부친(父親)의 살으신 곳”이므로 자신이 살던 곳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지 않은가.

 

  시비를 세울 때는 몇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여행객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짧은 시여야 하고, 둘째는 대표작으로 문학성이 높아야 하고, 셋째는 세운 이의 입장보다 시인의 입장이 더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시는 너무 길고 가족사에 기운 내용이 다소 사변적이다. 많은 시들 가운데서 대표작으로 고르기엔 무리가 있다. 세운 이의 입장이 더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고향을 읊은 시이므로 우리가 그를 기린다.”는 목적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여행자는 진지해지기보다 즐거움에 더 기운다. 참견은 여기서 그치자. 시비를 보러 왔다가 통영의 문화와 역사를 생각한다. 어쩔 것인가. 통영의 역사는 바로 한국예술사인 걸.

 

  나는 어느 글에서 통영을 일러 ‘상처받은 용들의 도시’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상처받은 용’은 윤이상이 루이제 린저와 대담하면서 자신의 태몽을 들려주면서 한 말로써 ‘상처’는 피해갈 수 없는 지난한 생의 운명임을 예견한 것이다. 동백림 사건으로 인해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마감한 생이야 말로 치유할 수 없었던 상처였다. 하지만 그 상처가 윤이상에게만 덧씌워진 운명은 아니었다.

 

  세계사 속에서 한국현대사는 고난과 형극을 뚫고 달려온 질풍노도의 역사다. 그러므로 그 시기를 살아온 이들에게 상처는 피해갈 수 없는 면류관인지도 모른다. 이곳의 예인들에게도 나름의 상처가 있다.

 

  ‘꽃의 시인’ 김춘수는 평생을 문학과 교육 속에서 보냈다. ‘무의미의 시’를 주창하면서 한국시의 한 지평을 열고자 했다. 언어란 의미를 부정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지만 시인은 의미를 벗어나기 위해 그 대상을 깨뜨려야 했고, 그리하여 대상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지려 했다. 이렇듯 예술지상주의자의 면모를 가진 그에게도 시대는 결코 피해가지 않았다. 80년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고 집권한 전두환 군부세력은 정권의 당위성을 꿰어 맞추기 위해 시인을 전국구 의원으로 만들고 만다. 이 거수기 의원 노릇은 시인의 말년을 내내 괴롭혔고 사후에도 명예를 옭죄는 족쇄가 되고 말았다.   

 

  유치진은 또 어떤가. 한국 연극사를 말하면서 그를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다. 1974년 운명하기 전까지 연출, 평론, 희곡창작을 통해 연극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3.1운동을 주제로 한 ‘조국’이나 김유신의 아들 원술을 주인공으로 한 ‘원술랑’같은 작품은 학창시절 누구나 읽어본 희곡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는 가장 대표적인 친일 연극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과거로 인해 남망산에 있던 흉상이 내쳐지고 말았다.

 

  그들의 상처가 우리 한국 현대사의 상처인데 그들에게만 짐을 지우는 후대인들의 인간답지 못함이 또한 슬프다. 역사의 거울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있다. 나는 부끄럽지 않은가. 공명정대한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역사는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