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월드컵, 그 유월의 동화
이 달 균
남도 한적한 바다 기슭, 초라한 누옥으로 몇 사람의 손님이 찾아왔다. 얼굴은 검게 그을었고, 미소 짓는 하얀 잇발은 더없이 싱그러웠다. 한 사람은 머릿칼이 희끗희끗한 초로의 거구였고, 세 사람은 삼십대를 갓 시작하는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월드컵이란 거대한 축제를 끝내고, 이제 막 남도 여행길에 나선 사람들이었다. 제 2의 조국과 작별해야하는 히딩크와 국가 대표를 떠나야하는 황선홍, 홍명보 그리고 먼 타국 빅리그를 준비하는 유상철은 의기투합하여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이 누추한 곳을 찾아주어 정말 영광이오. ”
이미 늬엿늬엿 해가 저무는 시각, 노인은 그들에게 평상에 앉기를 권하며 익숙한 손길로 쑥대에 불을 붙이고, 한 광주리의 감자를 삶아왔다.
“이곳엔 죽순이 맛있는데 철이 지나서.... 감자로 우선 요기부터 좀 합시다.”
히딩크는 한국 시골의 손님대접이 신기한 듯 웃으며 말하기를,
“전직 대통령께서 이렇게 소박하게 사시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노인은 한 때 정치 9단이라 불리운 전직 대통령이었다. 생애의 절반을 민주화 투쟁으로 보냈고, 나중엔 영광과 오욕을 동시에 맛본 사람이었다.
“요즘 어떻게 소일하시는지요?”
홍명보가 물었다.
“허허, 얼마전 자네가 ‘영원한 리베로’라는 책을 펴냈더구먼. 그 책을 읽으면서 나도 자서전보다는 수필집 한 권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 그래서 틈나는 데로 글을 끄적여 보기도 하지. 어떤 땐 낚시를 하기도 하고. 이곳 물빛도 예전과는 달라. 환경이 많이 훼손된 탓이지. 그래서 지역 신문에 환경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도 해. 그리고 아내와 함께 인근 도시로 나가 영화나 공연도 보고, 시간이 나면 찻집에 들러 쟈스민이나 우전, 보이차를 마시기도 하지. 뭐 이런 삶은 그저 역사 속으로 조용히 사라지기 위한 몸짓에 지나지 않아. 이번에 나는 히딩크 선생에게서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았어요. 당신이야말로 축구 9단인걸.”
“원 별말씀을. 저는 진정한 의미에서 입신이 못됩니다. 영웅이란 무엇입니까. 스스로 별이 되는 감독보다는 어두운 하늘의 배경이 되어 별들을 빛나게 해 주어야죠.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도 우승을 일구어내는 감독이야말로 진정한 감독이겠지요. 제가 마지막으로 꿈꾸는 팀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잊혀져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선생님이야말로 진정한 9단이십니다.”
별이 무수히도 반짝이는 유월의 마지막 밤에 두 9단의 얘기는 끝이 없었다.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우리도 이런 동화를 갖고 싶다. 이제 얼마 후면 또 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이 생겨난다. 그는 많은 책을 읽었고,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이 동화의 주인공처럼 그의 노년이 여유롭길, 그래서 있는 듯 없는 듯 역사 속으로 잊혀져 가주길 나는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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