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문학 여행

소설, 그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 박경리

이달균 2011. 8. 18. 23:16

 

소설, 그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 박경리

 

이달균

통영을 문학 속에서 숨 쉬게 하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은 이름 있는 사람을 배출하면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남으로 한려수도에 발목을 담근 미륵산이 있고 바다에 가서 죽은 남편을 뒤따라 순사한 전설이 있는 해명나루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작가의 작품 속에 투영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작가의 고향은 곧 작품의 고향이면서 수많은 독자들의 고향이 되기도 한다.

 

불멸의 작가 박경리 선생은 오랫동안 타관을 돌아 2008년 8월 5일 태실이 묻힌 고향 통영으로 돌아오셨다. 한산도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산양읍 신전리 미륵산 기슭에 한국문단의 기념비적인 소설 '토지'와 함께 영원히 살아서 역사를 만들고 있다. 그곳을 <박경리 추모공원>이라 이름 지었다.

 

그렇다. 누가 선생의 고향이 통영임을 모르랴. 당신께서 하신 말씀“통영은 나의 문학의 모태요, 나를 문학인으로 키운 고향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를 상기하지 않은 채, 왜 통영 사람인가를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태어난 곳이기에? 아니면 영원히 통영에 뼈를 묻었기 때문에? 다들 맞는 대답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좀 다르다. 어디까지나 소설가인 선생께서 통영을 문학 속에서 숨 쉬게 하고, 영원토록 기억하게 한 것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대충 일별하여 선생의 소설 속에 살아있는 통영의 지명들을 열거해 본다. 죽림고개, 안뒤산 기슭에 있는 동헌과 세병관, 갯문가, 동충과 남망산, 공지섬과 한산섬, 간창골과 뚝지, 서문고개, 충렬사, 명정골 우물, 작은개, 큰개, 우룩개, 판데, 미륵도의 고봉 용화산, 봉수골과 해명나루, 해저터널, 당산, 멘데, 장대고개, 선자방 우물 등등이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새로운 길과 마을이 생겨나 영영 없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이름들이 박경리라는 한 거장의 작품 속에 오롯이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참 통영은 복 받은 도시가 아닌가 싶다. 오베르 쉬르 오와즈 마을은 고호를 통해 알았고, 지베르니는 모네의 고향이기에 알았다. 언젠가는 가보겠지만 아직 가보지 못한 한국의 한 시인이 그곳을 안다는 것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위에 열거한 통영의 지명들 역시 그런 측면에서 보면 한 작가를 품은 고장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한다.

 

한국문학사의 거대한 산맥 박경리 선생(본명 박금이)은 1926년 경남 통영시 문화동 328의 1번지에서 박수영(朴壽永)의 장녀로 출생한다. 선생께서 18세 되던 해에 아버지는 조강지처를 떠나 재혼을 하게 되는데. 이는 선생님의 성장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나의 문학적 자전’(1984)이란 글에서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하지만 타계하기 한 달 전 월간 <현대문학> 4월 호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신작시에는 그토록 미워했던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드러내고 있다.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사별 후 삼십여 년/꿈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중략)…꿈에서 깨면/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했다” -'어머니' 중에서

 

사실 선생은 오랫동안 통영을 오시지 않았다. 애와 증이 교차했기 때문이다. 고향 통영에 대한 사랑은 누구보다 컸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바로 위의 글은 그런 심정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28세 경 고향을 떠나 2004년 처음으로 통영땅을 밟았으니 50년이 넘은 세월이다. 당시에도 출생지인 ‘뚝지먼당’을 찾지는 않았다.

 

등단에서 필생의 작품 ‘토지(土地)’에 이르기까지.

 

1955년 8월호에 단편 ‘계산’이 김동리 선생의 초회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실렸고, 이듬해 8월호에‘흑흑백백’이 추천 완료되어 본격적인 창작을 시작하였다. 경리(景利)’라는 필명도 김동리 선생이 지어주었다. 이듬해인 1957년엔 단편 ‘불신시대’로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주목받는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초기에는 주로 단편을 발표하였으나, 1958년 장편 <연가> 이후, <표류도>, <성녀와 마녀>, <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 등 굵직굵직한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문제 작가가 된다. 그 중 <표류도>(1959)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시장과 전장>(1965)은 전후문학의 새 영역을 개척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특히 1962년에 발표한 <김약국의 딸들>은 통영이 무대가 된 작품으로 작가의 작품 세계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었고, 이후의 작품들에 제재나 문체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60년 4.19의 경험은 작가의 세계를 더욱 넓혀 놓았다. 개인과 가족의 고통을 넘어 민족과 인류의 보편성을 다루는 데까지 뻗치게 됐다는 평을 받기에 이른다. 이 시기에 내성문학상, 한국여류문학상 등을 수상한다.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土地)>의 원고를 썼던 것이다. 백매(百枚)를 쓰고 나서 악착스런 내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어찌하여 빙벽(氷壁)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가중(加重)되는 망상(妄想)의 무게 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들어야 하는가. 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 내게 있어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 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 달리 할 일도 있었으련만, 다른 길을 갈수도 있었으련만......

-1973년 <토지(土地)> 1부 자서(自序)에서

 

위 글에서 보듯 삶과 문학은 이미 하나가 되어있었다. 마흔넷이 되던 1969년 필생의 대작 <토지> 집필에 착수한다. 70년대 중반까지 장편 2편을 발표한 걸 빼면, 이때부터 25년간 선생의 역량은 오직 <토지(土地)>에만 집중된다. 1969~1972년까지 <토지(土地)> 1부를 ‘현대문학’에, 1972~1975년 2부를 ‘문학사상’에 연재하였고, 1년여의 휴식기를 거쳐 1977~1978년에 ‘독서생활’과 ‘한국문학’에 3부를 연재, 탈고한다.

 

이 기간 동안 삶의 역정 또한 고단하였다. 1부를 연재하던 중 유방암을 얻어 오른쪽 가슴을 절제하였고, 자신의 외동딸(김영주. 원주 토지문학관장)과 결혼한 사위 김지하(시인)씨가 74년부터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게 되자 그 뒷바라지도 해야 했다.

 

80년 서울 정릉을 떠나 치악산 자락의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으로 이사한다. 3차례 연재를 중단하는 우여곡절 끝에 ‘정경문화’와 ‘월간경향’ 연재로 <토지> 4부(83~88년)를 마쳤고, 92년부터 ‘문화일보’에 5부를 연재하였고 94년에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26년간의 집필, 등장인물 700여명, 권수로 21권. 원고지 3만장 분량, TV드라마로도 3번,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로 소개되었다.

 

1992에서 93년에 걸쳐 연세대 원주캠퍼스에서 창작론 강의를 하였는데, 그때 녹음해둔 강의 내용을 현대문학에 연재하였는데 이를 묶은 책이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이다. 이는 젊은 문학도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토지(土地)>를 완전 탈고한 1994년 ‘명예문학박사’학위를 수여(8월 27일)받았고, 한국여성단체에서 ‘올해의 여성상’(10월 6일)을, 유네스코서울협의회에서 ‘올해의 인물’로 선정(12월 3일) 되었으며, 1996년엔 제 6회 ‘호암예술상’을 수상하였다. 2002년엔 토지 1부~5부(전 21권)을 ‘나남출판사’에서 재출간하였고, 2003년엔 청소년판 토지1분~2부(전6권)을 ‘이룸’에서 간행하였다.

]

죽어서 산자에게 묻는다.

 

<토지(土地)> 완간 이후 간간이 산문과 시를 쓰는 등 집필활동은 최소화 하였지만, 환경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직접 텃밭을 가꾸는 등 친환경적 삶을 살았다. 창작에만 전념하던 오랜 칩거 생활을 깨고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93년4월~94년10월)를 맡을 만큼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은 각별했다.

 

2003년 <현대문학>에 <나비야 청산가자>를 연재하였는데 건강악화로 안타깝게도 3회 만에 (440여 매 분량) 중단되어 미완으로 남았다. 2004년에는 10 여 년간 생명사상을 바탕으로 발표한 칼럼과 강연문을 묶은 산문집 <생명의 아픔>을 펴냈다.

 

80년부터 97년까지 창작의 산실이었던 원주시 단구동 자택은 1999년 5월 ‘토지문학공원’으로 조성되었다가 2008년 8월 14일 ‘박경리 문학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같은 해 인근 흥업면 매지리에 대지 3,000평, 연건평 800평 규모의 지상 3층 건물인 ‘토지문화관’이 지어져 학술회의 및 작가들의 창작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2007년 7월 30일 원주시에 2.9 ㎞의 박경리로가 생겼다.

 

선생은 당뇨, 고혈압 등 지병에 시달렸고, 2007년 7월 폐암 선고를 받았으나 고령을 이유로 스스로 치료를 물리쳤다. 2008년 3월 ‘현대문학’에 ‘까치설’ 등 신작시 3편을 기고하는 등 마지막까지 창작의 열정을 불태웠다.

 

2008년 4월 원주 자택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서울 아산병원에서 투병하였으나, 2008년 5월 5일 영면에 드셨다. 8일 오전 8시 서울아산병원에서 영결실이 열렸고, 외동딸인 김영주 토지문화관장과 사위 김지하 시인, 외손자 원보, 세희 씨 등 유족과 각계 인사 150여 명이 참석했다. 박완서 장례위원장은 "선생님이 하늘에서 내려다 볼 때 기뻐하실 수 있도록 후배들은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5월 9일, 필자는 통영을 찾았다. 중앙동 강구안 문화마당에서 안장식 추모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펄럭이는 만장과 추모 깃발은 통영시 전체를 물들였다. 서울서 내려온 가족, 문인들과 통영과 전국각지의 조문객들이 문화마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추모제는 엄숙히 거행되었다. 거제시 신현읍 장평리 조병삼 씨 내외가 사흘을 꼬박 새워 만들었다는 종이꽃상여는 강구안에 몰려온 바람에도 침묵했다.

 

통영의 민속문화인 남해안 별신굿의 인간문화재 정영만씨는 넋맞이 굿으로 혼을 모신다. “북망산 가는 길 노독이나마 없으시라” 소리가 애절하다. 충렬사를 거쳐 장지인 미륵산 기슭 산양읍 신전리 양지농원 장지에 도착했다. 멀리 한산 앞바다가 내려다보였다.

 

텃벌림춤으로 시작하여 들채굿이 이어졌고, 드디어 오후 2시 정각에 하관하였다. 강원도 원주의 토지문학공원의 텃밭에서 가져온 흙과 토지문화관 텃밭의 흙, 그리고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였던 하동의 흙을 뿌리고, 함평에서 가져온 나비를 띄우는 것으로 하관식을 마무리 했다.

한 거장의 죽음은 역사가 된다. 죽음은 끝난 것이 아니라 산자에게 늘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 그래서일까. 선생이 남기신 시에선 고스란히 삶이 담겨 있다.

 

“<전략>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나를 지탱해주었고/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중략...모진 세월 가고/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옛날의 그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