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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행(南海行) ─남해, 내 노동의 성터 혹은 양식의 곳간/이달균

이달균 2017. 6. 26. 17:43

                 

              

 


남해행(南海行)

 

                   이달균

 

 

   자, 아침이다. 단칼에 나를 버히고 허구헌 날의 맹세만 가방에 우겨넣고 10시 10분 발 남해행 직행버스 나는 떠나자.

 

   임국희는 아침 싸롱을 열어 행복의 꽃잎들을 흩날리고 저 구름 흘러가는 곳에 내 마음도 흘러갈 즈음 운전수는 미아리 눈물고개에서 울고 넘는 박달재까지 허덕허덕 뽕짝으로 차의 시속을 따라 잡는다. 나는 재빨리 호흡을 바꾸며 젓가락 장단에 맞춰 기능적으로 젖기로 한다.

 

   그는 말했다. 무엇인가를 팔기 전에 먼저 나를 파는 법을, 가장 기능적으로 팔아치우고 가장 기능적으로 살아남는 법을. 차장(次長)은 가볍게 말하고 익숙하게 웃었다. 오늘 차장(次長)은 위대하고 부장(部長)은 더 위대했다.

 

   남해대교를 지나며 나는 자꾸만 헛구역질을 하며 약을 팔기 전에 먼저 나를 팔리라 나를 팔리라 나를 팔리라 세 번 다짐하고, 눈물에 씻긴 차창을 내다보았다. 남해바다 결 고운 물살에 밀리는 초경처럼 빨간 사루비아 한 송이.

 

   여성통경제를 팔러 나는 남해엘 왔다.

 

 

 

 

산문 <남해, 내 노동의 성터 혹은 양식의 곳간>


 

사루비아, 붉은 꽃잎

 

   위 시는 내 청춘 고단한 한때의 비망록이다. 80년대, 그 분주하고 고통스러운 혼란기 속에 한 발을 담구고, 또 한 발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남해로 거제로 약을 팔러 다니면서 쓴 시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쓴 80여 편의 시들에 대한 회의가 늘 있었다. 당시 동인 활동을 하는 내내 이 시들이 내 것이 아니라 어릴 적 읽은 유명 시들과 우리의 눈을 번쩍이게 했던 ‘반시(反詩) 동인’을 비롯한 선배시인들의 시세계에 영향 받아 쓴 것은 아닐까 하는 결벽성에 사로잡혀있을 때였다. 


   그런 어느 날 남해 가는 버스 속에서 이 시를 썼다. 내 삶에 관한 시라고 스스로에게 대견해하며 첫 시집의 제호로 덜컥 정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바라보면 이 시는 보건의료정책의 변화에 의해 벌써 박물관의 녹슨 유물이 되어버렸다. 생리통의 아픔을 진정시키는 약 사루비아를 팔기 위해 약국을 드나든 체험이지만 의약분업시대인 오늘, 의사처방 없이는 팔 수 없는 약이 되었기 때문이다.

 
   MBC 라디오 여성시대의 첫 주자는 임국희였다. 아침 10시 10분발 남해행 직행버스를 타면 늘 임국희의 여성살롱이 흘러나왔다. 사연 간간이 낯익은 가곡도 흘러나와 눈을 감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지없이 뽕짝메들리로 바꿔버리는 운전수에 속이 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빨리 마음을 바꿔야 한다. 아침 미팅 때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 긍정적 마인드 혹은 슬픈 진통제 같은 기능적 마인드!  


   사루비아는 붉은 꽃이다. 생리통의 진통을 억제하는 약이지만 기실 이 약은 낙태를 위해 몰래 먹는 처녀들의 붉은 약이다. 이런 약을 팔고 하루를 마감해야 하는 마음인들 오죽 붉으랴. 그 꽃잎 실은 남해바다는 더욱 푸르다.


   그렇게 돌아온 마산의 하늘은 깃발과 함성, 노래로 놀빛에 젖어있었다. 아름답고 푸른 가고파의 바다는 어느새 사형선고를 내렸고. “수출을 자유롭게” 라는 슬로건으로 창동·오동동의 영화와 맞바꾼 바다에선 잘 익은 와인 냄새가 났다. 자유수출지역, 창원공단 노동자들은 임금협상을 위해 공장에서 거리로, 거리에서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은행직원들 역시 화이트칼라 노동자라며 근무복 대신 사복으로 출근하며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임지에서 돌아와 방금 버스에서 내린 난 하염없이 혼자였고 이방인이었다. 왜? 라고 물었지만 답은 없었다.

 

 

말테처럼 남해에서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도 그랬다. 중학시절, 헌 책방을 나서던 날에도 늘 혼자였다. 그 시절 『말테의 수기』를 통해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알게 되었다. 한 외로운 청년 말테는 “사람들은 살기 위해 파리로 온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서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라고 중얼거린다. 잠언처럼 아름다운 산문시처럼 문장은 이어진다. “모두가 낫길 바라면서 찾아오는 거대한 병원이 죽음을 낳는 공장처럼 보여진다.”는 표현에서 괜히 뭉클해진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스물여덟의 덴마크에서 온 시골청년 말테가 바라본 파리. 한동안 이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본 더스틴 호프만과 존 보이트가 주연한 영화 「미드나잇 카우보이」를 보던 날 자취방을 옮기며 언더그라운드를 어렴풋이 예감하곤 했다.  


   동시대의 독서체험으로 카뮈를 들 수 있겠다. 분노의 대상이 없는 뫼르소의 소외와 고독이 묘하게 나를 이끌던 기억은 오래 남아있다. 이 알 수 없는 ‘존재와 불안’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내 시의 한 축을 형성한다. 인구 16만의 작은 도시가 갑자기 50만 도시로 불어나면서 좁은 지역에 학교와 주택가, 시장과 유흥가가 공존하는 상황이 참 자연스러웠던 시기였다. 


   우리들 습작시절 10·26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12·12사태에 이어 광주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중국집 이층 짬뽕국물과 소주에 흠씬 취해가며 ‘살어리’ ‘3·15’ 등등의 동인 활동에 여념 없었다. 차츰 시들은 핏빛을 띠어가고 나 역시 주먹 쥔 다짐이냐 벼랑 위의 서정성이냐를 놓고 갈등하였다. 그런 어정쩡함 속에서 80년대의 몇 년이 지나갔다. NO!에서 시작한다는 제약세일즈를 하면서 3년간 한 편의 시도 쓰지 못했다. 살아야겠다고 이를 앙다물었지만 적응이 느린 탓으로 옆을 바라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 어느 날 이 시를 썼다. 조금은 슬프지만 담담함 속에서 얼비치는 눈물과 삶이 있는 시라고 마냥 혼자 좋아했다. 내게 있어 남해대교는 여행자의 느긋한 여정이 아니라 팍팍한 삶을 꾸려가기 위한 전장이었다. 부작용의 낙태를 꿈꾸며 약국 문을 열던 그녀들의 통경제 사루비아를 팔기 위해 뱀의 혀 같은 넥타이를 매고 남해 가는 길. 매상이 큰 약국도 없고 주문량도 뻔한 곳이지만 남해는 내 노동의 성터였고 양식의 곳간이었다. 


   소설가 김훈은 이성복의 시 「남해 금산」을 읽은 후 “그 바다와 섬들은 나의 마음속에서 생(生)―멸(滅)의 공간, 또는 그 둘이 서로 삼투하는, 그래서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빛깔을 바꾸어 왔다.”고 했지만 나는 남해 금산에서 한 번도 적멸의 순간을 겪어보지 못했다. 


   약을 팔러 왔다가 하루치의 목표량을 채우지도 못하고 냅다 산을 오르던 내게 적멸은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세월은 사람을 다스린다. 지천명의 중반을 넘겼으니 나도 언젠가는 동트기 전 사위는 별빛의 잔영들이 산의 능선을 덮어 올 때 그 절대의 고요 속에서 눈을 뜨고 싶다. 이 섬, 이 바다로 찾아오는 시간을 관찰하는 일이 외롭고 쓸쓸하리란 것을 알지만 저만치 찾아온 일몰을 끌어당겨 어둠에 몸을 숨기는 여유를 갖고 싶다.   


   이 시를 쓰고 난 후 1987년, 첫 시집 『남해행』을 간행하였다.

                         ─문학 무크 『시에티카』 2012년 · 상반기 제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