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이달균
이미지북 | 2015.01.20
형태 판형 규격外 | 페이지 수 302 | ISBN
정가 23,000원
영화 ‘곡성’- 잘 직조된 완벽한 코미디 영화
이 달 균(시인)
일찍이 곡성만큼 수많은 화제를 양산한 영화가 있었을까?
김기덕 감독의 의식적인 폭력성, 박찬욱 감독의 문학성과 대중성과의 절묘한 결합, 홍상수 감독의 찌질한 지식인의 이중성 드러내기 등 독특한 개성을 내보이는 작품들이 많았지만 이번 곡성과는 비교하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어떤 영화평론가는 관객들에게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실제 영화를 보기전이나 보고난 후에도 평론가의 글을 찾아 읽어야 할 만큼 난해하고 궁금증을 자아낸 영화임에 틀림없다. 스포일러에 화내지 않고 해설을 먼저 읽고 영화표를 사는 첫 영화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정작 나홍진 감독은 코미디 영화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통영롯데줌아울렛관을 나오면서 나는 논리적 접근이 필요 없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감독이 의도한 바는 있으리란 생각 때문에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았고, 남이 쓴 글을 읽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없었다. 물론 감독을 만나 술 한 잔 하면서 물어본다 해도 “그냥 본 대로 생각하세요.” 정도로 답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다시 두 번째 보았다. 그렇게 복잡해 보였지만 의외로 간단한 영화란 결론에 이르렀다. 워낙 연기자들의 연기가 좋고 배경이 그럴듯하고 음악과 음향이 리얼했기에 우리는 모두 그런 것에 빨려 들어가 정작 제대로 된 이야기는 흘려듣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 또한 감독이 의도한 것이며 우리는 충실히 따랐을 뿐이다.
이 영화는 철저한 기독교적 관점에서 그려낸 것이다. 영화 줄거리의 중요한 부분으로 등장하는 굿과 샤머니즘적 요소들은 하나의 레토릭에 불과하다. 굳이 무당을 등장시킨 것 자체가 감독의 숨은 의중이다. 우리로 하여금 곧바로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빙빙 돌아오게 한 그럴듯한 혼돈의 장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 최고의 연기파 배우들을 등장시켰다. 황정민(일광)의 진짜보다 더 무당 같은 연기, 강렬한 눈빛을 가진 쿠니무라 준(일본인)에 대한 맹목적 반감, 곽도원(종구) 딸의 신들린 듯 완벽한 몰입 등등으로 인해 관객의 시선은 자꾸 옆길로 샌다. 감독이 의도한 트릭이 빛을 발한 것이고, 관객들은 속수무책으로 넘어간다.
제일 첫 장면, 누가복음 24장 37~39절,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이 글을 잊어서는 안된다. 여기에 정답을 명료히 얘기하고 있지만 우리는 다른 장치들에 의해 그 중요한 모티브를 잃고 허우적거리며 본 것이다. 알고 보면 콜럼버스 달걀처럼 간단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한국판 엑소시스트에 가깝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영화처럼 다가온다. 기독교적 영화를 가장 비기독교적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엑소시스트를 보면서 논리적 준거를 들이대지는 않는다. 한국적 정서인 무속, 시골의 폐가, 전라도 곡성지역의 사투리로 엮인 기독교적 영화란 얼마나 낯선 것인가. 관객은 당연히 당황스럽다. 그리고 “이게 뭐지?” 하는 반응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하다.
이 영화는 선과 악 두 개의 구조로 나눠지지만 시선은 세 개의 것으로 분산되어 나타난다. 하나는 악마이며 둘째는 악마에게서 마을을 지켜내고자 하는 선한 존재(예수의 분신)이며 셋째는 흔들리는 인간으로 구분된다. 악의 존재는 일본인과 무당 일광이며 선한 존재자는 처녀(천우희)이며 흔들리는 이는 주인공을 비롯한 대다수의 등장인물들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를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장면장면을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실제 많은 복선들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일본인과 일광이 외부에서 들어온 같은 악마의 일당임을 보여주는 장면 -일광이 왼편차선으로 운전한다든가 훈도시를 입고 있는 장면 등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냉철히 바라보면 아하! 일광은 일본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야 한다. 어쩌면 감독은 친절하게도 너무 일찍 정체를 드러내 보여 준다. 그런데도 관객은 왜 그걸 쉽게 감지해 내지 못하는가. 이것이 바로 현혹에 빠지게 하는 연출역이다. 마을을 구하려는 무명의 의식도 혼돈을 자아내기엔 충분하기 때문이다. 무명이 걸어 둔 시든꽃, 항아리에서 죽은 까마귀가 등장하는 장면 등에서 우리는 무명이 선한 존재임을 알아차리긴 쉽지 않다. 무명이 악령퇴치를 위해 걸어둔 꽃은 마을의 수호신인 천하대장군 같은 것인데, 이 시든 꽃은 강적인 악령과의 싸움에서 지친 피폐해진 영혼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다.
비교적 일정한 거리를 둔 주인공이었지만 자신의 딸이 혼수상태에 빠지고 기현상을 겪게 되면서 그도 그 소용돌이 속으로 돌진한다. 무성한 소문, 알 수 없는 기괴함이 뒤덮은 마을은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그런 그에게 무명(천우희)은 “내 말을 믿어라, 흔들리지 마라, 나를 믿지 않고 흔들린다면 가족들은 다 죽는다.”라고 수차례 경고한다. 그러나 무당 일광은 그 반대로 말한다. “그녀를 믿어서는 안 된다. 다 죽는다.”
이런 상태라면 그 누구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답은 간단하다. 누가복음, 그렇다. 종교는 따지지 않고 믿는 것이다. 믿음을 배신하든지 의심하면 이미 종교성은 상실되고 만다. 무명은 내 말이 진실이니 의심하지도 말고 흔들리지도 말고 믿어라,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말한다. 그러나 속세의 평범한 한 사람인 종구는 무명의 말을 믿지 않고 일광의 말을 믿고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절단 난 집안을 목격하게 된다.
무명은 종구에게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집에 들어가지 마라.”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닭이 두 번 울자 집으로 들어가게 되고, 집안 식구들을 모두 죽게 한다. 여기서 왜 닭이 세 번 울기 전이라 말하는가?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기독교적 상식이고, 천우희가 선한 존재임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베드로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고 말했다.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와 함께 하리라고 맹세했지만 결국 세 번 부인하였고, 나중에 그 나약함에 대한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악령의 힘 앞에 굴복하는 모습은 영화 속 종구만이 아니라 우리들 대부분이다. 무명은 여기서도 흔들리지 마라, 굴복하지 마라, 두려워마라 라고 말하고 있다.
감독이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나는 이 영화에서 예사롭게 지나치지 말아야 할 한 부분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바로 흔들리지 않는 단 한 사람, 나이 든 신부다. 이 인물에 대해 돋보기를 들이대어 보자. 젊은 사제는 주인공의 말을 듣고 이리 저리 흔들리면서 사건의 중심을 비켜가지 못하지만 나이 든 신부는 흔들리지 않는다. 딸의 병을 보면서 신부를 찾아간 곽도원에게 늙은 신부는 “의사를 믿어라.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아라.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단호히 말한다. 주인공들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를 등장시킨 만큼 대수롭지 않은 장면으로 처리되었지만 분명 이 영화의 주제는 이 한 마디에 있다.
사람들은 모두 제가 본것을 보고 제가 느낀대로 산다. 그것이 진실이든 허구이든 거짓이든 그것을 믿으면 산다. 그래서 생은 정답이 없다. 종구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환상에 사로잡혀 살고 있기도 하고, 단체로 마취 혹은 최면에 걸려 살고 있기도 하다. TV를 틀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정치, 사회, 연예 기사들이 다 사실 혹은 진실일 수는 없다. 그런대도 세상을 잘 굴러가고 있다. 곡성이란 마을에서도 죽는 자는 죽고 산자는 산다.
극장 밖에서 이토록 치열하게 해설하고 각각 다른 주장을 드러낸 영화는 일찍이 없었다. 그런 설왕설래를 보면서 나홍진 감독은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을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나홍진 감독이 꾸민 한 편의 완벽한 코미디물이다. 영화 속에서 코미디를 그린 것이 아니라 극장 밖에서 온갖 현학적 수사들을 생산한 기현상이 바로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감독이 던진 미끼를 문 관객들의 허구에 찬 온갖 말들의 성찬, 코미디는 이런 것이다.
'이달균의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난한 시대, 영화를 통해 읽는 세상-'라쇼몽(羅生門)’과 ‘곡성(哭聲)'을 중심으로 (0) | 2017.10.30 |
---|---|
라쇼몽(羅生門)- 기억은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이다. (0) | 2017.06.05 |
영화, 포장마차에서의 즐거운 수다-김해뉴스 기사 (0) | 2015.03.02 |
서울문화투데이 <영화, 포장마차에서의 즐거운 수다> 기사 (0) | 2015.02.16 |
이달균 영화에세이 <영화, 포장마차에서의 즐거운 수다>보도자료 (0) | 2014.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