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에 관한 열망.
이 달 균
1. 표절과 ‘영감靈感의 전이轉移’는 다르다.
최근 한국문단의 화두는 표절이다. 신경숙의 뒤늦은 표절사건 이후, 표절을 비호하거나 옹호하는 분위기는 사라졌다. 다만 표절의 기준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있는 듯하다. 예술은 모방에서 비롯되었고, 먼저 간 누군가의 길을 따라 걸어왔기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현대에 와서는 패러디, 꼴라쥬, 혼성모방 등의 기법이 다양하게 사용됨으로 그 진위를 가리는 일이 더욱 힘들게 되었다.
특히나 한국 근대예술은 이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한 역사를 가졌다. 안익태의 애국가 이전에 불려 진 애국가는 ‘올드 랭 사인’에 가사를 붙인 것이고,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이바노비치(Iosif Ivanovich)의 ‘도나우강의 잔물결’이며, 흑백청춘영화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맨발의 청춘’은 일본 영화 ‘흙탕 속의 순정’을 베낀 것임을 우린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앞 세대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되었다면 이는 표절과는 구분된다. 필자는 그런 작품을 ‘영감의 전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다른 예술가로부터 영감을 받아 저만의 빛깔로 재탄생시켰다면 이는 표절이 아니라 영감이 전이된 경우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유럽의 후기인상파 화가들이 본 일본의 목판화 우끼요에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수출용 도자기를 싼 종이에 그려진 그림은 ‘다름’에 대한 재인식이었다. 고호는 ‘비 내리는 교각’이란 작품을 유화로 똑같이 모사하기도 하고, ‘탕기영감’이란 그림에선 배경을 전부 우기요예로 장식하였으며,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에서도 화실 벽에 붙여둔 우끼요에가 등장한다. 이처럼 다른 방식, 다른 소재, 다른 풍경은 그들의 작품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동양미술이 서양에 소개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김광섭의 그 유명한 시 ‘저녁에’의 마지막 3연은 ‘이렇게 정다운/너 하나 나 하나는/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끝난다. 이 구절은 화가 김환기의 역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로 재탄생된다. 박용철의 대표시 ‘떠나가는 배’의 첫 구절 ‘나두야 간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 거냐./나두야 가련다.’는 가수 김수철의 ‘나도야 간다’에서 ‘나도야 간다/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 수 있나/나도야 간다/꿈 찾아 사랑 찾아/나도야 간다’로 변이되어 나타난다. 어디 이뿐인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폴 엘뤼아르의 ‘자유’와 닮아 있고,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년),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1980년),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1972년), 가시와바라 효조의 ‘먼길’(1969) 등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닮아 있다.
표절은 노략질(剽)하고 훔친다(竊)는 뜻이다. 훔치는 행위는 남이 모를 것이라 생각하고 슬쩍 가져오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미 다 아는, 다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것을 다른 작품으로 변환시키는 것은 표절이라 잘라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나는 이런 경우 ‘영감의 전이’란 말을 쓴다.
근래에 와서 신춘문예나 중요 지면의 심사위원들은 좋은 작품을 가려 뽑는 것만큼이나 표절작은 아닌지에 대한 또 다른 고민에 봉착하기도 한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당선작을 복수로 뽑고, 문제가 없으면 처음 뽑은 작품을 내보낸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도 당선이 취소되거나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시조단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시비는 종종 있어왔고, 드러나지는 않아도 잠재해 있으리라 생각된다. 시조는 3장6구의 형식을 취하는 짧은 시이며 연시조라해도 장시는 많지 않다. 이미지 혹은 시어 몇 개만 비슷해도 표절의혹이 든다. 그러므로 시조는 더욱 냉철하게 창작되어야 한다. 베껴 쓰진 않아도 남의 작품 몇을 적당히 가져와 짜깁기 형식으로 만들어 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기에 자신의 창작도 중요하지만 남의 작품도 면밀히 보아야 한다. 혹시나 하는 의혹이 제기되기 전에 시인 스스로 그런 문제를 불식시켜야 한다. 근절되기는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 작품은 나만이 쓸 수 있다.”는 투철한 작가의식으로 창작에 임하는 길밖에 없다.
2. 때론 노송도 커피 한잔도 벗이 된다.
햇볕이 하도 따뜻해
산책길에 나섰다.
희수喜壽를 지난 듯한
노송老松 몇
마른 흙냄새
좋아라 이승의 한 나절
하릴없는 산책길.
-김제현,「겨울 산책길」전문(《유심》2015년 7월호)
돌아보면 바람 많고 눈, 비 오는 세상 속에서, 살피고 또 살펴도 가파른 오늘 을
곰곰이 헤아려보려 온기 도는 너를 들었다
-이우걸,「모닝 커피」전문(《문학청춘》2015년 봄호)
평론가 장경렬은 사석에서 “시조의 길은 단수다. 연시조는 문단의 관심을 받지 못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시조는 역시 단수정형이 본령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어쨌든 최근에 와서 더욱 단시조의 중요성은 강조되고 있다. 윤금초, 이우걸, 이정환, 김일연을 비롯한 여러 분들이 단시조집을 펴내었고, 예전에 비해 문예지 발표 작품들도 단수가 늘어나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김제현의「겨울 산책길」은 일상을 잊고, 생각도 버리고 천천히 그저 뒷짐 지고 걷는, 봄볕 따뜻한 겨울 한때를 그리고 있다. 아무 설명이 필요 없는 46자는 누가 읽어도 다르게 읽히지 않는다. 이승에서 얻은 최고의 하루는 ‘좋아라’ 로 표현한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감정을 드러내어도 어색하지 않다. 조금은 투박한 옹기가 청와백자보다 나을 때가 있다. 연륜은 그런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희수란 시어에 눈길이 간다. 나무의 연륜을 말하면서 이순, 고희, 백수도 있는데, 굳이 77세를 뜻하는 희수를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인은 노송을 동갑내기 친구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의 뿌리를 감싼 흙냄새는 더욱 향그럽다. 생의 동반자인 노송을 바라보며 살아온 세월을 반추하는 것이다.
이우걸의 「모닝 커피」는 한 수의 단수로 전 생애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다. 흡사 단편영화 한 편에 자신의 일생을 다 함축하려는 영화감독처럼. 시인은 지난한 한 생애도 단수 속에서 충분히 얘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이라고 어찌 바람이 없고, 찬비를 맞지 않았으랴. 다 올라왔다 싶으면 다시 시작되는 오르막은 시지푸스의 운명처럼 끝이 없다. 그 차갑고 가파른 삶은 차 한 잔의 온기로 균형을 맞추면서 위안을 얻는다. ‘너를 들었다’라는 결구를 통해 커피잔을 우정 어린 존재로 치환시킨다. 그로써 잔은 생명을 가진 대상으로 거듭나고, ‘너’는 인식의 문을 여는 열쇠로 변모된다. 이것이 바로 종장의 묘미다. 서술의 가락이 이미지로 화하면 여운은 오래 남는다.
필자는『유심』 5월호에 단시조를 거론하면서 “짧은 촌철살인 속에 맛보는 긴 여운, 여백을 지나오면서 만들어진 공명은 감동으로 이어진다.”고 말한 바 있다. 위의 두 편이 그런 예를 보여준다.
3. 시인이 만난 봄
울다 지친 광화문에 장군은 목이 메고
대왕도 숨이 막혀 눈을 뜨지 않으셨다
빈말만 인왕산에 걸려
또다시 돌아오고
얼기설기 눌어붙어 거칠어진 말본새는
긴 여름 뙤약볕과 매서운 겨울 건너
먹지도 버리지도 못할
개구리밥 되었다
입가에 묻어나는 거짓을 핥아가며
보태고 들쑤셔서 뒤엎은 마음 못에
새봄도 아랑곳없이
개구리는 동면 중
-정용국,「개구리는 개구리밥을 먹지 않는다-0416」전문(《서정과 현실》2015년 상반기호)
사월의 뒷담화가 산과 들을 쑤석댄다
칼끝보다 더 매서운 붓 한 자루 섬기던
이 나라 여린 풀꽃들 우듬지를 세울 때
오월의 절규인 듯
유월의 격문인 듯
뜨겁게, 뜨겁게 솟구치는
탈고 안 된 문장하나
쓰다 만
시의 행간에
피를 왈칵!
토한다
-임채성,「붓꽃」전문(《시와 문화》2015년 여름호)
박경리 선생은 시 「사마천(司馬遷)」에서 ‘육체를 거세당하고/인생을 거세당하고/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라며 정면에서 역사를 기록한 이의 고통과 천명을 노래했다. 한국은 2020년이면 무역액 세계 7위, 전체 GDP 규모는 세계 10위권에 진입할 것이라 전망되는 국가다. 그러나 시인이 포착한 현실은 절망적이다.
정용국 시인이 만난 2015년의 봄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충무공은 목이 메고, 세종대왕은 숨이 막힌다. 우리 시대엔 구국의 혼을 가진 선각자가 없다. 허랑한 말들은 발길에 걸려 넘어지고 ‘인왕산에 걸려’ 되돌아오고, ‘말본새’는 ‘얼기설기 눌어붙어 거칠어’져 있다. 화려한 말의 성찬은 개구리도 먹지 않는 개구리밥이 되고 만다. 비록 오늘은 지키지 못할 약속이지만 그래도 희망만은 버릴 수 없다. 동면에서 깨어나면 ‘먹지도 버리지도 못할/개구리밥’이 계륵이 아니라 한 그릇의 식량이 되는 날을 기다린다.
임채성 시인은 붓꽃의 개화를 보면서 ‘오월의 절규인 듯/유월의 격문인 듯’ 흙을 뚫고 나오는 몸짓을 노래한다. 꽃잎은 여리고 특별할 것도 없지만 개화 직전의 모습이 먹물 머금은 붓을 닮았다. 숨을 고른 첫째 수를 거쳐 둘째 수에 오면 시의 행간은 급박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침내 피를 토한다. 지신이라도 밟아야 할 만큼 탈 많은 봄은 시인의 호흡을 더욱 점층시킨다. 다소곳 향내를 뿜으며 늦은 봄을 알리던 꽃잎이었다가 차츰 상소를 쓰다 각혈하는 대쪽선비의 모습으로 변환된다. 그 비통함이 너무 격한 나머지 둘째 수 중장에선 ‘뜨겁게, 뜨겁게 솟구치는/탈고 안 된 문장하나’로 구의 변형을 불러왔다. 자칫 흥분이 지나치면 긴장감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는 그런 긴장을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 돋보인다.
이 두 수의 작품을 통해 ‘탈고 안 된 문장’처럼 세월호를 지나 성완종을 건너 메르스의 터널을 힘겹게 걷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읽는다.
4. 내적 응축凝縮의 결정들
조개가 제 몫의 꿈을 다 해감하고 나면
무성으로 박제된 수세기의 파도는
짜디짠 기억 안쪽에 진주로 남을 것이다
봉분처럼 다물어버린 폐각을 연다는 것은
도굴을 꿈꾸는 칼날보다 더 먼저
맨살로 수습되었던 선사기의 비린내
주름겹겹 매몰된 그 연질의 수평마다
최초의 해조음이 뱉어내고 삼켰던
공복의 아픈 고요를 만져보는 것이다
-박권숙,「조개를 까면서」전문(《시조21》2015년 여름호)
누이야,
눈매 고운 봄 하늘을 걸어오는가
내 곁에 살아 있다 말하듯이 숨 쉬는가
자욱한 산안개 너머 네 숨소리 들린다
섬진강 물마루를 걸어가던 네 그림자,
맑게 씻은 발꿈치로 걸어와 꽃 피우며
꽃잎에 물든 이슬 모양 반짝이며 웃는가
여기 저기 돋아나는 풀잎 사이 바람 일 때
의문부로 가라앉은 돌멩이를 들춰내고
강물 속 깊은 샘물에 뜬 이야기를 길어서
허구헌 날,
빗방울이 수수꽃같이 어룽지는
그 처마 밑 지나가는 바람같이 와서는
내 미처 못들을 소리로
왔다 간다 말하는가
산까치 소리가 메아리로 들려오는
그 허공을 건너지르는 찰나의 틈에서
누이야,
마른 땅 적시는 빗소리로 오셨는가
-염창권,「도 닷가 기드리고다」전문(《한국동서문학》2015년 봄호)
두 편의 시조를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절절한 아픔이든 비수를 날리고 싶은 현실이든 감정을 제어하고 정제하면 절로 좋은 작품이 된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송곳은 감추어도 그 예리함은 남이 먼저 안다.
박권숙은 조개를 까면서 진주도 생각하고, 더 멀리 선사시대 패총의 비린내를 맞기도 한다. ‘조개가 제 몫의 꿈을 다 해감’하다니. 섣불리 드러내지 않고 오래 삭이며 찾아낸 비유는 생경하지 않아 좋다. 살아오면서 끼인 불순물을 다 걷어내고 나면 진주만 남는다. 그 응축의 결정은 ‘수세기의 파도’, 그 묵언의 소산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입 다문 폐각은 천 년 전의 능처럼 숭고하여 칼을 들이대기도 조심스럽다. 잉태에 우연은 없다. 자세히 보면 ‘주름겹겹’의 껍질엔 ‘최초의 해조음이’ 기억되어 있고, ‘공복의 아픈 고요’도 만져지는 것이다.
염창권은 ‘제망매가’를 불러내어 이별과 재회를 얘기하고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한다. 이 작품은 3장6구의 행간을 자유롭게 걷는다. 우리는 퍼즐 맞추듯 언어를 끼워 맞추는 시조들을 보아왔다. 이 작품처럼 겉으론 굳이 시조임을 드러내지 않으나 정형의 결은 안으로 잘 살려내면 호흡은 자연스러워 진다. 월명사 스님이 그랬듯이 시인은 낮은 발걸음으로 시에 닿고자 한다. 누이를 떠나보낸 후, 득도하여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나자는 약속은 시간을 묵혀야 하는 일이다.
첫수, 귀를 기울이면 ‘산 안개 너머’의 숨소리마저도 들릴 듯하다. 둘째 수, 누이는 총총이 그림자만 남기고 ‘섬진강 물마루’를 건너갔다가 어느 날 다시 ‘맑게 씻은 발꿈치로 걸어와’ ‘반짝이며 웃는’다. 셋째 수, 들려주고픈 사연은 많다. 그냥 이내 풀어놓는 보따리가 아니라 ‘의문부로 가라앉은 돌멩이를 들춰내고, 강물 속 깊은 샘물에 뜬 이야기를 길어’야 한다. 넷째 수, 그러나 그 재회는 꿈처럼 허망하다. 샘물에 뜬 이야기는 꿈에서 깨면 ‘미처 못들을 소리’인 양 자취 없다. 만나고 헤어지는 우리들 생은 ‘그 허공을 건너지르는 찰나’일 뿐이다. 방금 소리 내며 왔다가 균열의 대지 위로 사라지고 마는 한갓 여우비에 불과하다.
이달엔 어느 날 문득 시인 앞에 놓여 진 생에 관한 시들을 읽었다. 시인마다 각자 다른 빛깔, 다른 사연을 담아내었다. 한 그루 노송을 통해, 커피 한잔의 온기를 음미하며 지나온 삶을 돌아보기도 하고, 광화문 광장에서 춘래불사춘의 동면하는 개구리를 만나기도 한다. 격문처럼 피어나는 붓꽃을 보며 피를 토하는 시인, 조개를 까면서 주름조개 속에 내장된 묵언의 파도소리를 듣기도 하고, 만나고 헤어지는 그 찰나가 바로 인생임을 깨닫게 한다. 이는 우리가 다 아는 것들이다. 그러나 시인의 붓끝을 지나오면 그 빛깔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지만 독자는 늘 새로운 시를 만나고 싶다. 시인의 꿈이 새롭다면 그 바람은 이뤄질 것이리라.
이달균
1987년 시집《남해행(南海行》과 무크지《지평》으로 문단활동 시작. 시집《문자의 파편》외 4권, 영화에세이집《영화, 포장마차에서의 즐거운 수다》가 있음. 중앙시조대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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