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자료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추억으로 가는 술집 기행>

이달균 2011. 8. 23. 10:02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추억으로 가는 술집 기행>

 

 

 

영남권 마산 통술집

어떤 이는 마산을 일러 ‘물과 불의 도시’라 했다. 몽고간장과 무학소주, 크라운맥주 같은 좋은 술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마산의 좋은 물 때문이라는 것이며, 3·15와 부마항쟁 같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뜨거움이 있었기에 불의 도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물 좋은 마산’의 명성은 사라져버렸다. 바다 역시 이은상이 그토록 ‘가고파’ 했던 ‘그 파란 물’도 ‘그 잔잔한 고향바다’도 아니다. 1970년 마산수출자유지역이 들어서면서 경제적으로는 커다란 이익을 안겨다 주었지만, 동시에 극심한 공해라는 불청객을 불러오면서 깊은 상처와 고통을 남기고 말았다. 더구나 창원 쪽에 대규모의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창원의 배후도시로 주저앉고 말았고, 그마저도 창원-진해 간 터널이 뚫리면서 진해 쪽에 그 역할을 빼앗기고 있는 형편이다.

노동집약산업의 현저한 퇴조와 함께, 도청은 창원으로 가고, 쾌적한 주거환경은 진해에 밀리는 삼중고를 겪고 있는 것이다. 한때는 서울이나 부산보다 집값이 더 높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위세 좋던 처지에서, 이제는 창원, 진해 등과 통합이나 바라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마산은 이제 물의 도시는 아닐지 몰라도 여직 불의 도시인 것만은 분명하다. 현실에 대한 분노와 변화에 대한 열망으로 여전히 뜨겁기 때문이다. 시인 이달균은 이렇게 노래했다.

막연한 분노도 괜찮은 안주가 된다/시인은 모름지기 겨울에 태어난다고/잘 익은 고갈비 몇 점 둘러앉아 마시곤 했지//우리 앉은 곳이 중심인가 변방인가/허튼 말씀의 사원 허물고 또 짓지만/성에 낀 창에 비치는 별들 빛나지 않았지… 바람은 왜 자꾸 아랫도리로 부는지/골목에서 단체로 부실한 오줌을 눈다/갈라진 오줌은 줄지어 합포만으로 가는데//싸락눈 오는 밤 우리는 어디로 가지/설익은 밥풀들처럼 선 채로 풀풀대다가/깃발도 다짐도 없이 허청이며 흩어져 갔다 -이달균 ‘우리 기쁜 언더그라운드 2’

뜨락집의 통술, 이달균 시인, 충무식당의 복국

그는 한참시절 어시장 안에 있던 속칭 ‘홍콩바’에서 장어 몇 점에 독한 술로 배를 채우며 젊음을 분노로 탕진했다. 호기 좋은 술친구들은 2층 다락방에서 창을 열고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은 곧바로 바다로 떨어졌다. 당시 마산은 수출지역의 호황으로 최대의 번성기를 맞고 있었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마산에 사는 스물한 살에서 스물네 살까지의 인구가 4만 명쯤이었는데, 그 중 남자는 1만5000명, 여자는 2만5000명 정도였다. 여성들의 대부분은 경상도 구석구석에서, 아니면 멀리 전라도에서까지 몰려온 여공들로, 그래도 청춘이라고 저녁이면 코스모스 고고장 쯤에 모여 젊음을 불태웠다. 그러나 아무리 청년문화를 흉내내봐도, 그곳은 변방이었고, 그들은 그저 꽃다운 ‘공순이’들일 뿐이었다.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마산에는 새로운 주점풍속도가 생겨났다. 이른바 ‘통술집’으로 기본 술을 시키면 안주가 거저 나오는 통영의 ‘다찌노미집’과 비슷한 형태였다. 통술집이 크게 유행을 하면서 외지인들에게도 각광을 받게 되자, 시에서는 아예 신마산의 두월동 일대에 통술거리를 조성하고 관광지역으로 집중 육성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통술집들은 면모를 일신하기는 했지만, 그에 따른 유지비와 해산물 가격의 급등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장사의 형태도 조금 변화를 갖게 되었다. 이 시인의 안내로 찾은 뜨락집(055-222-2837)만 해도 안주 한 상에 기본 4만 원, 술은 맥주로 시킬 경우 병당 3500원, 3병에 1만 원, 소주는 5000원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뜨락집은 분위기가 아늑하고 깔끔한데다 좋은 재료들을 사용하여 제법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마산수출자유지역이 공동화되어가고 있는 지금, 마산은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한때 마산만을 되살리기 위해 몸부림치기도 했으나, ‘그 잔잔한 바다’가 물의 빠른 드나듦을 막는 장애요소로 작용하면서 오염을 정화하려는 노력은 끝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엔 이르다. 마산의 그 오랜 문화적 전통과 불의에 맞서 싸웠던 정기를 되살린다면, 제2의 도약인들 어찌 불가능하기만 할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마산을 멀리서 회상이나 하며 ‘가고파’ 하는 도시가 아니라, 마산 시민 스스로가 ‘있고파’ 하는 도시로 만들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저도 연륙교

마산에서의 최고 속풀이는 뭐니 뭐니 해도 단연 복국이다. 아구찜으로 유명한 오동동에는 복국거리가 있다. 광포복집, 충무복집 등 고만고만한 복집들은 제각각 조금씩 다른 요리법으로 손님을 맞고 있다. 그리운 ‘남쪽바다’를 찾기엔 아무래도 봄날이 제격이다. 이른 봄 마산의 무학산으로도 모자라 창원의 천주산, 비음산까지 온통 진달래의 ‘연분홍 치마’로 물들인 뒤, 한껏 무르익은 봄은 안민고개를 넘어 진해 앞바다로 분분한 벚꽃 눈발이 되어 흩날린다. 그리고 마침내 봄날은 간다. 저도를 잇는 연륙교는 영화 ‘인디안 썸머’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었다. 특히 야경이 아름다워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사랑을 받고 있다.

유성문<객원기자> rotack@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