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평론

강희근, 자유로운 상상, 그 성채로의 초대

이달균 2011. 8. 17. 00:27

 

자유로운 상상, 그 성채로의 초대

-강희근 시집 『기침이 난다』를 중심으로

 

                                                                                                                                                                이달균

 

 

1. 어눌을 넘어 사상으로

 

 

온전히 버리거나

온전히 떠나버리는 무심이 천리를 가고

희미하던 꿈에 이름을 걸고

어눌의 사색을 넘어 사상으로 간다

 

지었던 집은 무너져 내리고

심었던 나무와 나무들

동네앞 실개천과 더불어 애초에 무심한

것들은 남아 제 자리 지키는

-<홍명희 생가> 부분

 

 

90년대 중반, 19세기 러시아의 대표적 화가 일리아 레핀(1844년~1930)전을 본 적이 있다. 전시장 곳곳엔 시베리아의 험난한 질곡을 건너는 사람들과 신념으로 시대를 사는 혁명가의 얼굴들이 리얼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나의 눈길을 끄는 그림은 단연 ‘누워서 책을 읽는 톨스토이’라는 작품이었다. 그림 속의 톨스토이는 만년의 생을 보내는 중이었고, 얼굴에선 평화를 넘어 어떤 천진함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강희근 시인의 열 번째 시집 『기침이 난다』를 읽으면서 기억에서 희미해져 버린 그 전시장에서 만난 그림 속의 천진함이 오버랩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참 오랜만에 곰삭은 시집 한 권을 읽었다. 숙련된 장인이 만든 옹기에 담긴 된장국 한 그릇을 먹는 기분. 소반 위에 함께 놓인 묵은 김치 한보시기와 알맞게 건조된 황태 한 마리. 이런 식사는 익숙한 듯하지만 기실 현대에 와선 외려 신선해보이기까지 하다. 몇 명의 시인들이 시작한 파편화 된 영혼의 고백이 나중엔 무리가 되어 벼랑 끝으로 몰려갔고, 이젠 그 피비린내마저도 시시해져 버렸다. 인용한 시에서 보듯 천리를 가는 힘은 ‘무심’에서 온다. 그의 화폭에 그려진 소재들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아무렇게나 서 있는 나무들, 실개천, 허물어지는 담장, 애초부터 무심한 이런 것들이 ‘어눌의 사색을 넘어 사상’이 되는 까닭이다.

 

 

절을 댓독 낙낙 바위 벼랑 꼭대기에 앉혀

놓았다

 

절암(絶巖), 봄꽃이 가슴에 소북을 치며 핀다

 

굴러떨어지듯 날아간 새

놓고 다녔던 소북하나 들고 날아왔다

 

근방 불자들도 꼬부랑길 올라오며

맞춤 같은 걱정 같은

소북 한 개씩 땀내는 손바닥에 넣고

 

떨어지는

고꾸라지는 아름다움, 비산하는 향기를 친다

 

쳐라, 그러고 보면 부처도 소북

바위도 소북

싸리나무 단풍나무 겨드랑이 이파리도 소북이다

 

벼랑은 소북의 곶간이다

-<정취암, 벼랑> 전문

 

 

하지만 ‘사상’도 ‘어눌’의 강을 넘어오면 이미 쇳소리가 없다. 쇠도 오래 세월에 묻히면 흙이 되기 때문이다. 흙은 쇠를 녹이기도 하고 여리디 여린 싹을 피워내기도 한다. 아무 것도 짓지 않은 맨흙이야말로 천진이 아니던가. 깎아지른 벼랑 위, 위태롭게 앉은 작은 암자가 있다. 이를 시인은 ‘절을 댓독 낙낙 바위 벼랑 꼭대기에 앉혀 놓았다.’고 말한다. ‘댓독’ 앉혀 놓았다니!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지만 이 싯귀에 붙여놓으니 그야말로 암자의 위태로움이 손에 닿을 듯하다.

 

군더더기 다 제하고 얻은 시어의 쌈박함. 이 시집 곳곳엔 이렇게 무릎을 치는 표현들이 숨어있다. 기교를 넘은 무기교의 언어들이 내겐 천진함으로 다가온다. 사상은 그런 무심 속에 있는 듯 없는 듯 스며있다. 꽃들은 무슨 할 말이 있어 벼랑에 목숨을 부려놓았나. 꼬부랑길 올라가는 불자들 가슴 가슴마다에도 잉걸불 돋고, 비껴나는 한 마리 새도 날개를 펼쳐 존재를 알린다. 그렇다. 곡절은 지상의 모든 것들에 다 있다. 짐승이건 꽃이건 하다못해 부처인들 두드리면 소리가 나지 않으랴. 연륜의 내공으로 이룬 통찰이 공허하지 않다.

 

강희근 시인은 어느 강연회에서 최계락의 시를 말하면서 손자를 얻고 난 후에 동시(童詩)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물론 평생 문학을 강의하며 산 시인이 동시를 모르진 않겠지만, 교감은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오는 것이 훨씬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리라. 다변보다 절제를 가진 시들이 세월의 무게를 아우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강물, 잠언을 들려주다

 

 

강은 노자와 함께 눈으로 말하며

흐를 때 강이다

 

눈은 말이지만

소리가 없다

 

소리없는 강이 소리없는 풀잎 소리없는

둑길 데리고

소리의 껍질을 깨고 흔든다

-<노자(老子)와 함께> 부분

 

 

청학이 청학 말하지 않고

은둔이 은둔 말하지 않고

더위 홀로 더위 말하고 있다

-<청학동 여름> 부분

 

 

이 시집은 한권의 잠언집이다. 우린 젊은 시인들이 노장과 화엄을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또한 멋대로 말을 지어내고, 익히 있었던 사실을 자신의 것인 양 호기롭게 말하는 만용도 보아왔다. 얄팍한 지식으로 삶의 지혜를 앞설 수 있을까? 그런 것들에 일말의 물음을 갖는 나의 결벽증이 문제이긴 하지만 수긍하기가 쉽지 않다. 인용한 시편들은 그런 치졸함에 죽비를 내려친다. 강은 말이 없지만 태초를 흘러왔고, 두껍게 잠든 소라 껍질을 깨운다.

 

청학동에 청학은 없다. 은둔도 없다. 이곳 어느 골짜기에 신라 때의 대 문장가 고운 최치원이 은둔하였던가. 이인로가 헤매었다는 화개 골골이 이곳이었을까. 경제적 계산만 남은 청학동을 시인은 소리치지 않고 담담히 죽비로 다스린다. 다만 “삼재며 유불선 눈치볼 것 없이/불도저 한 대 값이면/골짜기마다 서당/등성이마다 민박/움푹한 분지에는 궁/그리고 탑....”만을 얘기할 뿐이다. 여기서 말없음표는 더 많은 세속적 사물들을 주워섬기지 않으려는 의지로 읽힌다.

 

 

종지기 접시 같은 시만 돌아다니는

시대

청마의 ‘식목제’를 읽는다

 

대형 주발(周鉢)이다

굴러도 떨어져도 둔탁,

사랑방 큰 기침소리 붙들고 놓지 않는

둔탁이다

 

소리 끝

끄트머리 이제 막 달려와 숨가쁜 산맥들이 신발을 털고

 

산맥을 물살로 따라온 강물도 여기

다달아 바지 끝동 조용 조용히 턴다

 

아, 이 근방 사구(砂丘)에서

종지기 접시 같은 시들이 시를 읽을까

머리와 가슴으로 ‘식목제’를 읽을까

-<청마의 ‘식목제’를 읽는다> 전문

 

 

젊은 나이엔들 청마의 시를 읽지 않았으련만, 지금 와서 시가 읽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서 청마를 만나고 또 한 편의 시를 남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40년간 온몸으로 시를 보듬고 살다보면 심안이 떠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 눈으로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더 작아져 보일까. 아니, 언어의 집을 짓는다는 시인들은 또 얼마나 작아서 종지에 앉아 시를 쓰나. 한 그루의 나무도 심지 않은 이들이 고목의 그늘을 탓하는 시대. 요즘 시인은 종지에 숨어서 주발의 흠집을 말한다. 시인은 후학들을 꾸짖기에 앞서 ‘산맥을 물살로 따라온 강물’이 뭍에 닿아 ‘바지 끝동 조용 조용히’ 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식목제’는 산자를 비추는 거울이다. 시인은 말하기보다 그 거울을 맑게 닦아서 우리에게 보여주려 한다.

 

잠언은 소리치지 않는다. 다만 나직한 음성으로 들려줄 뿐이다. 꾸짖음은 자칫 생경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들은 가르치지 않는다. 과녁은 자신에게 향해 있고, 독자들은 다만 ‘사랑방 큰 기침소리’ 같은 그 둔탁함에 기대면 된다. 시집 속에 녹아 있는 꾸짖음들은 흙에 스미는 빗물이거나 빗물에 스미는 지렁이의 꿈처럼 분리되지 않는 그 무엇이다.

 

 

3. 사랑을 돌아보다

 

 

그녀 가고난 뒤

남은 스냅사진 한 장

손톱달 뒷면에 풀로 붙여 두었다

...<중략>...

달이 돌아서 스냅

정면으로 돌아올 때는

그리움이 얼굴에서 슬그머니 떨어져 나와

배경의 풀밭이나 풀벌레 울음에다 머리를

푼다

 

배경 바깥에 휘이는 강물살에도....

-<스냅사진> 부분

 

 

사랑은 슬프다. 아니, 애틋하다. 이순을 넘겨 돌아본 이들. 내가 두고 온, 아니 나를 두고 간 그니들이 어찌 꽃 같지 않으랴. 열 번째 시집에 그려진 사랑은 예사롭게 읽히지 않는다. 한 시인의 고백서인 양 페이지 곳곳에 묻어난다. 여러 해 전에 펴낸 시집 『화계리』도 사랑으로 가득했지만, 한 많고 사연 많은 고향 얘기가 너무 절절해서 일까 읽기에 조금은 불편했다. 마루에서 고방에서 튀어나온 말들이 선연한 핏빛을 띠었고, 바람은 나뭇잎들을 봉두난발 흩어 세웠다.

 

하지만 이 시집 속의 사랑은 다르다. ‘마당이 바다이고 해일이 되는’ 집 울안에 서서 스승 未堂에게, ‘이지러지고 돋아나는 달 하나 붙들고 사는’ 그녀에게, ‘돌 하나쯤’ ‘아녀자 앞치마로 막아섰던 이 시대의 여류’ 문정희 시인에게, ‘바람비 치고 진태미 오고 먹구름 울때’도 ‘짜브라지지 않은’ 고향 친구에게, ‘가난한 시인’에게, ‘점심 혼자 드는 사람’에게 시인은 연서를 쓰지만 숨결은 안으로 다소곶이 다스린다. 할 말 조금은 아끼려는 듯 여백마저 보인다.

 

위 시도 미당의 ‘冬天’을 연상시키듯 손톱달과 사진 한 장을 겹쳐 놓았다. 사람은 추억을 남기고 추억은 사진 한 장을 남긴다. 그 흑백 사진 너머엔 겨울 찬바람과 바람에 ‘휘이는 강물살’도 있으리라. 여기서도 그리움은 곧바로 뛰쳐나오지 않고 ‘슬그머니’ 나와, 배경이 된 ‘풀밭이나 풀벌레 울음에다 머리를’ 푸는 것이다. 생의 한 고비에 서보면 문득 ‘설유화 같은’ 여인이며 내 말 한사코 ‘듣지 않고 가버린’ 첫사람인들 어찌 생각나지 않으랴. 이 시집은 상상력의 산물이기보다 경험의 집적물이다. 하지만 그 경험들은 세월의 풍화작용을 거쳐 토양에 더 가까운 빛으로 변해있다. 정년을 맞은 아내에게 시인은 시로 헌사를 한다.

 

 

아니, 학교 하나가 집으로 걸어들어 왔다

 

아내의 학교는 이제 집에서 종소리를 내리라

할머니는 이제 공부 잘한다는 손녀의 말을 들으며

하던 대로 성서를 시간 시간

옮겨적을 것이다

 

아아 이제 집은 더 거룩하리라

학교가 언제나 거룩하듯이....

-<아내> 부분

 

 

반생을 교단에 바친 아내의 귀가를 이토록 아름답게 맞아준 이가 있을까. 애틋하고도 거룩한 환영으로 인해 아내의 귀가는 ‘문학적’인 성취를 얻었다. 서른 혹은 마흔 정도라면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 이십대의 뜨거운 열정이라면 김소월의 ‘초혼(招魂)’을, 삼사십의 나이라면 미당의 ‘무등을 보며’를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년을 마치고 가정으로 돌아온 아내에게 보내는 시는 지극히 개인사적인 것이고, 행사시처럼 비감동적일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런데 이 시는 상투적인 찬사를 배제하고 ‘학교 하나가 집으로 걸어들어 왔다’는 구절을 통해 시적 성취를 이룬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거룩하리라’는 결코 통속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시일수록 애정이 지나치면 푼수가 되고, 너무 건조하면 산문이 된다. 마찬가지로 시어들이 물샐 틈 없이 단단하면 깍쟁이 같고, 너무 느슨하면 감동이 줄어든다. 이 시가 성공할 수 있는 이유는 결을 섬세하게 다스리는 힘과 비유를 통해 발상의 전환을 이루기 때문이다. 처음 학교와 집은 전혀 다른 존재였지만, 아내와 집, 학교는 동일한 등식을 이루면서 합일된다. 이런 발상은 함께 수록된 다른 시에서도 재현된다.

 

 

액자에서 걸어 나와 창밖을 오히려/고전으로 내다보고 있다 ...<중략>... 집이 이제 액자로 들어갈 차례가 되고/있다/오늘은 만종이 오던 길/기도를 만나/턱도 없이 시간을 머금고 있는 것이 마을/들머리짬에서 보였다

-<밀레의 집> 부분

 

 

시인은 밀레의 ‘만종’을 바라본다. 잠시 후 밀레는 자신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와 한 화가를 성장케 한 시대와 넓은 들녘이 있는 바르비종 마을을 바라본다. 여기서는 거꾸로 객관적 상관물을 주관적으로 해석한다. 그 주관적 주인공인 밀레에게 생명을 부여하여 독자와 화가를 같은 공간에서 만나게 한다. 그래서 다시 우리들의 집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독자들은 바르비종 사람이 된다. 이처럼 시적 상상력은 단순히 판타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끌어온 판타지 속에서 독자들을 자유롭게 존재하게 해야 한다. 이 시집은 사랑의 대상을 연모함에 그치지 않고 시인이 만든 자유자재한 공간 속에서 함께 누리고 느낌을 공유하기를 염원한다. 바로 강희근식 사랑방정식이다.

 

 

 

4. 소통을 위하여

 

 

그리움은 그리움에서 나서 그리움에 가

죽는다

그리움은 그리하여 마침이 없다

강물을 보라 도도한 한때같이 청춘을 부르지만

물에서 나서 물에 들어가 죽는다

물도 그리하여 마침이 없다

그리움으로 쏘는 화살은 화살이 아니라

그리움의 말이다

화살은 늘 과녁을 향해 가지만

그리움의 말은 물처럼 흘러 믿음에 이른다

믿음에 머리가 어디 있고 끝이 어디 있는가

아, 그리움은 그리움에 가 죽고 그리움에서 다시

난다

그대가 그대이거든 그리움에 들어가 그리움이

하는 말

편지를 써라

물같이 흐르는 편지를 써라

-<그리움 헌장> 전문

 

 

시인은 이제 그리움에 기대려 한다. 이 시집 곳곳에 등장하는 강물, 에스메랄다로 대변되는 꽃들, 시창작 강의실 등등은 그리움의 화전(花田)이다. 그리움의 화살은 과녁이 없다. 그리움의 최후는 그리움에 묻히지만 다시 그 속에서 그리움이 난다. 그러므로 그것의 처음과 끝은 하나다. 그가 최후에서 다시 나고자 하는 긍극은 무엇인가? ‘그리움으로 쏘는 화살은 화살이 아니라/그리움의 말’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말을 짓는 사람, 즉 시인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그리움의 헌장’인 동시에 ‘시를 위한 헌장’으로 읽어도 무방하리라. 시인은 묻는다. 믿음은 있는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 강물이 물에서 나고 물에서 죽는다면 강은 영원하다. 물처럼 영원을 살기위해 시인은 주저없이 그리움, 즉 시 속에서 영원을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아직도 시인은 통(通)에 이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당연하다. 오랜 시간 시를 쓰고 또 가르쳐 왔지만 시에 통하기란 역부족이다. 그래서 시인은 기침이 나는 것이다. 스스로의 잠자리 등 같은 무능, 기침이 난다. ‘창작론’, ‘문학의 이해’ 시간에 참새 입으로 줄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함께 시를 읊었던 저 사랑하는 무공해의 새순들, 그 머리 위에다 점수를 갖다 얹고, 교수라고 함부로 1점 2점 차등을 주어 놓고, 제도 때문에, 제도가 이유야....하고 그냥 저냥 넘어온 그 확실한 직무유기, 기침이 난다

 

태형 1천대 이상 기소 가능한 죄인 너 시인이냐, 대학 생일 때 친구 조정래가 화가 나 내게 말했던 “강희근이 너 시인이냐? 하고 다그쳤던 그 냄비 뚜껑 같던 말, 너....너....시인이냐 기침이 난다

-<기침이 난다> 부분

 

 

기침은 왜 나는가. 기침을 할 수 없을 때는 폐렴 같은 질환에 걸릴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기침은 폐와 바깥 공기와의 소통을 말한다. 이물질의 분비를 위한 생리작용. 그렇다면 시에 있어 이물질은 무엇인가. 불안한 소통? 혹은 시를 둘러싼 강제하는 어떤 그 무엇? 그런 의문은 왜 이 시를 왜 표제시로 선택하였는가를 알아보면 되리라.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신작시 방을 개설하고 독자들과 소통하면서 “대학의 성 안에서 누렸던 의미를 이제 상상의 성채로 넘나들게 해 놓았다. 바야흐로 시인이 된 느낌!”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학에서 그는 줄곧 점수를 매기며 일용할 양식을 얻어왔다. ‘무공해의 새순’들에게는 이런 차등이 상처가 된다. 시를 가르치고 매기고 우열을 정하는 일은 일방적이다. 그런데 시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태생적으로 상대적인 것을 일방통행으로 재단하는 일은 시를 강의하는 시인에게도 상처일 수 있다. 이 시집은 ‘제도 때문에...’라고 치부해버린 자신을 향한 비판서이기도 하다. 기침은 바로 ‘일방적 소통불능에 의한 직무유기’라는 이물질을 뱉어내기 위한 생리 현상에 다름 아니다. 시인은 자신이 지은 ‘자유로운 상상의 성채’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요즘 그는 쓰는 이에서 공유하는 이로의 변환에 흡족해한다. 이 시집은 그런 노정의 한 쉼터, 의자를 닦고 알맞게 실내를 데운 찻집 같은 곳이다.

 

『기침이 난다』는 시력 40년 만이며 10번 째 시집이다. ‘어눌을 넘어 사상’으로 다시 언뜻언뜻 천진함마저 드러내었다. 이 글을 쓰면서 11번째 시집을 기다리는 일은 너무 성급해 보이지만, 진정 사상을 넘어 구축된 천진과 동심의 성이 기다려진다.

소통하라, 끊임없이 소통하라. 시인은 오늘도 스스로를 다그친다.